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는 우리 성도들에게 구약과 신약 즉 율법과 믿음에 대해 잘 이해시켜주고 있습니다. 지난주에도 사도 바울이 베드로를 책망한 사건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유대인과 이방인의 담이 헐어졌고 성도들은 그 이상 율법이나 유대인들이 지켜온 법규에 메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한바 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을 통해서도 성도들은 율법을 지키는 인간의 행위에 의해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셨다는 복음을 믿는 믿음에 의해 구원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계속되는 갈라디아서 강해를 통해 율법과 복음을 잘 구별 할 수 있는 지식과 믿음을 갖게되므로 율법과 복음에 대한 지금까지의 혼동에서 자유함을 얻게 될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어떤 사람들이 말하기를 구약은 신약시대에 사는 우리 성도들에게 전연 필요 없는 책이라고 말을 한다거나 또는 크리스챤들도 율법의 일부 또는 전부를 지켜야 한다는 말이 틀린 말임을 쉽게 판단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약을 실체라고 한다면 구약은 그림자와 같은 것으로서 그리스도를 이해하고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약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만 하기 때문에 구약은 신약시대에 사는 우리들이 꼭 알아야 하는 책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비록 신약을 이해하기 위해서 성도들 우리가 구약을 꼭 알아야 하는 책임에는 틀림없으나 그렇다고 구약에 있는 율법의 일부나 전부를 우리들도 지켜야만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님을 우리들이 확인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본문의 뜻을 이해하고 본문이 주는 교훈을 찾고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 생활에서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는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바울의 책망(1-5) [2]믿음에 의해 의롭게 된 아브라함(6-9) [3]율법의 기능과 역할(10-14)입니다.
[1]맨 먼저 1절부터 5절까지의 바울의 책망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우리들이 아는 대로 갈라디아 교회들이란 이방인들로 구성된 교회들인 것입니다. 즉 그들은 유대인들이 아니었으므로 율법이나 유대인들이 지켜온 규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지역에 가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을 전하니 그 복음을 듣고 받아드림으로 성도들이 된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잘 지켜오고 있는 할례를 받는다던가 또는 어떤 의식을 행하는 일은 전연 모르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지역에 복음을 전하고 다른 지역에 가서 전도하고 있는 동안에 예루살렘에서 왔다는 유대인들이 갈라디아 교회들에 찾아와서 말하기를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드린 모든 성도들은 율법의 의식도 행해야 구원을 이루는 것이라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이 보기에 인물이 잘 났고 또 지식도 풍부하고 말도 잘하는 그들의 말을 들어보니 그들의 말이 사도 바울의 말보다 더 정통인 것 같이 믿어졌던 것입니다. 이렇게 유대주의자들에게 속아넘어간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의 잘못의 핵심을 사도 바울이 지적하면서 책망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속아넘어간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해 어리석은 자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미 바울을 통해 진리와 비 진리를 분별할 수 있을 만큼 배웠음에도 거짓 지도자들에게 속아넘어갔으니 그들을 어리석은 자들이라고 칭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책망하기를 그리스도께서 못 박히신 십자가를 훤히 보면서 속아넘어갔느냐고 질문식으로 책망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들이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장면을 목격했다는 뜻이 아니고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은 구약의 율법을 십자가에 못박은 것이며 인류의 모든 죄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임을 생상하게 그리고 분명하게 가르쳐 주었음에도 거짓 속임수에 넘어갔느냐는 책망인 것입니다. 또 그들을 책망하기를 너희들이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을 지켰기 때문에 받은 것이냐 아니면 믿음으로 받은 것이었느냐고 책망합니다. 분명히 그들은 율법을 행함으로 성령을 받은 것이 아니었고 믿음으로 성령을 받은 체험을 했으면서도 율법을 행해야 한다는 거짓에 속아 넘어 갔으니 이런 책망을 들은 것입니다.
갈라디아 지역 성도들이 복음을 믿음으로 받아드려 구원의 길을 잘 시작했는데 이제는 율법을 다시 받아드렸으니 사망의 길로 다시 내려가려느냐고 그들의 어리석음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드린 이유로 인해서 많은 고통을 받고도 잘 참아 넘겼는데 이젠 율법을 받아드린다면 그 동안 받았던 고난과 고통을 무효 시키려느냐는 책망입니다. 그리고 성령을 주시고 이적을 베풀어주신 것이 분명히 복음을 받아드린 믿음에 의한 것이었지 율법을 행함으로 된 것이 아니었음을 알면서도 어떻게 속임수에 넘어갔느냐고 어리석은 자들이라고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2]두 번째로 6절부터 9절까지의 믿음에 의해 의롭게 된 아브라함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이 의롭게 되어 구원되는 것은 율법을 지키는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니라 복음을 받아드리는 믿음에 의한 것임을 증거하기 위해 믿음으로 의롭게된 아브라함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4장 9절에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음을 증거하고 10절에서는 의롭게 된 시기가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기 전이었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15장 5절과 6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셀 수 없는 별을 보이시며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했는데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약속을 믿으니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고 했으며 창 18장 18절에 보면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를 인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들을 사도 바울이 인용한 것입니다.
