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계시에 따른 복음 – 갈라디아서 1:11-24

무엇이 정통 보수이며 무엇이 진보라 할 수 있을까요?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순종하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된다고 가르쳤는데 유대주의자들은 율법을 지키는 선한 행위도 따라야 구원된다고 가르쳤기 때문에 두 가르침은 정면 충돌이 된 것입니다. 유대주의자들은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를 십자가에 못박아 돌아가시게 했으면서도 지금도 메시아가 오시기를 대망하고 있으나 사도 바울은 구약에 예언된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인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고 가르쳤으니 두 가르침은 서로 공통점도 있으면서도 큰 차이점도 있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 예언된 그 메시아가 오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무리들이 정통 보수로 행세를 하고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를 믿는 무리들은 비보수요 비 정통으로 배척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통 보수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으시게 한 것이니 성경에 어긋나는 정통보수가 있을 수 있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유대주의자들이 세도를 부리던 사도 바울 당시의 고린도 교회나 갈라디아 지역 여러 교회들이 사도 바울이 보낸 편지를 통해 잘못된 교리 즉 사람들이 만든 보수나 정통 또는 유전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다시 회복되어져야 했던 것 같이 오늘날의 우리들의 신앙도 성경과 비추어 사람이 만든 정통 보수나 유전은 과감히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택하는 개혁과 회복이 교회 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일어나도록 우리들에게 오늘의 이 말씀이 주어진 것입니다. 오늘 주신 본문을 통해 누가 하나님의 참 사역자이며 무엇이 참 복음인지 깨닫게 되어 우리들 자신을 말씀으로 재무장하는 복된 기회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주신 본문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본문의 뜻을 이해하고 본문이 주는 교훈을 찾고 그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 생활에서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는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11-12) [2]유전에 따른 사도 바울의 교회 핍박(13-14) [3]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이후의 활동(15-24) 입니다.

 

[1]맨 먼저 11절부터 12절까지의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들의 모든 성도들을 향해 형제들아! 라고 부르면서 말문을 열고 있습니다. 형제들이란 하나님을 아버지로 하는 한 아버지의 형제들이며 주님 오실 때에 새 하늘에 들림을 받을 무리들을 두고 부르는 영적 가족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교회에서 형제 자매라는 칭호를 사용하고 있는데 아주 좋은 칭호입니다. 다만 우리들은 사도 바울이 육적인 피로 맺어진 가족보다 더 진하게 느끼는 형제애를 가지고 형제라는 칭호를 사용하고 있음과 같이 우리들도 피보다 진한 끈끈한 사랑을 가지고 형제 자매라 해야 함이 우리들의 과제이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받고 갈라디아 지역에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고 또 사람에게서 받은 것이거나 사람에게 배운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했습니다. 자기가 받은 복음이 사람으로 말미암거나 사람으로부터 받지도 배우지도 않은 것이라고 강조하는 것은 사도 바울을 배척하는 유대주의자들이 전한 복음은 사람으로 말미암았고 사람에게서 받고 배워서 받은 복음이라는 것을 겨냥하여 강조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의 사도직과 자기가 받은 복음이 하나님께 기원을 두고 있음을 논증하기 위해 자기가 사도로 택함을 받기 전 교회를 핍박했던 시기는 사람으로 말미암고 사람들의 유전에 따라 임무를 수행했음을 다음 단원에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2]두 번째는 13절 14절의 유전에 따른 사도 바울의 교회 핍박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의 부르심을 받기 전에 자기는 자기들의 동족 중 누구보다 