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첫 주에 주신 메시지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었는데 두 번째 주에 주신 제목은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함께 따라서 하시기 바랍니다. ‘새로운 피조물’ 하나님께서 금년 1998년도에 우리들에게 바라시는 삶은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된 삶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주신 본문을 통해 자신이 온전히 새로운 피조물이 됨같이 역시 고린도 교회 성도들도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지기를 소망하며 이 편지를 고린도 교회에 보낸 것입니다. 여기에 앉아 계신 우리 모두는 새해를 맞아 우리의 믿음에 발전적인 변화가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으시리라 믿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을 통해 우리 모두의 믿음에 큰 변화가 있어서 온전히 새로운 피조물들이 다 되어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주신 본문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본문의 뜻을 이해하고 본문에서 주는 교훈을 찾고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 생활에서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는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주의 두려움을 아는 삶(11-13) [2]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자를 위한 삶(14-17) [3]하나님과 화목 하는 삶(18-21)입니다.
[1]맨 먼저 11절부터 13절까지의 주의 두려움을 아는 삶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거짓 선지자들과 사도 바울 자신을 비교할 때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확인 시켜주어 거짓 선지자들을 대항할 수 있는 충분한 지식을 넣어주므로 한편으로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사도 바울 자신에 대해 하나님의 진실 된 일꾼임을 신뢰하도록 하고 반면에 거짓 선지자들은 경계하도록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어지럽힌 거짓 선지자들이 고린도 교회에 퍼트린 말들을 염두에 두고 그 거짓 선지자들과 구별된 자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11절에 보니 자신은 ‘주의 두려움을 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알아야할 것은 보통 주님이라고 하면 예수님을 생각하게 되는데 본래의 주는 온 우주 만물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들 되는 예수님을 우리의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주의 두려움’이란 하나님의 두려움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주의 두려움을 안다는 말은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안다는 뜻으로 모든 일의 끝에는 선악간에 심판하실 공의의 심판자 하나님이심을 안다는 뜻일 것이고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한 전지 전능하신 창조자 하나님으로 안다는 뜻일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 교회를 위해 일할 때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얼마나 진실 되게 일을 했는지 하나님께서 인정하실 수 있을 것이며 또한 고린도 교인들의 양심이 충분히 인정할 수 있게 일을 했다고 자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소개하는 것도 자신을 자랑하기 위함보다는 고린도 교인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대항하여 말할 수 있도록 지식을 넣어주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거짓 선지자는 마음으로 하지 않고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외모로 했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추천서나 자격증을 가지고 있다느니, 어디 출신이라느니 하는 자기 신분 자랑을 일삼고 그에 따른 대우를 받기를 바라는 예수를 팔아먹고 사는 무리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한 마디로 하나님의 두려움을 모르고 사는 지도자들을 두고 하는 말이 되겠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사도 바울도 예수 믿는 자들을 옥에 잡아 가두므로 예수님을 핍박한 때가 있었으나 예수님을 영접하고부터는 하나님을 바로 알고 하나님만을 위한 삶으로 변화된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세상적인 자랑을 다 버리고 세상적인 보수를 다 버리고 주님 재림시에 받을 영광과 상만을 바라고 예수에 미친 사람의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런 사도 바울을 보고 옛날의 바울을 안 사람들이 바울이 미쳤어도 많이 미쳤다고 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13절에 자신이 미쳤다고 해도 하나님을 위해 미친 것이고 혹시 정신이 온전하다고 해도 오직 고린도 교인들을 위해 온전한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두려움을 아는 복음 전도자로서의 자신의 진실성과 하나님의 두려움을 모르는 거짓 선지자들의 위선을 강조하는 말이 되겠습니다.
[2]두 번째로는 14절로 17절까지의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자를 위한 삶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길을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분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측면에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으므로 결과적으로 모든 사람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또 한 분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신 것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자신을 위해 살지 아니하고 자신을 위해 대신 죽으시고 살아나신 분을 위해 살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죽어야 할 사형수들인데 우리 대신 누가 대신 죽어주었다면 목숨을 건진 우리들은 마땅히 우리를 위해 대신 죽어준 사람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쉬운 이치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지 아니한 사람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사실을 모르고 또 주님 재림시에 다시 살아날 사실을 믿지 않기 때문에 자기의 인생을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겠지만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은 우리의 죗값으로 우리 대신 주님께서 죽으셨음으로 이제부터는 나는 없는 것으로 하고 내 대신 죽으신 분을 위해 나머지 생애를 살아야 마땅한 도리가 아니겠느냐는 말인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나는 없고 그리스도만 계시므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죽은 몸은 내 죄 때문에 죽지만 새로 태어날 때에는 하나님의 은혜로 태어나기 때문에 새로 태어난 몸은 하나님의 몫이라는 윈리인 것입니다. 이런 윈리를 이해 못한다면 우리의 인생을 우리 자신만의 유익을 위해 살겠지만 주님께서 대신 죽으신 이치를 깨닫는 자라면 내 인생을 나를 위해 죽어주신 분을 위해 살아야 마땅함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란 우리가 사나 죽으나, 먹으나 굶으나 하나님을 위한 삶을 사는 길임을 분명하게 소개해주고 있습니다.
