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과 약속 – 갈라디아서 3:15-29

우리들은 율법시대 또는 은혜시대라는 말을 가끔 들으셨을 줄 압니다. 이 말을 쉽게 풀어본다면 율법시대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아주는 시대로 죄인은 자신이 지은 죄 값으로 마땅히 죽어야 하는 시대를 말하는 것이며, 은혜 시대라는 말은 죽어 마땅한 죄인들에게 그리스도를 통한 자비와 은혜를 베풀어주는 시대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시대란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까지의 구약 시대를 말하는 것이요 은혜 시대란 예수님이 오신 이후 시대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해 유대인뿐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누구든지 그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율법에 메이지 않고 은혜 아래 있게 해 주셨기 때문에 이 기쁜 소식이 바로 복음이요 이 복음을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지역에 가서 전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 복된 소식을 뿌리고 난 후에 예루살렘으로부터 왔다는 유대 우월 주의자들이 갈라디아 교회들에 찾아와서 은혜 시대에 있는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율법시대를 다시 소개하므로 갈라디아 교인들이 그들의 말에 속아넘어가 은혜 시대에서 다시 율법과 은혜가 혼합된 시대로 뒷걸음질을 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안 사도 바울이 속아넘어간 갈라디아 지역 교회들의 성도들에게 편지를 보낸 것이 갈라디아서인데 오늘의 본문이 그 중 일부인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는 율법과 약속이란 주제를 가지고 율법이 무엇인지 은혜로 주어진 약속이 무엇인지를 설명해주고 유대주의자들이 가르쳐준 교육이 잘못된 것임을 깨우쳐주고 있습니다. 갈다디아 교회들에게 보낸 오늘의 말씀을 통해 우리 교인들도 율법과 언약에 대해 성경적인 답을 얻어 진리를 찾아낸 기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오늘의 본문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본문의 뜻을 이해하고 본문이 주는 교훈을 찾고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 생활에서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는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율법보다 앞선 언약(15-22) [2]율법의 존재 목적(23-29)입니다.

 

[1]먼저 15절부터 22절까지의 율법보다 앞선 언약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이미 받아드린 갈라디아 교회들의 성도들에게 율법도 지켜야 한다는 유대주의자들의 부당성을 지적하기 위해 언약이 율법보다 더 우월함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말한 언약 즉 약속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말하는 것으로 창 17:7-8을 보면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너의 우거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일경으로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라 했는데 이 언약은 아브라함과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어진 것이며 이 언약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온전히 이뤄진 것을 전제하여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뤄진 복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께 하신 이 언약은 율법이 주어지기 430년 전에 주어졌으므로 430년 늦게 주어진 율법이 언약을 지배할 수 없으므로 언약은 율법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맺은 계약도 계약이 맺어진 후에는 일방적으로 약속한 것을 빼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는 것인데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은 더욱 변경 없이 꼭 시행되어진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언약은 율법보다 더 우월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언약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것이나 율법이란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하여 천사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사람에게 전달된 것이므로 간접적으로 주어진 율법보다 직접적으로 주어진 언약이 더 우월하다는 것입니다. 또 율법이란 약속의 자손이 오기까지 시한부적으로 주어진 것이므로 약속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이후에는 율법은 그 이상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 율법을 통해서 사람이 구원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면 율법을 통해서 의롭게 될 수 있었겠지만 율법이란 모든 인간을 죄의 굴래 속에 가두어 두어 죄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게 되어 있으므로 모든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약속 즉 언약을 얻도록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로 주어진 언약은 율법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강조하므로 유대주의자들이 복음을 받아드린 언약의 백성들에게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가르친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거꾸로 거슬러 가는 길이요, 구원받은 자를 다시 사망으로 인도하는 잘못된 가르침이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받은 율법보다는 유대인뿐 아니라 모든 민족에게 주어진 언약이 보다 더 우월한 것입니다.

 

