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 – 고린도후서 5:1-10

1997년의 헌옷을 벗고 1998년 새 옷을 입혀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감사를 드린다고 하는 것은 육의 몸을 입고 있는 우리 모든 인간들은 과거를 돌아볼 때에 아무래도 후훼스러운 것들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과거는 잊고 앞만 내다보며 새롭게 도전할 기회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더 좁혀서 말을 한다면 바로 어제의 일은 잊어버리고 싶고 오늘부터 다시 새롭게 도전해야하는 심히 약한 인생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저 개인도 새해를 맞아 새롭게 도전할 기회가 있음을 생각하고 힘을 얻게 됩니다.

 

지난해 동안에 하나님께서 부르시어 세상을 떠난 자들이 많이 있겠지만 우리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새롭게 도전할 수 있는 1998년 한해를 주셨습니다. 1998년은 바로 우리들 각자의 해입니다. 어떻게 한해를 운영하든지 우리 각자에게 운영할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금년에 꼭 이루고자하는 목표가 있으시리라 믿습니다. 그 목표를 두고 우리들 자신이 최선을 다하고 또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모두 이룩해내는 좋은 한해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주신 본문에서는 새해를 맞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도록 목표를 설정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인생 목표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인생이어야 할 뿐 아니라 1998년 한해가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삶이 되어야함을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운동 경기가 끝이 나면 승리자에게 상을 주는 것 같이 우리들도 우리들이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 심판이 있고 그 판정에 따라 상을 받게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을 소개받는 우리 모두의 삶이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삶이 되시어 큰상을 받으시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오늘 주신 본문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본문의 뜻을 이해하고 본문이 주는 교훈을 찾으며 그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 생활에서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는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장막집과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1) [2]영원한 집에 대한 소망(2-8) [3]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의 이유(9-10)입니다.

 

[1]맨 먼저 1절부터 4절에 있는 장막집과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인간이 죽게되면 영원한 하늘나라가 예비되어 있다는 그의 확신을 1절에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죽는 다는 말을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진다’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장막 즉 천막은 임시의 거처로 사용된다는 의미에서 우리의 인생은 유한한 인생, 언젠가는 무너질 수밖에 없는 인생임을 암시하여 땅에 있는 장막집이라 한 것인 줄 압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장막집의 삶이 너무 어려운 삶이었습니다. 너무 비바람이 몰아쳐서 천막이 낡아지고 헤어지고 곧 쓰러질 듯한 장막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믿기는 땅에 있는 이 장막집이 심한 핍박과 고난으로 완전히 무너져도 실망하지 않는 것은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8절에서 차라리 땅에 있는 장막집이 빨리 무너지는 것을 바란다고 까지 고백하고 있으니 세상에 있는 장막집의 가치와 영원한 집에 대한 가치를 믿음으로 환히 보고 있기 때문인 줄 압니다. 지난주에서는 속 사람과 겉 사람, 또 질그릇과 보배의 대조로 우리를 깨우쳐주었는데 오늘은 장막과 집의 대조로 우리들을 깨우쳐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땅에 있는 장막집에 무너지면 영원한 하늘 나라의 집이 예비되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두 번째로 2절로 8절까지의 영원한 집에 대한 소망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겠습니다. 2절부터 8절까지는 사도 바울이 영원한 집에 거하고자 하는 그의 열망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1절에서는 우리의 몸 즉 육체를 집에 비유하여 장막 또는 집이라 표현했는데 2절부터 8절까지에는 우리의 육체나 하나님의 나라를 옷에 비유하여 ‘입는다’ ‘벗는다’는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장막에서 벗어나서 하늘로부터 오는 집에서 살기를 원한다는 표현을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로 덧입기를 사모한다’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모든 사람들이 죽으면 영은 육을 벗어나서 주님의 재림시까지 어디에 대기하고 있다가 주님 재림시에 부활하게 되는데 사도 바울은 육을 벗어나서 대기 상태에 있는 영을 ‘벌거벗은 영’이라 표현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직 그 영이 하나님의 나라의 처소로 옷 입혀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하늘로부터 온 처소를 덧입기를 바라는 것은 벌거벗은 상태로 남아있지 않기 위서라 했습니다. 에녹이나 엘리야같이 죽음을 맛보지 않고 승천하므로 벌거벗고 있는 상태가 없기를 소원했던 것으로 풀이됩니다. 이 논리에 따르자면 현재의 사도 바울의 영은 입은 상태입니까? 벌거벗은 상태입니까? 예 그의 영은 벌거벗은 상태에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는 4절에서 육체의 장막에서 사는 동안에 당한 모든 수난과 육의 불완전 때문에 오는 많은 고통 때문에 육을 벗어버리고 싶다는 표현을 하지만 그가 열망하는 것은 육을 벗고자하는데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나라의 옷 즉 생명의 옷을 입고자 함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는 언젠가는 생명이 사망을 온전히 삼켜버리므로 그가 영생하게 될 것이라는 이 사실을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보증해주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6절과 7절에서 그의 믿음의 깊은 통찰력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믿음의 눈으로 멀리 내다보니 사람이 장막에 갇혀 있을 때에는 비록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계시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은 사실이나 아무래도 육을 입고 있으므로 육의 제약 때문에 온전히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이 못되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감으로 온전히 하나님과 함께 살 수 있을 것이므로 ‘자기가 담대하게 바라는 것은 차라리 육을 떠나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3]세 번째로 9절로 10절까지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의 이유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나 죽으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를 발견한 것입니다. ‘사나 죽으나’를 ‘거하든지 떠나든지’라고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그 이유를 뭐라고 했나요? 10절에서 사도 바울과 모든 성도들이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서 각자가 몸 안에 있을 때에 행한 대로 보상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기 위해서 선수들이 어떻게 합니까? 한마디로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경주 결과에 따라 1등에게는 금메달, 2등에게는 은메달 3등에게는 은메달을 주듯 여기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심판이란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그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느냐에 따라 행한 대로 상을 주실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수들이 힘이 들어도 고생스러워도 참고 꾸준히 연습하는 것은 주어질 상을 소망하기 때문임같이 사도 바울도 쉬고 싶지만 하나님이 주실 보다 더 큰상을 받기 위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쓴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심판 때에 우리들에게 상을 주신다면 왜? 주시겠어요? 모든 어려움을 물리치고 끝까지 성도가 뛰어야할 마라톤을 다 경주했기 때문이요, 또 남보다 더 열심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일을 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교회 못 온 것에도 핑계가 있고 성경 못 읽는 것에도 우리들은 핑계를 데지만 핑계댈 일이 얼마든지 있었지만 무엇을 해냈던 자들에게 상을 주시는 것이 아니겠어요. 심판의 날에 하나님 앞에서 남보다 더 큰상받기를 원하시면 남보다 더 열심히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일뿐입니다. 분명히 10절 마지막에 기록된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는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의로운 행위가 없어도 주어지지만 상급은 우리의 행위에 따라 주어짐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주신 본문을 통해 어떤 교훈을 받았으며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주신 교훈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라고 했습니까?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큰상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자들에게 큰상을 주실 것인지 우리 성도들은 다 알고 있을 것입니다. 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알면서도 자꾸 안하는 것뿐입니다. 98년도에는 다 알고 있는 일을 다 실천하는 해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들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영원한 집이 하늘나라에 있기 때문에 그곳에 소망을 두는 자들이라면 새롭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삶을 살아서 큰상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이 상을 주는 하나님의 입장이라면 누구에게 상을 주시겠어요? 주일 예배에 빠지는 날이 더 많은 사람하고 예배에 참석한 날이 더 많은 사람하고 둘 중에서 누구에게 더 큰상을 주시겠습니까? 수요일에는 빠지고 주일에만 참석하는 사람과 주일과 수요일 다 참석하는 교인 줄 중에서 누구에게 더 큰상을 주어야 공정한 시상이 되겠습니까?