더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었다고 자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자기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므로 결국 조상의 유전에 흠집을 내는 기독교인들을 심히 핍박하고 살기 등등했던 사도 바울의 과거가 있었음을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사도 바울은 자기가 믿고 있는 것이 바로 정통 보수이기 때문에 자기와 다른 믿음을 가진 자들을 잡아 가두고 죽이는 것이 하나님께 충성하는 일로 믿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변화 받기 전과 변화 받은 후의 자신을 돌아볼 때에 다 진실했고 열성을 냈지만 변화 받기 전에는 사람에게서 난 유전 즉 사람이 만들고 손질한 전통을 위해 열심을 낸 것이었는데 결과적으로는 하나님을 거역한 결과를 가져왔고 변화 받은 후의 자신이 열심을 낸 그 열심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좋은 열심이었음을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의 열심과 진심이 말씀과 일치되는 열심이라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려니와 그 진심과 열심히 사람의 전통과 신학이라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열심과 진심이 된다는 진리를 교훈 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3]끝으로 15절부터 24절까지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이후의 활동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당시 유명한 가말리엘 문하에서 자랑할만한 높은 학문을 마쳤고 자기가 배운 것에 대해 보수적으로 철저히 실행에 옮겼는데 그 결과는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고 선량한 성도들을 잡아 가두고 죽였던 자신을 발견한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들에게 배운 지식과 권위와 조상들의 유전을 따랐기 때문이었음을 깨닫고 자기가 개종된 이후의 자신은 사람의 교육이나 사람의 전통과는 전연 상관이 없이 온전히 하나님의 부르심에만 따라 행한 결과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었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요사이 교회들을 신문에 소개하여 자기 교회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게 하기 위해서는 사역자가 어떤 어떤 학교를 졸업했고 어떤 학위를 받았으며 어떤 기관과 관련이 있는지를 되도록 더 많이 쓰는 것이 상식인데 사도 바울은 자기가 사도로 불리움을 받은 이후 사람인 누구로부터 배우지도 않았고 사람인 누구의 영향을 받지도 안았으며 어떤 기관으로부터의 인준도 받은 것이 없었음을 증명하려고 자상하게 밝히고 있으니 사도 바울의 사상으로 말을 한다면 사역자로서 이력서를 자상하게 밝히거나 명함이 거창한 사람은 자기의 사역자 됨이 사람에게서 난 것임을 증거 하는 것이고 사도 바울과 같이 그리스도 외에 다른 어떤 사람의 교육이나 어떤 기관의 인준을 밝히지 않는 사람은 자기의 사역자 됨이 하나님에게서 난 것임을 강조하는 것이 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하도록 하나님의 은혜로 자신을 택하시기를 어머니의 태중에서 택하셨다고 하므로 자기의 사도됨은 인위적으로 사람에 의해 늦게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찍이 만드셨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로 택함을 받을 때에 어떤 일가 친척과 의논하지 않았다고 했으며 사도중에서 가장 이름이 있는 베드로를 만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찾아가지도 않았다고 했습니다.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메섹으로 다시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아라비아로 갔다는 것은 회심 후에 일정기간동안 사역을 준비하기 위해 영적인 수련장소로 아라비아를 택했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모세에게는 미디안 광야가 있었고 예수님에게도 공생애 시작 전에 광야가 있었듯이 사도 바울도 아라비아 광야 생활 후에 곧 다메섹에 돌아와 자신이 핍박했던 사람들에게 자신의 변화를 보여주고 사죄하는 의미로 다메섹에서 전도활동을 이미 시작한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3년이 지나서야 베드로를 만나려고 예루살렘에 갔으나 오직 15일만 머물렀고 많은 사도들이 있었지만 주님의 형제 야고보 외에는 아무도 만난 일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3년이 지나서야 베드로를 만나기 위해 예루살렘에 갔지만 15일만 머물렀다고 강조하므로 자기의 사도직은 누구의 교육으로나 예루살렘의 어떤 기관과 상관이 없음을 들어내기 위한 표현이기도 합니다. 