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업을 이을 자 – 갈라디아서 4:1-7

복음을 받아드린 갈라디아 지역 성도들에게 율법도 동시에 지켜야 한다고 가르친 유대주의자들에게나 또한 거짓 가르침을 받아드린 갈라디아 지역 성도들에게 복음을 받아드린 성도들은 그 이상 율법을 지켜야할 의무가 없음을 여러 각도에서 이해를 시켜주고 있습니다. 지난주의 가르침은 율법이란 어린아이를 안전하게 학교 선생님에게 데려다 주고 오는 몽학 선생과 같아서 우리들의 참 선생님이신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역할을 해주는 것이라 풀어주었던 것입니다.

 

오늘은 율법과 복음에 대해 유업을 받을 자 즉 상속을 받을 자의 비유를 들어 갈라디아 교인들을 이해시키고 있습니다. 오늘 주신 본문을 통해 율법과 복음, 옛 언약과 새 언약, 구약과 신약에 대해 보다 확실히 이해하시게 되기를 원합니다. 이렇게도 쉽고 분명하게 가르쳐준 사도 바울을 통해 우리들에게 전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게 생각하면서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본문의 뜻을 이해하고 본문이 주는 교훈을 찾고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는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에 있는 상속자(1-3) [2]양자가 되어 자유를 얻은 상속자(4-7)입니다.

 

[1]먼저 1절부터 3절에 있는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에 있는 상속자에 대해 먼저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과 복음을 일생 생활의 한 예를 비유하여 이해를 돕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나 재산 상속에 대해서는 기본적인 상식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재산 상속의 비유를 들었습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재산을 상속해야할 경우에 재산을 물려받을 자녀가 아직 나이 어린아이라면 어떻게 되나요? 성인이 될 때까지 변호사나 어떤 사람의 보호를 받아 그 재산이 관리 보호되다가 상속을 받을 자녀가 성인이 되어서야 비로소 스스로 재산을 관리 처분할 수 있는 권리를 주게 되는 것입니다.

 

나라마다 성인이 되는 나이에 차이가 있겠지만 정해진 그 시기가 되어야 재산 상속자로서의 권리를 받는 것이고 그 이전에는 상속자임에는 틀림없지만 상속자로서의 참 권리는 행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년과 미성년의 나이를 유대에서는 12살이고, 헬라 세계는 18살이며 로마에서는 25세로 규정하였다고 합니다. 모든 법은 모든 사람 앞에 평등하나 나이가 차야 그 권리를 온전히 찾도록 임시적으로 권리를 빼앗고 있는 현실적인 사실을 비유로 들어 율법과 복음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미성년과 성년의 예와 같이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아들들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는 후견인과 청지기의 보호아래에 있어야 하며 온전한 자유는 아버지의 정한 때가 와서야 누리게 되는 것이라 했습니다. 로마에서는 성년을 25세로 하고 있으나 실지로 행해진 것은 그 아버지가 성년으로 인정하면 그때에 재산을 관리 처분할 수 있는 성년이 될 수 있었다고 하는데 매년 3월 17일에 성년의 날로 정하고 그날 각 가정에서 성년의식을 행했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아마 그런 관습에 기초를 두고 ‘그 아버지가 정한 때까지’라는 표현을 한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즉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정하신 때까지’는 후견인과 청지기와 같은 율법 아래에 메이게 했다가 하나님 아버지가 정한 때가 돼서야 율법에서 벗어나게 했다는 것입니다. 다음 단락에서 나오지만 그렇다면 율법에서 벗어나게 되는 아버지의 정한 때란 언제를 말하는 것일까요?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내려보내시고 십자가를 지시게 한 때를 말하는 것입니다.

 

3절에 보면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이 아버지의 때가 차기까지 이 세상의 모든 초등 학문아래 있어서 그런 것들에 종노릇하였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초등 학문이란 예수님 오시기 전까지 하나님께 인정받고자 하는 모든 노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의롭게 되고자 율법을 지키고 도를 닦으며 또 다른 많은 노력을 했지만 그런 것들로서는 의롭게 될 수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므로 예수님 오시기전까지 의롭게 되고자 애썼던 모든 노력들은 온전한 학문이 아닌 기초에 불과 하는 초등학문이라 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 이전의 모든 사람들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에 있는 자유가 아직 없는 상속자에 비유한 것입니다.

 

[2]두 번째로는 4절부터 7절까지의 양자가 되어 자유를 얻은 상속자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겠습니다. 4절에 보니 때가 차매 아버지께서 아들을 여자에게서 나게 하셨다고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스케듈에 의해 가장 마땅한 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입니다. 그 때가 아브라함 때도 아니었으, 모세 때도 아니고, 요셉 때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고 또 예수 그리스도를 충분히 이해할만한 가장 적절한 시기에 아들을 보내되 여자의 몸에서 한 인간으로 태어나도록 하신 것입니다. 인간으로 태어나심으로 인간들이 당하는 모든 슬픔과 고통을 다 느끼시고 짊어지시도록 한 것입니다. 여자에게 태어나시되 율법아래에 태어나시게 했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율법대로 8일만에 할례를 받았으며 절기도 지키시고 율법아래에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5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율법 아래에 있게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율법에서 자유를 주시려고 율법 아래에 있게 했다고 했습니다.

