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자랑 – 고린도후서 11:16-33

방금 봉독한 말씀은 사도 바울의 자기 자랑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랑하지 말 것을 권면했는데 자기의 권면에 반대되는 자기 자랑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고린도 교회에 들어온 거짓 선지자들이 말도 안된 말로 사도 바울을 비난하고 고린도 교인들이 거짓 선지자인 자신들을 따르도록 했기 때문에 그런 어리석은 자들의 말마다 하나하나 대꾸할 필요도 없었던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하는 말마다 참견하다가는 똑같은 수준의 사람이 되고 말 것이므로 대꾸를 하지 않았고 그들이 하는대로 자기 자랑을 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입을 다물고 있으니 입이 없어서 말을 못하는 줄 알고 계속 거짓말로 고린도 교인들을 속여서 구원의 길에서 완전히 이탈되게 생겼으므로 거짓 선지자들이 더 이상 거짓 말을 못하게 할뿐 아니라 반면에 고린도 교인들을 거짓 선지자의 울타리에서 구해내기 위하여 자기 자랑의 포문을 열게된 것입니다.

 

오늘 주신 본문은 진리와 비 진리, 참 지도자와 거짓 지도자를 잘 구별해주는 좋은 지침서가 될 수 있겠습니다. 오늘 본문이 주는 교훈을 통해 우리들의 믿음의 목표가 더욱 선명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오늘 주신 본문을 네 부분으로 나누어 본문의 뜻을 이해하고 본문이 주는 교훈을 찾고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는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바울의 자랑의 수준(16-18) [2]고린도 교회 교인들의 바보짓(19-21) [3]바울의 육적 자랑(22) [4]바울의 고난의 자랑(23-33)입니다.

 

[1]맨 먼저 16절부터 18절까지의 바울의 자랑의 수준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자랑을 하게 되면 어리석은 자로 볼 것이지만 어리석게 보이더라도 자랑을 해야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거짓 선지자들이 자기들이 잘 낫다고 세상 적인 자랑을 지나치게 하므로 자랑에 약한 고린도 교인들을 그들로부터 구해내기 위해 자랑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다만 이런 자랑은 예수님의 방법이나 예수님의 수준이 아니고 어리석은 자들의 수준에 따라 자랑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수준에 맞게 자랑을 해야 그들이 이해할 것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자랑의 동기가 자신을 높이기 위함이 아니라 어리석은 자들의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고 반면에 고린도 교인들을 어리석은 자들의 꼬임에서 구출하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다만 거짓 선지자들이나 고린도 교인들이 너무 수준이 낮아 그들의 수준에 맞추어 자랑을 하게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2]두 번째로 19절로 21절까지의 고린도 교회 교인들의 바보짓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옛 날 전도관에서 천년성을 만들어 놓고 그 속에 들어가 살면 죽지도 않고 산다고 하여 재산을 정리하고 들어간 사람들이 있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또 수년 전에 수원에서 오대양 사건인지 집단 자살한 사건이 있으며 최근 센디에고에서도 사이비 종교의 집단 자살 사건이 있었습니다. 재산, 인권 등이 완전히 빼았기면서도 어떤 사이비 집단의 속임수에 넘어가 그런 생활을 계속한 것을 보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거짓 선지자에 넘어가 바보짓을 하고 있는 것을 꼬집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어떤 바보짓을 했는지 바울의 이야기를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스스로 믿기를 지혜로운 자라 하면서도 어리석은 자들의 거짓말 속임수에 잘도 넘어가 속임수를 베풀고 있는 자들을 기쁘게 만들고 있다고 꼬집고 있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이 거짓 교리를 가지고 와서 거짓 진리에 종노릇을 하게 해도 거짓 진리의 종이 되고, 또 교인들의 가진 것을 빼앗아가도 다 뺐기고, 죽여도 죽임을 당하고 있다고 했으며 뺨을 때려도 뺨을 맞으면서도 거짓 선지자들을 따르고 있다고 꼬집고 있습니다. 뺨을 맞는다는 말은 수치와 모욕을 당하면서도 그 속에서 나오지 못한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교회에서 비 진리로 속임을 당해보았습니까? 돈을 빼앗겨 보았습니까? 인격이 짓밟혀보았습니까? 아니면 창피를 당해보았습니까?