그후 자기 고향인 다소 마을 주변 도시들인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이르러 전도했으나 유대에 있는 성도들이 자신이 복음을 전한다는 소식만 알뿐이지 자기 얼굴도 모르면서 사도 바울이 변화되어 핍박했던 그 믿음을 전한다는 소문을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얼굴도 모른다는 말이 강조된 것은 복음을 전달하는 사역자가 된 이후 예루살렘 사람들을 대면하지 않았음을 강조하는 말이 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이 온전히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임을 증명하기 위해 회심이후 자기의 사도직이나 자기가 전할 복음을 위해 어떤 사람이나 교육기관을 찾지 않았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유명한 누구누구를 안다고 한사코 자랑을 하려고 하는데 사도 바울은 누구를 모른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오늘 주신 본문을 통해 어떤 교훈을 받았으며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들은 오늘 주신 본문을 통해 하나님의 복음과 사람의 복음이 있음을 깨달았고, 또 하나님의 종과 사람의 종이 있음을 배웠습니다. 교회이면 다 교회인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교회도 있고 사람의 교회도 있음을 배운 것입니다. 바울이 교회를 핍박할 때에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유대주의나 조상들의 유전을 전했던 것처럼, 만일 어떤 교회나 어떤 사역자가 신약과 구약을 우리 성도들도 다 지켜야 한다거나 구약의 어떤 부분을 지켜야 한다고 가르친다면 이것은 보수라는 이름은 가질 수 있을지 모르나 사람의 복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며 또 사역자가 어떤 성경에 어긋나는 교파의 교리나 신학을 가르친다면 그는 교파나 사람의 종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를 보아도 열심과 진심만을 보시는 하나님은 아니심을 확인했습니다. 오직 말씀에의 순종을 받으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신도를 가지고 있는 한국산 통일교가 그 이상 종교적인 단체로서는 문을 닫고 사업체로만 남겠다는 선포가 있었는데 이 세상에는 사업체 적인 교회이거나 기독교적인 교회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또 교파적인 교회가 있을 수 있습니다. 주님이 가르치신 말씀을 그대로 전하는 교회는 글자 그대로 기독교이지만 그 말씀에 손질을 해서 자기 목적과 수단으로 이용한다면 그 교회는 기독교가 아니라 기독교적인 교회나 교파적인 교회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과 같이 말씀을 그대로 전한 사역자는 주의 종이요 아무리 진실과 열심으로 가르친다고 해도 교파적인 교리로 교회를 가르치고 다스리는 사역자는 사람의 종이거나 교파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많은 교파가 있고 많은 길이 있습니다. 길이 넓고 편편하여 들어가기에 편한 길도 있고 길이 좁고 협착하며 그리로 들어가는 사람이 적은 길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진리의 길은 좁은 길이지만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므로 그리로 들어가도록 권면받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교인수가 적은 교회가 진리이고 수가 많은 교회는 비진리라는 해석은 아닙니다. 성경과 일치되지 않는 믿음은 넓은 길이며 성경에 일치되는 믿음은 비록 들어오는 사람이 적어도 진리의 길이요 생명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성경과 일치되지 않은 믿음과 실행은 사람의 작품이요 일치된 믿음은 하나님의 작품인 것입니다. 우리들은 신앙 생활을 하면서 내가 만족하는 곳이 좋은 길이라 생각하는 경우가 있으나 우리들의 믿음을 받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므로 하나님의 기준에 맞추는 신앙이라야 온전한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회심이후 누구의 교육도 받지 않았다는 강조가 사역자의 교육이 필요치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교육은 필요하되 아무리 많이 교육을 받더라도 복음은 성경대로 전해야지 교육을 통해 손질된 복음을 받아 손질된 복음을 전한다면 다른 복음을 전하는 것이므로 그런 교육은 사람의 종이 되게 한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정통 보수란 오래되고 옛 전통대로 지켜오는 신앙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복음을 변경치 않고 가감 없이 말씀 그대로 지켜나가는 신앙을 말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내가 가진 믿음을 말씀과 대조해 보아 말씀과 일치되지 않는 믿음을 하나씩 고쳐나가시어 하나님의 사람,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