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만찬 – 고린도전서 11:17-34

오늘 주신 말씀은 매주일 마다 만찬을 행할 때에 소개받고 있는 말씀이므로 어찌 보면 성경 말씀 중 우리들이 가장 많이 듣고 보고 있는 말씀이 되겠습니다. 다 아는 말씀이므로 건너뛰어도 되겠지만 또 달리 말을 한다면 오히려 자주 보는 말씀이므로 본문의 뜻을 더 확실하게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모든 말씀이 다 중요한 말씀이겠지만 이 말씀은 본문이 주는 본 뜻을 바로 알고 실천해야하는 중요한 말씀인 것입니다.

 

오늘 주신 본문에서는 고린도 교회가 주의 만찬을 잘못 시행하고 있는 것을 책망하면서 바른 처방을 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소개받는 우리들은 주의 만찬에 대해 올바로 이해하여 우리들이 매주 행하는 만찬을 통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우리들의 구원과 재림에 대한 확신을 가져다주는 값있는 성례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주신 본문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본문의 뜻을 이해하고 본문이 주는 교훈을 찾으며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는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책망(17-22) [2]처방(23-29) [3]징계(30-34)입니다.

 

[1]맨 먼저 17절부터 22절까지의 책망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11장 2절에서는 고린도 교회가 바울이 가르친 교훈과 유전을 그대로 잘 지켜나가고 있음에 대해 칭찬을 했는데 주의 만찬에 대해서는 칭찬할 수 없다고 하면서 엄하게 책망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주신 본문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 고린도 교회의 그 당시 사정을 좀 이해하는 것이 필요한 줄 압니다. 초대 교회 당시에는 애찬이란 것이 있어서 음식을 온 회중이 함께 나누면서 성도들이 형제애를 체험하였던 것입니다. 주일에 예배드리러 올 때에 각자가 음식을 가져오되 가난한 자들이나 노예들은 음식을 가져오지 못하므로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부자들은 음식을 가져오지 못할 사람들을 위해서 넉넉하게 가져왔던 것입니다. 어찌 생각하면 그 당시 가난한 자들이나 노예들이 배불리 먹어볼 수 있는 때가 바로 주일 예배 때였으리라 생각됩니다.

 

그 광경을 한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가난한 자와 부자가 구별 없이 한 형제로서 음식을 나누고, 노예와 상전이 구별 없이 형제로서 친교를 나누며, 유대인과 이방인이 전연 구별되지 않고 성도라는 같은 이름으로 한 식탁에서 음식을 나누는 광경이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 장면이겠습니까? 하나님이 한 가정의 아버지시고 흑인이고 백인이고, 가난한 자와 부자, 또 귀하고 천한 자 들 모두가 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어 한 공동체를 이루고 각자 집에서 음식을 가지고 와서 음식을 나누었던 그것을 사랑의 식탁, 즉 애찬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그런 귀한 애찬이 변질된 것입니다. 부자는 가난한 자를 깔보았습니다. 상전은 노예들을 깔보게 되었습니다. 즉 교회 내에 부자파와 가난한 자의 그룹이 나누어지게 되어 음식을 함께 나누어 먹는 분위기가 깨지고 만 것입니다. 마땅히 온 교인들이 다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함께 먹어야 마땅한 일인데도 부자들은 자기들이 가지고 온 음식을 가난한 자들이 오기 전에 먼저 먹어버림으로 부자들은 배부르고 취했으며 가난한 자들은 배고팠던 것입니다. 이런 소식을 사도 바울이 듣고 책망을 하게된 것입니다. 가난한 자를 무시하고 부자와 가난한 자가 두 그룹으로 나누어지는 교회를 연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교회에서 팟락을 하는데 가난한 자나 노예는 가져올 음식이 없어서 빈손으로 오는데 부자들은 자기들이 가져 온 음식을 가난한 자들이 오기 전에 먼저 먹어치웠다고 상상해 봅시다. 그런 분위기의 교회라면 주일에 모이는 모임이 의미가 있겠습니까? 만찬을 한들 그 만찬이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런 분위기라먄 성도들의 기도와 헌금이 하나님께 상달되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이런 모임을 유익이 못되고 오히려 해로운 모임이라고 단정하고 있습니다.

 

주일에 교회에 오는 것은 하나님을 중심하여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성도들이 한 형제임을 확인하는 사랑의 교제를 갖기 위해 모이는 것인데 가난한 자를 무시하고 따돌리는 그런 자들의 예배를 하나님이 받으시겠습니까? 이런 예배는 하나님과 형제를 경멸하는 모임이 되므로 해로운 모임이라고 한 것입니다. 교회라고 간판을 붙이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고 있지만 어떤 모임은 하나님 보시기에 해로운 모임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가난하고 약한 자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곳이 바로 교회 공동체여야 하는데 가난한 자를 부끄럽게 하는 곳이 바로 교회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성도들이 아버지를 모시고 친교 하는 영적인 모임이어야 함에도 본질적인 목적에서 벗어나 먹고 마시는 집으로, 또는 사업장이나 친교장으로만 존재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교회에서는 주의 만찬을 매주 한다고 해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 바로 사도 바울의 책망인 것입니다.

 

[2] 두 번째로 23절부터 28절까지의 처방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히려 해로운 모임에서는 주의 만찬이 전연 의미가 없음을 책망하고 주의 만찬의 올바를 시행을 위해 만찬의 본래의 의미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주의 만찬에 대해 사도 바울이 내린 처방을 간추려 본다면 주의 만찬은 주님께서 이를 행하도록 명하신 것임을 강조했습니다. 즉 주님께서 명하신 것이므로 꼭 행해야 한다는 의미가 있으며 이를 행하면서 주의 죽으심을 기념하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떡과 잔을 들면서 우리들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찢기신 몸과 흘리신 주님의 피를 기념하라는 것입니다. 기념하라는 것은 주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골고다에서 십자가를 지신 역사적인 사실을 기억하고 그 십자가를 통한 우리들의 구원의 사실을 믿고 감사하며 우리들도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겠다는 다짐이 있어야 함을 의미입니다.

