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언과 예언 – 고린도전서 14:1-25

지난주에 고린도 전서 13장을 했는데 고린도 전서 13장을 무슨 장이라고 한다고 했지요? 사랑 장이라고 합니다. 사랑이 강조된 것을 보면 고린도 교회가 사랑이 빠진 신앙 생활을 했기 때문이라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방금 봉독한 말씀은 방언에 대해 강조하고 있으므로 우리가 짐작할 수 있는 것은 고린도 교회가 방언에 대해 뭔가 잘못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지난 12장에서 성령의 은사문제를 이미 다루었는데 13장에서 사랑을 다루었고 14장에서 방언 주제를 다시 다루고 있는 배경은 고린도 교회가 성령의 은사 중에서 방언의 은사를 제일 큰 은사로 여기고 방언의 은사를 받은 교인은 이를 자랑하고 교만하여 이 방언의 은사를 받지 못한 교인을 얕잡아보는 교회 분위기였던 것입니다. 즉 그들은 은사의 목적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사랑이 빠진 교회 생활을 했기 때문에 이를 고쳐주기 위해 이런 글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에서뿐 아니라 방언 문제는 현대 교회에서도 많은 문제를 낳고 있는 요소임에 틀림없습니다. 우리들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이 편지를 통해 방언에 대한 성서적인 답이 무엇인지 확실히 깨달아 방언이 우리들에게 주는 혼동으로부터 온전히 해방될 수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주신 본문을 네 부분으로 나누어 본문의 뜻을 이해하고 본문이 주는 교훈을 찾고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는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방언과 예언의 차이점(1-5) [2]방언과 관련된 문제들(6-13) [3]방언과 바울의 개인적 적용(14-19) [4]방언과 예언의 목적(20-25)입니다.

 

[1] 맨 먼저 1절부터 5절까지의 방언과 예언의 차이점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사도 바울이 방언을 하는 고린도 교인들이 저 혼자 잘 믿는 것 같이 남의 신앙은 깔보고 혼자 둥둥 떠있는 사람들에게 예언과 방언을 비교하여 그들이 그렇게도 높게 평가하고 있는 방언은 예언보다 교회적인 측면에서는 오히려 더 못하다는 견해를 밝히므로 방언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고린도 교인들의 교만을 낮추어 성도로서의 바른 자세로 환원되도록 시도하고 있음을 보게됩니다.

 

1절에서는 지난 13장에서 강조했던 사랑을 다시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랑이 빠진 성령의 은사는 아무런 유익이 없음을 이미 강조했는데 여기에서 다시 사랑의 중요성을 한번 더 강조하므로 방언 은사 제일주의에 빠져 있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그들의 허점을 지적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령한 은사를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도록 하라고 하여 방언과 예언을 대조하여 예언이 방언보다는 더 소중함을 암시하여 신비주의에 빠져있는 방언파를 구제하려는 시도를 보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방언에 대해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 방언의 종류에 대해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방언의 종류를 크게 두 종류로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는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난 다른 나라 사람들이 자기나라 말로 알아들을 수 있는 지방 말 즉 다른 나랏말인 방언과 다른 하나는 고전 14장에서 말하고 있는 세상 나랏말이 아니므로 사람으로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하나님만이 들으시는 영적인 말인 방언으로 구별될 수 있습니다.

 

또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예언의 은사란 미래에 일어날 일을 미리 말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고 잘 풀어 가르치는 말씀의 은사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5절까지에서 많은 은사 중에서 방언의 은사와 예언의 은사를 비교해주고 있습니다. 방언은 하나님께 하는 것이고 예언은 사람에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방언을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에 방언이란 그 방언을 듣는 사람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언은 듣는 사람에게 잘못을 고치게도 하고 격려도 되며 말씀을 통해 큰 유익이 되게 한다고 했습니다. 또 방언이란 방언을 말하는 자신만의 유익을 위한 것이나 예언은 예언을 듣는 교회의 유익을 준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온 교인들이 다 방언을 말하기를 원한다고 전제하고 그러나 방언보다는 예언하기를 바란다고 했으며, 교회에서 통역이 없다면 방언이란 예언만 못하다고 단정하고 있습니다.

 

[2]두 번째로 6절부터 13절까지의 방언과 관련된 문제들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방언의 문제점을 제시하여 줌으로 예언이 방언보다 더 낫다는 결론을 주고자 합니다. 바울은 자기가 고린도 교회에서 개척 전도를 할 때에 말씀을 중심한 예언의 은사를 사용치 않고 방언만 했다면 고린도 교회에 무슨 유익이 있었겠느냐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을 분별할 수 없는 악기에 비유하기도 했으며 분명치 않는 나팔 소리나 뜻이 없는 소리, 또 알아들을 수 없는 말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악기마다 자신의 소리를 구별하는 소리를 내야하고 나팔도 무슨 목적으로 부는 지 분명한 소리를 내 주어야 하며 남에게 말을 한다면 상대방이 알아들을 수 있게 해야 함 같이 교회에서 방언을 하려 한다면 교회에 유익이 되게 하기 위하여 통역이 함께 주어져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를 부정적으로 표현한다면 통역이 없이는 교회에서 방언을 하지 말라는 말이 되겠습니다.