 

매를 때리고 학대하는 남편에게 매력을 느끼는 병든 여자가 있는 있음같이 종교에서도 물질과 육체와 명예를 빼앗겨야 더 매력적인 종교로 느껴지는 병이 보통 사람들에게 있는 모양입니다. 자신을 희생하면서 복음을 전한 사도 바울은 가짜이니 그렇게 희생을 하는 것이고 진짜라면 돈도 빼앗고 뺨도 때리고 죽이기도 하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판단을 내린다면 병든 것이 틀림없겠지요. 자랑을 않고 조용히 있으니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어서 자랑을 못하는 사람으로 아는 그런 사람들의 수준이니 그 런 수준의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수준으로 사도 바울이 자기 자랑을 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3]세 번째로 바울의 육적 자랑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이 육적인 자랑을 가지고 고린도 교인들을 잡아먹고 있으므로 사도 바울이 육적 자랑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제시한 육적 자랑은, 자신은 히브리인이요,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라고 자신의 족보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인이란 유대인으로서의 순수한 혈통의 가정에서 태어났다는 말일 것이고 이스라엘인이란 종교적으로 선민이라는 의미일 것이며 아브라함의 씨란 약속을 받은 백성이라는 말일 것입니다. 어떤 모양으로든지 거짓 선지자들이 자랑한 육적 족보 자랑에 사도 바울도 더했으면 더했지 모자랄 것이 없다고 자랑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자랑을 하고 있는 사도 바울의 마음을 이해하실 수 있어야 합니다. 자랑을 해야만 알아보는 수준의 교인들을 가르쳐보려고 애쓰는 안타까운 모습이기도 합니다.

 

