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종이 된 바울 – 고린도전서 9:16-23

우리들은 요사이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를 통해 매주 하나님의 뜻을 전달받고 있으며 사도 바울이 하나님과 한 영혼을 얼마나 사랑했는가를 배우고 있습니다. 9장 1절로 15절까지에서 바울은 자기보다 믿음이 적은 자에게 거리낌을 주는 일이 된다고 한다면 자기는 일생동안 고기를 먹지 않겠다는 믿음의 고백을 들었고, 복음 전도에 지장이 있을까봐서 고린도 교회를 개척할 때 고린도 교회로부터 아무런 보수를 받지 않았다는 고백을 들었던 것입니다.

 

오늘은 자신은 자유인이지만 복음을 전도하기 위해 스스로 많은 사람들의 종이 되었다는 고백을 소개받게 됩니다. 이런 말씀을 대할 때마다 사도 바울은 우리들이 평소에 믿고 알고 있는 것보다 더 큰그릇임을 알게 됩니다. 오늘 소개되는 말씀을 통해 사도 바울이 하나님과 복음을 사랑했던 것 같이 우리 모두도 하나님과 복음을 사랑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을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본문을 이해하고 본문이 주는 교훈을 깨닫고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는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복음 전도의 사명(16) [2]복음 전도의 보상(17,18) [3]복음 전도의 방법(19-23)입니다.

 

[1]맨 먼저 16절의 복음 전도의 사명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들은 16절의 말씀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는 말씀을 너무나도 많이 들었고 잘 아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듣고 알고 있는 것은 이 말씀의 것 모습뿐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오늘은 이 말씀의 속 모습도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우리들은 이 말씀을 바로 이해하기 위하여 이 말씀 바로 앞에 있는 16절 앞부분을 바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16절 앞부분에 ‘내가 복음을 전할 찌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입니다. 저는 평소에 이 말씀을 대할 때마다 사도 바울에게 불만스러웠습니다. 왜? 복음을 전할 때에 기쁨으로 하지 아니하고 억지같이 부득불 할 일이라고 표현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아마 여러분도 저와 같은 생각을 가졌으리라고 봅니다.

 

이 말씀의 본 뜻은 글자 그대로 자기가 복음을 전하고 있지만 복음을 전하는 일에 대해서는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이며 그 이유는 자기가 자진해서 한 것이 아니라 하지 않으면 안돼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해야할 일을 마땅히 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의미에서 이렇게 표현했을까요? 사도 바울이 자원해서, 기쁨으로 복음을 전한 줄 알고 있었는데 억지로 마지못해서 했다는 표현 같아서 조금 표현이 이상스럽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것은 깊은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자신이 복음 전도자가 된 것이 자신이 원해서 자신이 선택한 길이 아니고 주님께서 강권으로 전도자가 되도록 했으므로 하나님은 주인이시오 자신은 종일뿐이므로 종이 일을 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요 의무일 뿐이며 종이 만일 일을 하지 않는다면 화 즉 벌을 받을 뿐이라는 논리인 것입니다. 즉 다른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제자가 되도록 권할 때에 이를 수락하고 복음 전도의 길을 떠났지만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께 온전히 사로잡혀서 거꾸러지고 자기 의사와는 상관없이 결과적으로 복음 전도자가 되었기 때문에 자신은 남에게 자랑할만한 일이 못되며 또한 자신은 종에 불과 하므로 주인이 자신에게 맡기신 복음 전도의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의무만을 갖고 있을 뿐이요 만일 그 직무를 하지 않으면 자기의 주인으로부터 징계를 면할 수 없다는 의미로 16절의 말씀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16절을 통해 자신의 사도직은 자신이 만든 것이 나니라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맡기신 사실을 강조하였고, 자신은 하나님의 종이므로 자신의 자유와 의지는 전연 반영될 수 없고 오직 맡기신 일에 충성만이 있을 뿐임을 강조한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런 표현은 사도 바울에게서만 볼 수 있는 특유한 표현 같기도 합니다. 복음을 전하도록 하나님의 종으로 임명되었으니 종이 맡은 일을 마땅히 해야하는 것이지 맡은 일을 하지 않을 어떤 자유를 부여받지 않았다는 말인 것입니다. 정말 충성된 종이라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2]두 번째로 17절과 18절의 복음 전도의 보상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한 것은 자기가 임의로 한 것이 아니므로 자신은 자랑할 것도 없고 그런 일을 한 결과로 받을 상도 없다고 했습니다. 오직 해야할 직무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해야할 직무가 무엇일까요? 복음 전도입니다. 우리들은 어떤 일을 한 것에 대한 그 대가로 무엇을 받아야 마땅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18절에서 자기가 받을 상은 무엇을 받는 것이 상이 아니고 자기가 마땅히 받아야할 생활비를 안 받는 것이 상이요, 또 자신이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를 누리지 않는 것이 바로 자기의 상이라고 했습니다. 교회로부터 한푼이라도 더 받아야 한다고 주장을 하고 자기가 교회 누구보다도 더 많은 권위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을 하는 것이 우리 일반 사람에게는 당연한 일 같이 생각되는데 사도 바울은 자기가 마땅히 받아야 하는 보수를 사양하고 자기가 권세를 부릴 수 있는 것들을 하나도 부리지 아니하는 것이 바로 자기에게는 상이라고 하니 우리 같이 평범한 자들은 그 깊이를 다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참 훌륭한 종이라는 생각을 다시 갖게 합니다.