 

[3]세 번째로 14절부터 19절까지의 방언과 바울의 개인적 적용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방언에 대한 바른 이해를 돕고자 자기의 신앙 경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18절에 보면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하므로 바울 자신도 방언에 대해서는 고린도 교인 누구보다 더 깊은 체험을 가지고 있음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방언의 체험을 가진 바울이 말하기를 자기가 방언으로 기도하면 자기의 영만이 기도하고 자기의 마음과는 전연 상관이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들은 신들린 사람을 압니다. 신에 사로 잡혀서 중얼대는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방언도 성령에 온전히 사로 잡혀서 자기 속에 있는 영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즉 자기가 어떤 생각을 해서 그 마음을 하나님께 전달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자기 자신은 전연 모를 기도를 하나님께 하는 것이 바로 방언기도이므로 나의 기도를 듣는 다른 사람은 더욱 알 수 없는 것이 방언 기도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마음과 전연 상관이 없는 방언 기도가 예배라는 개념에서는 반쪽 기도임을 전제하고 하나님께 예배를 위한 기도와 찬송은 영과 함께 마음으로 기도하며 찬미하겠다고 고백을 하게 됩니다. 영과 마음으로 하는 기도와 찬송은 내 마음이 생각하고 이해한 것을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지난번에 한미히 합동 예배를 하였습니다. 스페니쉬를 전연 모르는 우리들로서는 스페니쉬의 기도에 진정한 아멘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도 바울은 교회 내에서 알아듣지 못하는 일만 마디의 말보다 알아듣는 다섯 마디의 말이 더 낫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바울 자신도 남이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곧 잘 할 수 있었으나 교회에서는 교회의 유익을 위해 알아듣는 쉬운 말로 해야 하기 때문에 방언은 개인용이지 교회용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4]네 번째로 20절부터 25절까지의 예언과 방언의 목적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방언의 은사를 받았다고 자신을 자랑하고 남을 무시하는 그런 악에는 어린아이들과 같이 천진하기를 바라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교회에 유익을 주는 일에는 어른들과 같이 되기를 바란다고 전제하고 방언과 예언의 목적을 분명히 가르쳐 주면서

방언의 교만에서 회복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예언은 믿는 자가 듣고 깨닫도록 주어진 것이나 방언이란 불신자들이 오순절에 일어난 이적적인 방언의 역사를 통해 회개하도록 믿지 않은 자들에게 주어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믿는 자들이 모이는 교회에서는 방언이 있어야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교회에서 방언을 한다면 혹 불신자들이 와서 보고 그 방언을 이해하지 못하므로 모두들 미쳤다고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언을 하면 그 교훈과 책망을 이해할 것이기 때문에 듣고 뉘우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오늘 본문을 통해 어떤 교훈을 받았으며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방언의 은사나 다른 신비적인 체험에 대한 열망에서 해방되자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방언의 은사에 도취되어 자신이 무척 신령하다고 믿는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예언과 방언을 비교하면서 아주 쉽게 올바른 깨우침을 주었습니다. 우선 방언에 대한 사도 바울의 교훈을 정리해봅시다. 방언은 자신도 그 뜻을 모르고 듣는 이도 전연 모르는 것이므로 이것을 행함은 사적으로 할 일이지 교회에서는 아무런 유익이 없으며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교회가 비방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혹시 누가 방언을 하려면 통역을 두고 하라는 것입니다. 통역 없이 교회에서 한다면 이는 자신의 믿음을 자랑하기 위한 것이요 교회에 무질서와 갈등을 낳게 하는 것이므로 삼가라는 결론인 것입니다. 요사이 교회 중에 교회에서 방언 기도를 하는 교회들은 이 말씀에 귀를 기우려야 합니다. 또한 우리들도 방언 못하는데서오는 기죽음에서 해방되어야 합니다. 방언의 은사를 받으십시오. 그러나 그보다는 말씀의 은사를 받기를 원한다는 사도 바울의 권면에 귀 기우리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이 왜? 방언에 관심이 많을까요? 신비스런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힘으로 하지 않고 오직 성령에 의해 이뤄지는 일이기 때문에 방언을 하는 자는 누구보다도 더 신령한 자로 부러움을 사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에게 주어지는 모든 은사는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 주어진 것임을 바로 알고 교회에 덕이 되지 못할 신비스런 일은 감출 줄 알아야 합니다. 남이 듣지 못한 소리 또는 꿈을 혼자만 알고 숨겨야 합니다. 성경이 쓰여져서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전달된 이 때에 하나님의 비밀을 어떤 특수한 사람에게만 전달하고 감추실 편벽된 하나님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혹시 누가 신령하다고 자기에게 무엇을 보여 주셨다 거나 자기 귀에 무엇을 들려주셨다고 하면 신령하다고 그를 따를 것이 아니라 거짓 선지자가 나타났다고 그를 피해야 건전한 신앙을 가진 자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 성도들은 신령한 자와 거짓 선지자를 구별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누가 신령한 자입니까? 성경에 없는 신비스런 것을 말하는 자가 신령한 자가 아닙니다. 예언자가 신령한 자인 것입니다. 누가 예언자인가요? 성경에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여 그대로 실천하고 그 말씀을 남들에게 그대로 전하는 자가 예언자요 신령한 자이며, 반대로 거짓 선지자란 남들이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것을 자신에게 알려주었다고 자신을 자랑하며 성경에 없는 신비스런 이야기로 성도들의 귀와 눈을 홀리는 자인 것입니다.

 

우리 교회 모든 성도들이 진정한 예언자들이 더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