 

성경을 매일 읽는 사람과 매달 한번씩 읽는 사람, 또 성경을 아끼느라고 아예 잘 보관하고 있는 사람 중에서 누구에게 더 큰상을 주어야 공평하겠습니까? 기도를 전연 하지 않는 사람하고 무시로 기도하고 있는 사람 둘 중 누가 더 큰상을 받아야 합니까? 자기가 벌어드린 물질의 최소한 10의 1을 하나님의 것으로 알고 하나님께 바치는 사람하고 생활하다보니 다 필요해서 다 써버리고 바칠 것이 전연 없는 사람, 또 쓰고 남을 때에 남은 것 조금 바친 사람이 있다면 누에게 대상을 주어야 하겠습니까? 교회 일에 열심히 헌신하는 사람과 바쁜 이민 생활 핑계로 헌신은 전연 할 수 없는 사람 둘 중 누구에게 더 큰상을 주어야 하겠느냐는 질문입니다.

 

직분이나 명예나 사람들이 자기를 어떻게 대접하든지 상관없이 진리를 사랑해서 교회를 찾은 사람하고 직분 주는 교회를 찾아가거나, 자기 목소리를 높여서 자기를 과시할 수 있는 교회를 찾은 사람 둘 중 누가 상을 받겠습니까? 성경에서 진리를 가르쳐주어도 진리보다는 교파의 전통을 더 좋아하는 사람과 성경의 진리라면 교파의 전통을 버리는 사람 둘 중 누구에게 상을 주어야 합니까?

 

자기가 잘났다고 거만하고 남을 시기하고 비판하며 나쁜 소문이나 퍼트리고 교회를 시끄럽게 하는 교인과 겸손하여 남을 나보다 더 낫게 여기며, 남의 잘되는 것을 축하하고 남의 잘못을 감싸주며 시끄러운 교회가 화평하도록 희생하는 교인 둘 중 누구에게 더 큰상을 주시겠습니까? 성도들이 모인 교회 내에 별스런 사람들이 다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드리는 질문입니다. 다행히 우리 교회는 개인적으로는 다 잘나셨지만 그 누구도 잘났다고 남을 깔보거나 헐뜯고 문제를 일으키는 교인이 한 분도 계시지 않고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정말 평온한 교회인 것을 전도자로서는 하나님께와 여러분들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소망은 장막집에 영영히 사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소망이 하늘나라에 있을 뿐 아니라 또한 우리들이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심판시에 남보다 더 큰상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잘해오셨지만 새해에는 더욱 새롭게 도전해야 하겠습니다. 전도자의 소망은 전도자나 온 교인들이 다 큰 상을 받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전해들은 모든 성도들이 주님 오실 때에 다 큰상을 받기 위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