[2]두 번째로 23절부터 29절까지의 율법의 존재 목적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요사이 갈라디아서를 통해 율법과 복음에 대해 많이 듣게 됩니다. 율법이 왜? 주어졌으며 누가 언제까지 율법을 지켰어야 했었는가에 대해 보다 명확히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이란 우리가 믿음을 갖도록 예수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몽학 선생이라고 했습니다. 몽학 선생이란 어린 학생을 선생님께 데려다 주는 가정 교사나 학생을 돌보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율법이 몽학선생이라는 말을 두 가지의 의미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하나는 율법이란 우리 모든 인간들이 율법을 통해 우리 스스로가 죄인임을 깨닫게 하고 죄인이라면 당연히 죄 값으로 죽어야 하므로 모든 인간이 살아나기 위해서는 은혜를 입혀줄 은인이 필연적으로 필요함을 느끼게 하므로 율법은 은인이신 그리스도를 찾아가도록 인도하는 안내자가 되는 것이며 다른 면에서는 처음부터 율법이란 불완전하게 만들어졌으며 완전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 시한부적으로 적용된 것인데 이제 그리스도가 오셨기 때문에 율법은 몽학선생의 본분인 안내자의 직무를 다 마쳤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율법을 통해서는 의롭게 되지 못했지만 이젠 율법이 몽학 선생이 되어 우리들을 예수 그리스도께 인도하심으로 이젠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누구든지 세례를 받음으로 우리 모두는 옛 사람을 벗고 예수 그리스도의 새 옷을 입게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언약에 따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자유자나 종이나 여자나 남자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였고 누구든지 그리스도께 속한 자는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하늘 나라의 유업을 이을 자로 택함을 받게 된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오늘 주신 본문을 통해 어떤 교훈을 받았으며,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율법도 우리를 구속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신약 시대에 있는 우리들은 십계명으로 간추려진 모세 율법에서 온전히 해방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율법의 완성인 복음에 순종해나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를 다시 확인한다면,

 

첫째, 모세의 율법은 유대인들에게 지킬 법으로 주어진 것이며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 시한부적으로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이방인들이므로 유대인들이 지켜야할 법인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되며 시기적으로도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신약시대에 사는 우리들에게는 적용이 되지 않는 법이므로 우리들은 율법에서 온전히 해방된 것입니다.

 

둘째로는 율법을 지켜도 우리들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는 것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자들은 율법에 따라 우리들이 죄인 되게 만들어 우리 자신의 죄 값으로 죽게 하지만 오히려 복음을 믿음으로 우리를 죄에서 해방되게 하고 죽지 않고 살게 하므로 우리들은 율법에서는 벗어나고 은혜인 약속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셋째는, 옛 언약인 율법은 새 언약인 복음의 그림자나 모형으로서, 구약의 율법은 온전하지 못한 것이나 새 언약인 복음은 완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율법은 사람을 실지로 죽이지만 않으면 되는 외형상의 법이지만 새 언약은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법에 들어 있는 정신을 따른 온전한 법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이란 자신이 살아 있고 대신 동물만 죽게 하는 법이지만 새 언약은 나 자신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게 하고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안에서 다시 살게 하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버린 것이 아니라 율법을 온전히 지키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예수님께서 ‘내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온전케 하려고 왔으며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들은 우리 모두는 우리들의 신앙 생활에서 그리스도가 빠진 율법의 모형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찾은 율법의 정신을 선택해야 함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법의 정신은 버리고 법의 모형만 가진 자들을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이라고 했던 그 의미를 새롭게 깨닫고 그리스도의 정신을 실천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예배드리고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일상 생활에서 생활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법이니까 교통법규를 지키거나 또 다른 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사는 사회를 보호하고 나를 보호하기 위해 세상 법을 지키는 것과 연결을 시켜도 되겠습니다.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그리스도를 모양적으로만 믿는 자리에서 모양과 마음으로 온전히 믿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찬양하는 자가 좋은 목소리를 내는 것으로만 그치지 아니하고 목소리와 함께 마음으로 영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양이 되게 하며 헌금하는 자가 큰 물질을 바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큰 물질을 은밀하며, 자원하며, 감사한 마음으로 바치는 헌금이 되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살인이란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것이지만 남을 미워하는 것까지도 금하고 있는 예수님의 교훈을 마음에 두고 생활하라는 교훈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이 나올지 모릅니다. 율법이 요구하는 살인하지 말라는 법은 사람을 죽이지만 않으면 되는 것이지만 신약적인 요구는 사람을 미워하는 것까지도 살인하는 것에 속하게 되는 것이므로 모양만인 율법도 지키지 못하므로 다 죽어야 했는데 신약의 요구는 더 구체적이고 더 어려운 것이 사실인데 결과적으로는 다 죽는 것이 아니겠는가? 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 사는 우리들은 진심으로 최선을 다해 말씀을 순종해 나가는 것일 뿐 우리가 완전히 흠이 없어야만 구원을 받는 다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하고 하나님께서는 연약한 우리에게 은혜와 자비를 베푸는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전제해서 불법을 고의로 저지르는 자들에게 자비를 베푼다는 의미는 아님이 사실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날마다 말씀을 상고하고 그 말씀의 뜻을 깨닫고 그 말씀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 성령의 도움을 요청하는 기도가 이어져야할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모양으로도 또 내용으로도 순종해 나가시므로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의 자손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