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다른 복음 – 갈라디아서 1:1-10

오늘부터 갈라디아서 강해가 시작됩니다. 갈라디아서는 모두 6장으로 된 작은 책이기도 합니다. 6장중 1장부터 4장은 교리적인 교훈이요 5장과 6장은 실천적인 교훈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갈라디아서는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지역에 있는 교회들에 보낸 편지인데 갈라디아 교회들이란 사도 바울이 복음 전도를 위해 3차에 걸친 순회 여행을 했는데 그 중 제 1차 전도 여행 때에 전도했던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더베, 루스드라 지역에 세워진 교회들로 보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지역에 있는 교회들에게 이 편지를 쓴 목적은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지역에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를 세운 후에 유대 주의자들이 갈라디아 지역의 교회들에 들어와서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이 아닌 다른 복음을 전파하므로 갈라디아 지역 교회들은 영적 위기에 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 될 수 있다는 복음을 전했으나 유대주의자들은 구원받기 위해서는 선한 행위 곧 율법도 지켜야 한다고 도전해온 것입니다. 위기에 처한 교회들을 거짓 교리로부터 보호하고 성도들을 바로 가르치기 위해 갈라디아서를 보내게 된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갈라디아서는 율법과 복음에 대해 기록된 교리적인 문서로 로마서와 유사성이 있는 서신입니다. 오래 전부터 사람들은 이 갈라디아서를 ‘기독교 자유의 대 헌장’이라고 일컬어 왔습니다. 율법의 속박에서 온전히 자유를 선포하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들은 다른 서신들과 별다른 차이를 느끼지 못할지 모르지만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이 책에 별명을 부치되 자기 아내의 이름인 ‘캐터린 폰 보라‘를 붙이면서 “나는 이 책과 결혼했다’고 말을 했다고 합니다. 마르틴 루터가 종교 개혁을 하게된 영적 각성이 바로 이 서신을 연구함으로써 일깨워 진 것입니다. 또한 죤 웨슬레도 갈라디아서의 한 설교를 듣고 그가 그토록 오랫동안 갈급했던 마음의 평화를 얻게 되었다고 합니다.

 

마르틴 루터에게 영적 각성을 가져다주고 존 웨슬레에게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주었던 이 갈라디아서가 우리 성도들에게도 영적 각성과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주는 강력한 멧시지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주신 본문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1]인사(1-5) [2]오직 하나밖에 없는 복음(6-10)입니다.

 

[1]먼저 1절부터 5절까지의 머리말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1절부터 5절까지의 머리말에는 1절에서 사도 바울 자신이 어떻게 사도가 되었는지 자기 소개를 했고 2절에서는 이 편지를 보낸 자와 받는 자들을 소개했으며, 3절에서는 은혜와 평강을 기원한 것이 들어 있고 4절과 5절에서는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1절에서 자신을 소개하기를 사람들에게서 난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사도 된 것은 어떤 인간 집단에서 임명을 받은 것도 아니요, 인간적인 어떤 방법과 수단으로 사도가 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편지 첫 머리에 이런 점을 강조한 배경이 있습니다. 사도라고 하면 12제자와 같이 예수님에 의해 선택되고 직접 가르침을 받고 주님의 부활을 목격한 제자들을 두고 말하는 것인데 사도 바울은 그런 종류의 제자가 아니므로 유대주의자들이 사도 바을은 가짜 사도라고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퍼트렸으므로 이를 방어하기 위해 자기의 사도됨을 변호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다른 사도들과 같은 경위를 통해 사도가 된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사도 바울을 강권으로 다메섹 도상에서 사로잡으시어 예수님의 제자를 삼으셨으므로 사도 바울로서는 주님으로부터 택함을 받았고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고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체험이 있으므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사도가 되었다고 사도됨의 기원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2절은 편지를 보낸 자와 받는 자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쓴 다른 편지를 보면 편지를 보낸 자의 부분에 사도 바울과 함께 있는 사람의 이름을 직접 거명하는데 이 갈라디아서에서는 이름을 직접 밝히지 않고 함께 있는 모든 형제들이라고 만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받는 자는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라 했습니다.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이란 사도행전 13장과 14장에 기록된 사도 바울의 제 1차 전도 여행시에 전도하였던 비시디아 안디옥, 루스드라, 이고니온, 더베 지역에 세워진 교회들로 보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3절에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을 체험하기를 바란다는 기원을 합니다. 죄 값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었던 갈라디아 지역 교인들에게 구원을 허락하신 그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고 마음에 평안의 체험을 하기를 바란다는 기원인 것입니다. 그리고 4절 5절에서 갈라디아 지역 교인들을 악한 세대에서 건져내시고 죄 사함을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이 세세토록 있기를 바란다는 찬양을 하고 있습니다.