 

물론 이 말은 복음 전도자들은 바울을 닮아서 아무 것도 받지 않아야 하고 아무 것도 누리지 않아야 한다는 표준을 소개하기 위한 말씀으로 이 말을 한 것은 아닙니다. 자기가 생활비를 받는 일이나 다른 어떤 권리를 누리는 것이 복음 전도에 지장이 된다고 믿어진다면 아무 것도 받지 아니하고 아무 것도 누리지 않겠다는 표현인 것입니다. 복음 전도자는 복음 전도가 자기의 목적이요 사명이지 무엇을 받고 누리는 것이 전도자의 목적이 아니라는 전도자의 올바른 자세에 대해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3]세 번째로 19절로부터 23절에 있는 복음 전도의 방법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 같이, 이방인에게는 이방인같이, 믿음이 약한 자에게는 믿음이 약한 자 같이 여러 모양이 되었다는 말씀을 본문에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잘못 이해한다면 줏대가 없고 타협을 하는 인물로 평가되어질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사도 바울은 신념이 없어 보이는 베드로를 강하게 책망을 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런 사도 바울이 할례가 그 이상 신약 시대에 있는 우리들에게 구속력이 없는 줄을 알면서도 유대인들의 전도를 위해서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한 인물이기도 한 것입니다. 즉 유대인들이 무할례자와는 상종도 안하므로 유대인들과 교제하며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무할례자인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한 것입니다. 신약 시대에도 할례를 꼭 행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행한 것이 아닙니다. 한국 사람을 전도하기 위해 친근한 한국 옷을 입고 한국 예절을 배우는 것과 같은 전도 방법의 하나로 전도 대상자와 어울릴 수 있도록 하였다는 전도 방법을 우리들이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을 전도하러 가는 사람이라면 어떤 복장으로 그를 접근해야 하겠습니까? 마땅히 검소한 복장이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다는 원리와 같은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전도를 위해 자신이 여러 모양이 된 것을 두고 19절에서 ‘자신은 모든 사람에게 자유 하였으나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더 많은 유대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우대인의 풍습을 존중하고, 더 많은 이방인을 전도하기 위해 이방인들의 풍습을 존중하고 그들과 같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자신은 그렇게 처세를 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를 갖고 있으나 전도를 위해 그렇게 처세를 하는 자신을 다른 사람의 종이 되었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의 종이란 어떤 죄와 신앙의 기준과 전연 상관되지 아니한 어떤 풍습이나 예절을 따랐다는 말이지 신앙에 어긋나는 것에까지 죄인들과 함께 같은 모양이 된다는 말은 전연 아닌 것입니다. 즉 술을 마시는 자를 접촉하기 위해 술을 함께 마신다거나 마약한 자를 접촉하기 위해 마약을 함께 하고 창녀를 전도하기 위해 창녀와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전연 아닌 것입니다.

 

또 교인 숫자를 늘리기 위해 교회 간판도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잘되는 장로교회나 침례교회로 바꾼다거나 요사이 청년들을 전도한다는 핑계로 뺀드나 다른 악기를 동원하여 예배를 드리고 매주 행하고 있는 주의 만찬을 예배에서 뽑아 내는 정도는 다른 사람의 종이 되는 자세가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침해하고 거역하는 행동이므로 저는 그런 권위를 부여받지 못한 종이므로 저는 교인들이 다 떨어져 나간다하더라도 그것을 행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 교회 교인이 너무 적어 그런 변동이라도 부려서라도 교인 숫자를 늘려야 한다는 의견을 말하고 싶으신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교인 숫자를 늘리는 것이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이 아니고 말씀에 순종하는 식구를 늘리는 것이며 많은 종을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이 아니라 말씀대로 가르치는 종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전도를 위해 전도 대상자의 입장과 신분을 고려하여 그의 입장을 이해하고 그와 같은 입장에서 서서 전도를 할 때에 전도의 효과가 있을 것이므로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이 되었다는 전도 방법을 우리들에게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23절에서 자기가 이렇게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이 된 이유를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들에게 구원을 주는 복음의 특권을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갖게 하기 위함이란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오늘 주신 본문을 통해 어떤 교훈을 받았으며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들은 사도 바울이 우리들에게 소개한 자신의 복음 전도에 대한 올바른 자세를 우리들도 본받아야겠다는 것입니다. 첫째는 복음 전도는 해도 좋고 안해도 좋은 어떤 선택적인 일이 아니고 마땅히 해야 한다는 철저한 사명감을 본 받아야 하겠습니다. 둘째는 전도에 대한 보상문제인데 사도 바울이 가지고 잇는 자부심과 같이 전도의 대가를 지금 어떤 물질과 명예로 보상받는 것만이 보상이 아니며 복음을 위해 내가 받을 수 있는 권리를 사양하는 것이 더 도움이 된다면 그 권리를 사양할 수 있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복음 전도가 우리들의 목적이지 어떤 보상이 우리들의 목적이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 하겠고 또 복음전도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물질로 보상받는 것을 사양하는 그 자체를 큰 보상으로 알 수 있는 높은 차원의 신앙과 자부심을 갖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세 번째로는 더 많은 사람들을 전도하기 위하여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이 될 수 있는 융통성이 있는 사도 바울과 같은 훌륭한 전도인들이 다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잘 감당하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