[3]세 번째로 18절부터 21절까지의 하나님과 화목 하는 삶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영접하기전의 삶을 보자면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으므로 예수 믿는 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의 원수였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원수였다면 그리스도인들의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원수라 할 수 있을 것이며 그리스도의 원수라면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원수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므로 그의 죄가 용서되어 원수의 자리에서 사면된 사실을 두고 하나님과 화목 되었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원수된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예수를 영접하게 하여 그들도 자기들의 모든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므로 사도 바울은 화목케 하는 직분을 맡았다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 스스로의 힘으로는 하나님과 화목 될 수 없음을 아시고 죄 없는 예수 그리스도를 화목케 하는 중보자로 세우시어 죄 없으신 예수를 모든 인류의 죄를 뒤집어 씌우시어 죄수가 되게 하시고 죗값으로 죽게 하신 것입니다. 구약시대에 양을 잡아 번제를 드리므로 사람들의 죄가 일시적으로 용서된 원리에 따라 어린양의 모형 되신 예수의 죽으심으로 만 인류가 죄에서 벗어나 하나님과 영원히 화목하게 되었다는 진리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류를 주 예수를 통해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을 뿐 아니라 원수된 사람들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만들어주는 직분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우리들은 누구나 복음 전도의 책임을 가지고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맡기신 이 전도의 사명을 다른 말로 표현하여 하나님과 화목케 하는 직분을 주셨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간절하게 권하기를 하나님과 화목 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무슨 뜻일까요? 죄악의 자리에서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모든 범죄는 하나님과 원수 되는 사단의 계략에서 오는 것이므로 결과적으로 모든 범죄는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과 늘 화목 하는 길은 적고 큰 죄악에서 벗어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도 죄악에서 벗어나 하나님과 화목 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며 또한 내 이웃도 하나님과 화목된 삶을 살도록 주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여 예수를 영접하게 하므로 이 전의 자기가 아닌 온전히 새로운 피조물이 되기를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새해를 맞았습니다. 우리 모두가 새해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새사람들이 되기를 소원하고 있을 줄 압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새 사람이 되는 어떤 길을 소개받았습니까? 우리들이 어떤 삶을 살므로 새로은 피조물이 된다고 했습니까?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은 마땅히 우리들이 두려워해야 하는 자로 아는 삶이 새로운 삶이라고 소개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삶이란 무슨 일이나 하나님을 중심해서 사는 삶을 말하며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께서 내려다보시고 계심을 믿고 사는 삶입니다. 사업을 해도 직장 생활을 해도 하나님을 맨 우선 순위에 두는 습관에 따라 사는 삶을 말합니다. 시간을 보내든 돈을 쓰든 무엇을 하든 하나님을 머리에 두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방향에서 사는 삶을 말하는 것이며 내가 원하는 대로 살지 아니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사는 삶인 것입니다. 죄라고 생각되면 죄를 피할 뿐 아니라 지은 죄를 언제나 회개하므로 죄의 용서를 받아 하나님과 늘 화목된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기 생활이 정말 가치 있고 귀하게 생각되면 이 귀한 삶을 남에게 소개하는 삶을 사는 것을 새사람의 삶이라고 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를 받아드리고 산 삶이 두려운 하나님을 아는 삶이었고, 또 그의 삶이 자기를 대신하여 죽으신 자를 위해 살았던 삶이었으며, 또한 그의 삶은 하나님과 화목된 삶이었을 뿐 아니라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화목 되도록 만드는 직책을 감당한 삶이었다고 확신이 된다면 우리 모두도 사도 바울의 삶을 본받아 그런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달리 표현한다면 내 이웃들로부터 저 사람은 하나님을 위해 미친 사람이라고 하거나 저 사람은 항상 하나님밖에 모르는 사람이라는 말을 듣는 삶을 말합니다. 새로운 피조물이란 옛날의 내 모습은 보이지 않고 온전히 변화된 생각과 변화된 행동을 말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자 내 딛는 첫 걸음부터 시작됩니다. 어떤 새 걸음을 걷기 시작했습니까? 어떤 새 걸음을 걸으려고 계획하십니까? 새해인 이 때는 새로운 발걸음을 딛기 시작하기에 아주 좋은 절기입니다. 우리 모두가 내가 지금 사는 삶이 우리의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한 자이신 하나님을 아는 삶인지, 또 지금 하는 행동이 나를 위해 죽으신 분을 위해 사는 삶인지, 지금 나의 행동은 하나님과 화목된 삶인지, 화목케 하는 직책을 감당하는 삶인지 늘 반성하면서 하루하루를 한달 한 달을 사시어 금년 한해 동안에 하나님을 향해 완전히 변화된 새로운 피조물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