[4]마지막으로 23절부터 33절까지의 바울의 고난의 자랑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랑은 주안에서 자랑하라고 했는데 주안에서의 자랑이란 주님께서 칭찬하실만한 자랑, 또는 주님을 자랑하는 자랑을 뜻하는 것인데 이제 사도 바울은 주의 종으로서 주님께서 맡기신 복음 전도의 임무를 수행하면서 당한 모든 고난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에베소에서 행했던 희한한 능력을 자랑 할만도 한데 그런 것은 덮어두고 자기의 약한 점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강한 자이시나 십자가를 지심 같은 그런 차원의 약한 것을 소개하므로 사도 바울 자신은 주님의 종이요 주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는 것이 자신의 길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주의 종의 능력이란 큰 교회 맡고, 얼마나 많은 대우를 받고 편하게 생활하고 있느냐가 아니라 주를 위해 얼마나 수고와 고난을 받고 있는가 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받은 고난을 교회 밖의 고난과 교회내의 고난으로 분류하여 소개하고 있습니다. 즉 전도하기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받은 핍박과 교회 내에서 일어나는 문제로 인한 고통을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 밖에서의 고난으로는 전도를 위해 어떤 사도보다도 더 많은 고난을 겪었다고 비교급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도 더 많이 갇히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했다고 했습니다.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고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 당했으며, 여러 번 여행에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을 당했다고 했습니다. 또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 전도를 위해서 교회 밖으로부터 당한 고난만도 힘겨운데 거기에다가 현재 고린도 교회 문제 같은 교회 내의 문제로 또한 고난을 받았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교회내의 문제라면, 날마다 자기 속에 눌리는 것이 있다고 하면서 그 것은 바로 모든 교회들을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왜? 염려를 해야 할까요? 거짓 복음에 속아넘어가서 마귀의 밥이 될까해서 인 것입니다. 또 교인들이 근심할 때에 같이 근심해주고, 교인들이 넘어지면 또한 애가 탔다고 했습니다. 이와 같은 모든 교회를 위해 끊임없는 자신의 근심을 하나님께서 아실 것이라고 자신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자랑으로 다메섹에서 자기가 광주리를 타고 성에서 빠져 나와 도망을 쳤던 수치스런 기억을 자랑하고 있으면서 자기는 자기의 약점만을 자랑한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약할 때에 바로 강하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자기가 강한 자가 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오늘 주신 본문을 통해 어떤 교훈을 받았으며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 생활에서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진리에 대해 남에게 속지 말고 자신을 속이지 말라는 교훈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 교회에 전한 순수한 진리를 버리고 가짜 진리를 받아드린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 뭐라고 책망했나요? 잡아먹거나 사로잡거나 종으로 삼거나 뺨을 칠지라도 잘 용납하는구나 라고 했습니다. 진짜 복음을 버리고 가짜 복음을 택한 어리석은 고린도 교인들은 그런 책망을 받아도 싸다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현대의 신앙인들인 우리들도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어찌 보면 현대의 신앙인들도 사도 바울의 책망을 들을 만한 무리들이 많이 있다고 보아집니다. 욕지거리를 하거나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누릴 참된 진리의 자유를 빼았고 자기들이 만든 교리로 꽁꽁 묶는 교회에는 더 몰리고 또 그런 교회에는 자기 재산을 다 바치고라도 붙어 있을려고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교회는 진리인줄 알면서도 몸담고 싶지 않은 것이 현실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말씀대로 하는 교회라면 우선 세상 재미가 없어서 그럴 것이라 생각됩니다. 사람들은 교회도 세상스러운 교회, 현 시대에 맞게 개화된 교회를 좋아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세상에서 다 집사요 권사, 장로라는데 그런 직분을 하나 받으려면 비 성서적인 교회를 가야 줄 것이므로 그런 교회에 몰릴 것이고, 헌금을 많이 하면 대우받는 교회에 갈 것이며, 교인 수가 많고 프로그램이 많으면 아무래도 자기에게 도움이 될 것 같게 생각이 들고, 무엇이든 적당히 하는 교회라면 자신도 적당히 신앙 생활 할 수 있을 것이므로 성경 따지지 않고 적당히 맞추는 교회가 좋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또 많은 사람들이 교회 다니는 첫째 목적이 무엇이겠어요? 사업도 잘 안되고 하는 일들이 잘 안되거나, 또 어떤 병으로 육체적 건강 때문에 그런 세상적인 복을 얻기 위해서 교회에 나오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교회에서 그런 복을 강조하는 교회라면 역시 사람들이 몰려들기 마련 아니겠어요? 고린도 교인들이 사도 바울의 길보다는 거짓 선지자의 길이 더 좋아 보여 거짓을 따른 것이나 같을 것입니다. 예수 믿고 잘사는 길이어야지, 예수 믿고 십자가를 지는 길이라면, 바울과 같은 많은 고난을 받는 길이라면 누가 따라가려고 하겠습니까? 고난의 길은 예수의 참 제자만이 가는 길이지 예수 믿는 사람 같은 사람이 가는 일은 아닙니다. 그런 사람은 가고싶지도 않을 뿐 아니라 갈 수도 없 것입니다.

 

교회로서는 그런 적당 주의 교인들이 필요하고, 또 그런 교인들은 그런 적당 주의 교회가 있어야 하므로 서로 상부 상조하며 공존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 것도 얻고 영적인 것도 얻는 곳이 교회입니까? 교회는 그런 곳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분명히 세상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세상과 영을 동시에 팔거나, 복음과 다른 복음을 동시에 파는 곳은 순수한 교회가 아님이 틀림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오직 십자가 길, 고난의 길, 생명의 길, 하나님이 원하시는 순종의 길을 가시면서 나를 따라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사도 바울이 오직 한 길을 가면서 많은 고난을 받았기에 그가 받을 상이 큰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도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넓은 길을 따라가지 말고 예수님의 제자로서 오직 복음의 길인 좁은 길만을 따라가므로 사도 바울의 자랑과 같은 것이 우리들의 자랑이 될 수 있는 수준의 신앙의 수준으로 높여 하나님께서 주시려고 예비하신 큰상을 받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