 

[2]두 번째로 오직 하나밖에 없는 복음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이 보낸 편지들을 보면 인사말 뒤에 무엇 무엇을 감사한다는 칭찬이 따르는데 본 서신은 칭찬이 없고 바로 무엇 무엇을 이상히 여긴다는 책망으로 이어짐을 보게 됩니다. 거짓 교리에 넘어간 교인들을 빨리 바로 잡아야 하는 긴박감 때문이었으리라 봅니다. 6절에서 책망을 하고 있으며 7절에서는 다른 복음이란 없다고 했고 8절과 9절에서는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선포했으며 10절에서 그리스도의 종의 자세에 대해 쓰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6절에서 유대주의자들의 거짓 교리에 넘어간 자들을 책망하기를 그리스도의 은혜로 부르신 이를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좇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나 자신의 행위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존재들임을 아신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구원받도록 복음을 주셨음에도 다시 율법을 지키는 행위로 구원될 수 있다는 잘못된 교리에 속아넘어간 갈라디아 지역 여러 교회 성도들이 그렇게 쉽게 넘어간 것을 이상히 여긴다고 책망을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다른 복음은 없다고 잘라서 말을 했으며 유대주의자들이 전파한 다른 복음이란 믿음에 혼동을 주고 교회를 소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조하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른 복음이란 성경에 있는 것을 빼내고 성경에 없는 것을 더하는 행위를 말하는 것인데 이런 행위들은 교회를 소란케 하는 행위요 복음을 변경시키는 행위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단정적으로 말하기를 다른 복음은 없다고 했습니다. 다른 복음이 없다는 말은 성경적인 믿음을 강조한 말로 비성서적인 신학이나 교리는 바로 다른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신학과 수많은 교리로서 교파가 나뉘고 제각기 자기들의 믿음이 옳다고들 하지만 성경에 없는 것을 시행하거나 성경에 있는 것을 실행하지 않는다면 다른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어제 저의 아내 된 임 춘자 자매가 설교시에 다른 교회 이야기를 하지 말라는 권면을 저에게 했습니다. 다른 교파에서 온 사람들이 들으면 듣기 싫어한다는 충고였습니다. 그 충고가 맞는 충고입니다. 성경만 전하지 남을 이야기하는 것은 내가 들어도 듣기 싫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아내가 없어서 제가 들었던 충고를 듣지 못한 탓으로 다른 교회를 심하게 비판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도 아내가 있었다면 아내된 자매가 그를 옆에서 꼬집었을 것이므로 겁난 선포를 자제했으리라 생각됩니다. 뭐라고 비판을 했습니까? 자기가 전한 복음만 전하지 않고 자기가 전한 복음이 아닌 다른 복음을 전한 자가 어떤 벌을 받는다고 했습니까? 임 춘자 자매께서 8절과 9절을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다른 교회들이 성경대로 하지 않고 있는 점을 성경을 가르칠 때에 교육상 지적했을 뿐이지 성경대로 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혹독한 저주를 해본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저주를 할 수 있는 사도 바울은 진짜 사도이고 저는 사람의 눈치를 보아가며 사람 비위를 맞추어가며 복을을 전하는 비겁한 전도자라는 생각을 하며 담대하지 못한 저를 오늘 아침에 채찍질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자기 자신이든 하늘의 천사이든 자기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한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저주의 선포가 사도 바울의 흥분으로 튀어나온 악담이 아니고 성령의 감동으로 내려진 경고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도 사람인지라 듣기 좋은 말로 사람의 귀를 즐겁게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10절에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만일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고 끝을 맺었습니다. 사람의 종과 그리스도의 종 둘 중 그리스도의 종을 택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오늘 주신 본문 말씀을 통해 어떤 교훈을 받았으며 받은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첫째 교훈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된 우리들은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사도 바울이 사도 된 것이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었던 것 같이 우리들이 구원되어 성도 된 것이 우리들의 족보나 학식이나 인물이 잘나서가 아니라 오직 우리를 죄에서 건지시려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주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임을 깨닫고 하나님께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 날마다 감사와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두 번째는 다른 복음은 없다는 교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한 길만을 제시하여 주셨습니다. 우리를 구원케 하신 주님이 한 분이시오, 몸이 하나라고 했으니 교회가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만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다른 예수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의 나심과 죽으심과 부활을 성경과 달리 해석하는 믿음이 많이 있습니다. 세례에 대한 많은 다른 주장과 실행이 있으며 교회도 여럿입니다. 즉 복음 아닌 다른 복음을 전하는 무리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인정하고 고백해야 합니다. 갈라디아 지역 사람들 뿐 아니라 현대의 우리들도 쉽게 복음을 버리고 다른 복음을 택하면서 하나님께서는 여러 길을 주셨다고 해석을 내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성도들의 마음에 상처를 입게 하지 않으려고 인기를 끌기 위해서 복음을 그대로 전하지 못하고 손질한 설교가 얼마든지 있을 것입니다. 기독교가 구원의 종교가 아니라 도덕적이고 사회 문화적인 집단으로 전락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다른 복음을 전하거나 따르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담대하게 외칠 수 있는 그리스도의 종들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적인 것은 성경적이라고 말 할 수 있고 성경적이 아닌 것은 성경적이 아니라고 말 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종들이 되어야 합니다. 요나의 외침이 없었다면 니느웨 사람들의 회개가 없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이 부르신 은혜를 깨닫고 사람의 인기나 타협보다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그리스도의 종이 됨 같이 우리 모두도 참된 그리스도의 종들이 다 되시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