아들이 하나도 없을 뿐 아니라 아들을 낳을 수 있는 가능성이 전연 없는 상태였던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기 때문에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음이 틀림없습니다. 사도 바울의 주장은 아브라함이 의롭게 된 것은 그가 무엇을 한 행위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라는 것이며, 또 만민이 그를 인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것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아브라함이 믿었던 그 믿음에 따라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 행위를 많이 기억하고 있으나 아브라함이 의롭게 된 것은 이삭이 태어나기 전이므로 그의 의는 행함으로가 아니라 말씀을 믿는 믿음에 따라된 것임을 확실히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 복음 8장 56절에는 아브라함이 그리스도의 때를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먼 훗날에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그 때를 소망할 뿐 아니라 믿음으로 그 때를 볼 수 있었다고 주님께서 증거하고 계십니다. 여기에서도 아브라함의 믿음이 강조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과 같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수 있는 믿음을 가진 자는 아브라함의 아들이요 아브라함의 아들들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이 받은 복을 받는 다고 강조하였습니다. 우리들이 의롭게 되어 구원되는 복은 우리가 율법을 지키거나 그 무엇을 행한 어떤 선한 행위 때문이 아니라 믿음으로 되어진 것임을 아브라함의 예를 들어 증거 받았습니다.
[3]세 번째는 10절부터 14절까지의 율법의 기능과 역할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을 지켜야 의롭게 된다는 거짓 교훈에 속아넘어간 갈라디아 교회 교인들을 향해 율법을 하나님께서 왜? 주셨으며 율법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율법이란 인간들이 율법으로 인해 죄인임을 깨닫게 하고 죄인은 그 죄 값으로 죽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며. 그러므로 죽음에서 구출될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를 갈급하도록 하기 위함임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율법아래 있는 자들이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은 세상 아무도 율법을 온전히 다 지킬 수가 없는 것이요 많은 율법 중에서 하나만 어겨도 율법에 의해서 벌을 받게 되는 것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와같이 율법은 모든 인간은 죄인이요, 자기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있는 구원의 길을 열망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롭게 될 수 없는 율법을 주님의 십자가에 못박으시고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시고 아브라함이 가진 믿음에 의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복을 받게 하시고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오늘 주신 본문을 통해 어떤 교훈을 받았으며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첫째는 어리석은 자들이 되지 말라는 교훈입니다. 어떤 자들을 두고 어리석은 자들이라고 책망을 했던가요? 율법의 억매임에서 자유를 주었겄만 이직도 율법을 지켜야하는 것으로 아는 자가 어리석은 자들이요, 하나님께서 은혜로 구원을 주심에도 자기의 의로운 행위로 구원을 이루려고 앴는 자들이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또 바른 진리를 받고도 그 진리를 지키지 못하고 비 진리의 꼬임에 빠져나간 자들이 어리석은 자들이며 또 진리를 받았음에도 믿음이 식어져 퇴보하는 자들이 바로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또 어리석은 자란 믿음을 버리고 세상으로 빠져나간 자들이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우리들은 어리석은 자들이 되지 않기 위해 말씀에 더욱 귀를 기우리고 말씀에 눈을 돌려야 합니다. 이미 받은 진리를 기초로 하여 하나님의 나라의 복을 누리도록 진리에 더욱 깊숙히 들어가야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의미와 가치를 깨닫고 어떻게 사는 생활이 하나님께서 가장 바라시는 삶인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을 두고 성령으로 시작하여 육체로 마치겠느냐는 책망을 했는데 우리들도 육체로 마치지 않게 하기 위해 더욱 영적인 모임에도 열심을 내고 스스로도 영의 양식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는 똑똑하게 보이나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는 어리석은 자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자신들을 돌아보아 어리석은 자들이 되지 않도록 자신들을 많이 채찍질 하셔야 합니다.
두 번째는 좋은 믿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자녀가 하나도 없을 때에 자기의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수 있었습니다. 또 먼 훗날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시어 십자가를 지시므로 인류를 구원하시게 될 때를 소망하며 믿음으로 그 때를 볼 수 있었던 큰 믿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우리들도 하나님을 더욱 신뢰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내 능력이나 내 경험에 바탕을 둔 믿음은 나 정도밖에 않되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내 지식과 내 경험으로는 전연 불가능한 것도 가능케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있게도 하시고 없게도 하실 창조주 하나님, 어디든지 계시며 무엇이든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믿는 만큼 이뤄주실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에 따라 의롭게 됨같이 우리들도 우리들의 믿음에 의해 의롭게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 교회 성도들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지혜로운 자들이 되며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자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