 

이전까지는 율법이 후견인과 청지기가 되어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런 것들의 간섭을 받아 아들로서 참 자유를 누리지 못했지만 때가 차서 아들을 보내심으로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런 모든 간섭에서 벗어나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했다고 했습니다. 아들의 명분이란 원래는 아들이 아니었지만 하나님께서 아들로서 받아주었다는 뜻입니다. 즉 양자를 삼아주셨다는 것입니다. 양자는 호적상 데려온 사람으로 적혀 있을 뿐 아들이 누릴 모든 권리를 다 누리는 것입니다. 양자가 되었으므로 이제는 초등학문에 메이지 아니하고 온전한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로 아들을 삼았으므로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시고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아들의 영이란 무엇일까요? 성령입니다. 성령을 우리 마음에 보내주심으로 한 성령을 받은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며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각각 다른 인간의 족보에서 왔지만 하나님 족보에 양자로 택함을 받았으므로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가정의 형제 자매가 된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우리들이 형제 자매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아바 아버지의 아바라는 말은 우리말로 아빠라고 부르는 아주 친근한 단어에 해당합니다. 자기의 친아버지를 아버지라고도 부르지만 친구의 아버지께도 아버지라고 부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빠라는 단어는 친아버지 아니고서는 아빠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으리라고 봅니다. 율법 시대에는 하나님이 거리감이 있는 아버지 같은 존재로 인식이 되었지만 신약 시대에는 아빠라고 부를 정도의 친근감이 있는 친아버지가 되었음을 강조하기 위함인 줄 압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정한 때에 아들을 보내시고 모든 율법에서 벗어나게 하시며 양자를 삼아주시고 아들이라는 보증서로 성령을 우리들의 마음에 주시고 아빠라고 부르게 하셨다면 이젠 우리가 종이 아니고 참 자유와 특권을 누리는 아들이므로 그 아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이을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오늘 주신 본문을 통해 배우게 된 교훈은 무엇이며 우리들의 일상 생활에서 이 교훈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겠습니까?

 

첫째 교훈은 옛 언약인 율법은 우리들에게 청지기요 후견인이며 초등학문일 뿐이요, 새 언약인 복음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도록 양자 되게 해주는 것이요, 참 상속자가 되게 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구약과 신약은 둘 다 하나님의 말씀임에는 틀림없지만 의미적으로는 구약은 기초요, 신약은 완성이며, 시기적으로 본다면 구약은 예수님 오시기전까지 필요에 의해서 임시로 주어진 임시 법이며 신약은 예수님 오신 이후에 영원히 주어진 약속인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을 거리감을 두고 아버지라고 부르는 정도였지만 복음을 통해서는 아빠라고 부를 수 있는 친근감이 있는 인격적으로 교제를 나누는 관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우리가 청지기나 후견인을 통해 아버지를 만날 수 있게 되는 종과 같은 존재로 남아 있게 해주는 것이나 복음은 양자를 삼아주어 아버지를 직접 만나 대화하며 아버지가 주실 상속을 다 받게 해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율법은 어느 시기까지만 특별한 목적으로 주어졌으므로 예수님께서 오신 이후에 사는 우리들은 옛 법인 율법에서는 온전히 해방되었고 새 법인 신약이 우리들이 받아야할 법임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는 양자의 복을 누리자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이 우리들을 가두어두는 것이요 복음은 우리들을 풀어주는 것이라 비교해주면서 복음이 가져다주는 복을 누리고 행여나 다시 법에 메이지 말기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중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헌금을 하되 억지로 내는 사람과 감사하여 내는 사람이 있을 것이며, 성경을 읽되 억지로 읽거나 아예 성경을 아예 읽지 않는 사람이 있고 말씀이 어찌 달고 맛이 있으며 내 마음을 윤택하고 평화롭게 만들어주므로 기쁘게 성경을 읽는 사람이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직통전화 기도의 복을 누리는 자가 있고 직통전화를 아예 끊고 사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내게 자유가 있으면서도 일 때문에 일에 매여 교회 집회에 빠지는 사람이 있고 양자의 복을 누리기 위해 일에서 자기를 해방시키고 집회에 참석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주님을 나의 구주로 받아드리는 믿음을 가진 우리 모두에게 구원을 주시리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어떤 자는 구원 얻은 자로서 양자 된 자로서 모든 복을 누리는 자가 있고 양자가 되었음에도 양자의 참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양아버지를 부르는 감정으로 아버지라 부르고 별로 가깝게 관계를 갖지 못한 자가 있고 하나님을 친아버지 아빠라고 부르면서 아빠와 깊은 관계를 누리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교회를 나온다해도 내가 꼭 있어야 할 내 교회로 알고 나오는 사람도 있고 남의 교회같이 낯선 마음으로 나올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한 형제로 양자가 되었기 때문에 서로 형제 자매로 알고 친교 하는 사람도 있고 한 형제로 느끼지 못하고 계속 다른 식구같이 느끼면서 대하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종이었던 자가 양자로 택함을 받았다면 그 양자가 누릴 많은 복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양자가 누릴 많은 복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이런 큰복을 받은 우리들은 양자로서 누릴 모든 복을 다 누릴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양자의 복을 다 누리시는 상속자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