 

주의 만찬의 가치는 바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그 사건을 영원히 기념하는 것이며 그 행사에 동참하는 자들은 구원의 확신과 구원에 대한 감사가 있어야 하며 대신 죽으신 주님을 위해 무엇이든 바치겠다는 마음의 고백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또 중요한 사실은 이것을 행하므로 주님의 재림에 대한 소망을 크게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주의 만찬을 행하는 자들이 과거와 현재의 자기 죄에 대한 속죄의 확신과 주님 오실 때의 구원의 확신을 갖고 이에 대한 감사와 헌신의 고백이 있을 때에주님께서 명령하신 만찬은 하나님께 영광되고 우리들에게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유익이 되는 주의 만찬이 되도록 하기 위해 합당하게 행하라고 하였습니다. 자기를 살피라고 했습니다. 주의 몸을 분변하라고 했습니다. 그렇지 못한다면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다고 했고 자기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라 했습니다. 자신을 살피라는 것은 자기 속에 있는 죄를 회개하라는 것이 강조된 말씀이며 자신이 이 만찬의 참 의미를 알고 하는 지 확인하라는 것입니다. 주의 몸을 분변하라는 말도 이 떡과 잔의 의미가 무엇인지? 왜? 주님께서 죽으셨는지? 내 자신과 주님의 올바른 관계를 확인하라는 뜻입니다. 주님의 만찬이 그렇게도 큰 의미가 있어서 이를 행하도록 명한 것이나 떡과 잔을 들 때에 보통 음식을 먹는 거와 같은 생각으로 먹고 마신다면 그리스도의 거룩한 피를 욕되게 하는 것이며 결과적으로 그리스도의 피는 내 죄를 사하지 못하여 오히려 먹고 마심으로 죄를 먹고 마시는 결과가 된다는 경고를 주고 있습니다.

 

[3]세 번째로 30절로 34절의 징계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 올바르지 못하므로 영육간에 징계를 받은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병든 자와 잠자는 자가 적지 아니하다고 했으니 영육간에 징계가 주어진 것을 상기시키면서 그 원인을 제거하도록 처방을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행이 이 징계는 깨우침을 주어 영원한 구원에 이르도록 하기 위한 징계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즉 세상이 심판을 받아 망하게 될 때에 우리는 그런 심판을 받지 않게 하도록 하기 위해 지금 내려진 가벼운 징계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벼운 징계이지만 이 징계의 의미를 깨닫고 주의 만찬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형제들의 신앙에 유익이 될 수 있도록 만찬이 올바르게 집행될 수 있는 교회 공동체의 분위기를 개선하라는 것입니다. 즉 가난한 자와 부자의 파당을 없애고 먼저 온자와 늦게 온 자가 함께 애찬에 참예할 수 있도록 서로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남에 대해 관심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혹시 기다려야하는 교회의 분위기를 따르자면 자기 배가 고플 것으로 생각되면 집에서 무엇을 먹고 오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께나 사람에게 비판을 받는 교회가 되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오늘 주신 본문을 통해서 어떤 교훈을 받았으며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첫째 만찬을 행할 마땅한 교회 분위기로 회복시키라는 것입니다. 만찬을 행하기에 마땅한 분위기란 모임에 참석한 교인들이 한결같이 하나님께 예배드릴 목적으로 와야 하며 성도들끼리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분위기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모임의 목적이 하나님께 예배하고 성도들끼리의 친교를 진심으로 바라는 공동체라면 만찬을 행하기에 마땅한 분위기라 할 수 있겠습니다. 모임의 목적이 하나님이 제외되거나 친교의 범위가 끼리끼리만 되어진다면 유익한 모임이 될 수 없기 때문에 매주 행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온전히 따르는 길은 만찬을 행하기에 마땅한 분위기로 회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만찬에 임하는 개개인이 만찬에 임할 바른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찬에 임할 바른 마음가짐이란 만찬의 목적과 의미 또 이를 행함으로 얻어지는 유익에 대해 바로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매주 행하는 주의 만찬은 비록 보통 떡과 보통의 포도즙이지만 이것이 얼마나 귀중한 것임을 알고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매주 행하는 교회이기 때문에 너무 의미 없이 습관적으로 들 수 있으므로 만찬을 행할 때마다 새롭게 마음을 가다듬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주의 만찬은 이를 행하도록 명령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란 사실을 알아야 하며 이것을 행하는 목적은 주님께서 인류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못 박히시고 피흘리심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주의 죽으심을 기념한다는 것은 주님께서 죽으심으로 내 옛 죄가 용서되었으며 현재도 구원받았고 주님 오실 때에 들림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감사와 찬양을 돌린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감사와 찬양의 마음에는 나도 그리스도를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서 헌신하겠다는 고백이 따르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만찬을 행하므로 내 죄가 용서함을 받은 사실에 대해 감사와 감격이 있고 주님을 위해 몸바쳐 일하겠다는 다짐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요 또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주님께서 받아주실 것을 믿는 재림의 소망을 가질 수 있다면 주님께서 명하신 만찬은 그 빛을 발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매주 마다 주의 만찬을 행할 수 있는 교회의 교인이 되도록 불러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매주 주의 만찬을 행할 때에 만찬의 의미를 잘 살려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우리들의 자신들에게 크게 유익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