사역자의 권리와 자유 – 고린도전서 9:1-15

오늘의 설교 제목은 사역자의 권리와 자유입니다. 오늘 본문의 줄거리는 사도 바울은고린도 교회를 개척하여 많은 사람들을 개종시켰으므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로부터 받아야할 마땅한 예우도 받고, 재정적으로 지원을 받을 권리가 있지만 사도 바울은 복음 전도에 지장이 될까봐서 자기가 가진 권리와 자유를 사양했다는 믿음의 본을 우리들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와 같은 사도 바울의 교훈과 신앙을 아주 귀히 여기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소개받는 우리 모두가 사도 바울이 얼마나 교회와 성도들을 사랑하고 아끼기 때문에 자기가 누릴 수 있는 모든 권리와 자유를 포기했는지 사도 바울의 마음을 읽고 우리들도 그를 본받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누어 본문의 뜻을 이해하고 본문이 주는 교훈을 찾고 그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는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사역자로 인정받을 권리(1-2) [2]재정적으로 후원 받을 권리(3-11) [3]권리를 사양하는 자유(12-14) [4]이런 글을 쓰는 이유(15)입니다.

 

[1]맨 먼저 1절부터 2절까지의 사역자로 인정받을 권리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개척했는데 고린도 교회로부터 푸대접을 받았습니다. 재정적으로 지원을 받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심지어 사도로서 사역자로서도 인정을 받지 못한 실정이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중 상당수가 사도 바울의 사도직을 인정치 않았습니다. 또 그가 희생하며 전도하는 전도의 순수성을 인정치 않고 다른 목적으로 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또 어떤 자들은 그의 변변치 못한 웅변술을 못마땅하다고 불평을 했을 것이며 어떤 이들은 외모가 어떻다느니 하여 자기들의 빗나간 불평을 했을 것입니다. 반면에 오히려 고린도 교회를 위해 수고나 희생이 없었던 베드로 같은 다른 사도들에게는 존경과 지원을 하는 고린도 교회의 풍토였던 것입니다. 이런 배은 망덕한 고린도 교회에 사도 바울은 지금 편지를 써서 늦게나마 충고하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1절과 2절에서는 사도 직을 인정하지 않는 그들에게 자기가 분명한 사도였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서운한 마음을 짐작하면서 그가 무슨 주장을 하고 있는지 보시기 바랍니다.

 

1절과 2절을 통해 자신은 분명히 자유자요 사도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자유자란 율법이나 어떤 죄에 얽매이지 않고 복음으로 자유인이 되었음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우리 모두도 사도 바울과 같이 자유인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사도라고 합니다. 여기서의 사도란 주님께서 직접 선택하신 제자로서 주님의 부활을 목격한 자들에게 붙여지는 칭호로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바로 그런 자격이 있는 자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언제 보았습니까?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뵈었고 그 때에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사도가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사도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자기도 예수님을 보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또 그는 자신이 복음을 증거하여 개종자들을 냈으므로 그 결과를 가지고 자신은 순수한 전도자 즉 사도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다른 지역 사람들은 사도 바울을 가짜라고 할지 몰라도 사도 바울이 못 먹고 못 입고 많은 고생을 하면서 전도하여 개종시키고 교회를 세웠으므로 고린도 교인들에게는 틀림없는 사도여야하고 그가 사도라는 사실을 바로 고린도 교인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자체가 증거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2]두 번째로 3절부터 14절까지의 재정적으로 후원 받을 권리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개척할 때에 재정적인 지원을 오히려 빌립보 교회로부터 받고 또 자신이 직접 천막을 치는 일을 하면서 재정적인 문제를 해결하였던 것입니다. 모든 유대인들은 부모로부터 한가지의 기술을 배워 먹고 살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유대인들의 교육이어서 유대인들은 경제 문제는 세계를 이끌어 가고 있는 것으로 알게 됩니다. 그러나 이방인들은 어떤 노동이든지 노동일하는 자들을 낮게 보는 풍속이었는데 이런 이유로 천막 치는 일을 하고 있는 사도 바울을 낮게 보고 일을 안하고 전도하는 베드로 같은 자는 영적 지도자로서 높여준 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개척하고 전도했던 2년여 기간에는 비록 아무 것도 받지 않고 일을 했지만 지금 편지를 통해 자신이 재정적 지원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는 사실을 몇 가지의 논증을 통해 주장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들을 군인에 비유하여 어떤 군인이 자기 먹을 것을 가지고 다니면서 군대 생활을 하겠느냐고 했으며, 또 자신을 농부에 비유하여 어떤 농부가 자기 농장에서 나는 것을 먹지 않겠느냐고 했으며 이젠 양을 치는 목자에 비유하여 어떤 양을 치는 목자가 자기가 치는 양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세상의 원리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에도 ‘곡식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고 했는데 이 말은 소를 위한 말이라기 보다는 사람을 위한 말로서 일하는 자에게 먹을 것을 줘야 한다는 하나님의 원리를 말한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신령한 것을 고린도 교회에 나누어 줬으니 물질적인 것으로 후원을 받는 일이 마땅하지 않겠느냐는 주장인 것입니다. 아멘 입니까?

 

[3]세 번째로 12절부터 15절까지의 권리를 사양하는 자유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다른 사도들과 같이 자신이나 자신과 함께한 전도자들도 사도 베드로나 다른 사도들이 가진 권리를 가지고 있지만 이 권리를 사양한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들이 권리를 가지고 있음을 다시 한번 강조하기 위해 주님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복음을 위해 일하는 자는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셨으니 교회로부터 생활비나 활동비를 받는 것이 마땅함을 강조하면서 그러나 자신은 이 권리를 사용하지 않고 모든 주장을 말하지 않고 참았던 것은 복음 전도에 지장이 없게 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사도 바울을 비난하여 말하기를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한 것은 먹고살기 위함이라고 악담을 했기 때문에 돈을 전연 받지 않고 한 것입니다. 전도의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 월급 받는 것을 사양했다는 것입니다. 결과가 어떻습니까? 고린도 도시의 험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도 복음이 잘 잔파되어 주님의 몸된 교회가 이룩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승리요, 사도 바울의 승리임이 틀립없습니다.

 

[4]네 번째로 15절의 이 글을 쓰는 목적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전도하는 동안에 그가 챙길 수 있었던 권리를 챙기지 않고 있다가 늦게서야 이런 주장을 펴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에게 늦게 나마 대우를 해 달라는 것이 나라고 합니다. 굶어 죽을지언정 물질적으로 보상하라는 말은 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바울을 비난하고 있는데 이제 와서 돈을 받는다고 한다면 그가 지금 이 글을 쓰는 참 뜻을 오해할 것이 뻔하기 때문에 죽어도 재정적인 도움은 받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글을 늦게나마 쓰는 이유는 그들이 꼭 알아야 할 알 것을 가르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오늘 본문을 통해 어떤 교훈을 받았으며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 생활에서 어떻게 적용해야 할까요?

 

교인도 전도자도 자신의 책임과 위치를 바로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인들은 영적 지도자에게 해드려야 할 마땅한 대우를 해드려야 하고 전도자는 자기의 목적을 바로 알아서 재정적 지원을 요청하든지 아니면 자신이 받을 권리를 사양하든지 복음 전도에 지장이 안돼는 방향에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인의 바른 자세로서는 영적인 지도자의 나이가 많든 적든, 실력이 부족하든 남든, 영적 지도자를 영적 지도자로 대우를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영적 지도자를 지나치게 우상시하는 것은 절대 막아야 할 일이나 영적 지도자를 영적 지도자로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영적 지도자에게 최선의 예우를 하는 훈련이 꼭 필요합니다. 어떤 교파에서 지나치게 목사님들을 우상시하는 것은 낮추어야 하고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너무 낮게 대우하는 것은 높여야 할 것입니다. 이것을 가르쳐야 하고 배워야 합니다. 이런 면에서 윤 전도자를 전도자로서 예우해야 함을 교인들에게 조금이라도 가르쳐 보려고 했습니다. 물질적인 것 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대우를 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윤 전도자가 설교를 할 때에는 제가 버스 운전을 한 것이 바로 의미입니다. 지금도 내가 버스 운전 면허를 받고 내가 운전을 할 수 있지만 되도록 교인들을 가르치고 훈련시키기 위해 버스를 아예 세워 두었습니다. 우리 교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교인들이 하고 전도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전도자가 하는 것으로 구분해 보려는 의도인 것입니다. 제가 늙어서 주책을 부리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러나 교인들을 가르치기 위해 나에게 사례금을 더 올리라고 할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 교회에 누가 전도자의 대를 있던지 최선의 예우를 해드리는 모범적인 그리스도의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요사이 교회들이 재판을 하고 있습니다. 목사와 장로 그룹간의 재판입니다. 재판의 결과가 복음전도에 도움이 될까요? 도움이 되면 재판을 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재판소에 고소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믿음은 자신이 받을 많은 권리를 포기한 것은 복음 전도에 지장이 있지 않도록 이라고 했습니다. 같은 믿음을 우리가 본 받는다면 교회는 복음 전도에 지장이 되지 않도록 전도자에게 최선의 대우를 해드려야 하고 또 전도자는 복음 전도에 지장이 되지 않도록 사례금을 받든지 아니면 사양하든지 해야 한다는 결론인 것입니다. 우리의 행동의 결정의 최종 목표는 복음 전도에 도움이 되는 것인지 아니면 복음 전도에 지장이 되는 것이냐여야 합니다. 지금 나의 결정은 복음 전도에 도움이 되는 결정입니까? 그 권리와 자유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아니면 지금 나의 결정이 복음 전도에 지장이 되는 결정입니까? 그렇다면 그 권리와 자유를 사양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의 행동과 결정이 복음 전도에 지장이 되지 않는 결정, 오히려 복음 전도에 도움이 되는 결정을 내리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