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 교회에 대한 바울의 염려 – 갈라디아서 4:8-20

기독교와 일반 종교와의 차이를 단적으로 말해본다면, 기독교는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는 것이요, 일반 종교나 미신은 신을 잘 섬겨 내 소원을 이루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정통적인 기독교라면 마땅히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그대로 실천할 것을 요구하고 일반 종교에서는 얌전한 도덕적 행위가 요구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가끔 이런 말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저 사람은 남을 위해 좋은 일을 많이 해서 천당에 가는 것은 보증 수표라는 것입니다.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도덕적인 인물이 높임을 받는 우리들의 사회적 통념이 기독교인들의 마음에도 자리 잡고 있어서 기독교에서도 도덕적 인간들의 행위만을 두고 신앙이 좋다든지 신앙이 없다든지 판단하게도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에도 우리들이 갖고 있는 도덕적 기준을 가미하므로 혼합된 종교가 실존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계속 강조라고 있는 것도 예수님이 오신 이후에는 복음을 받아드림으로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지만 유대주의자들은 복음도 받아드리고 율법도 지켜야 한다고 혼합 종교를 강요했던 것입니다. 우리들이 매주 갈라디아서 강해를 계속적으로 받고 있는데 갈라디아서와 같은 성경 교리적인 설교는 강단에서 인기가 없는 품목이며 많은 대중이 선호하고 있는 설교는 도덕적이거나 철학적이거나 아니면 만담적인 설교인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인기를 선호하는 목자들이 교리적인 설교는 피하고 인기 품목만 골라서 설교를 하게 되므로 갈라디아서 강해를 듣는 교인중에는 다른 교회와 다르게 가르친다고 말 할 정도로 전연 생소한 말씀으로 이해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성경은 몰라도 착하게만 신앙 생활하면 된다는 자세보다는 성경을 하나라도 더 알고 하나님이 바라시는 신앙 생활을 하는 것이 기독교의 정도인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우리들은 갈라디아서를 통해 지금까지 배운 것만으로도 구약과 신약에 대해 상당한 지식을 얻게 되었습니다. 구약 즉 율법은 시기적으로 예수님 오시기까지의 임시법이요, 내용적으로는 초등학문이요, 기능적으로는 몽학 선생이요, 두 언약을 비교한다면 율법은 새 언약에 비해 더 못하다는 사실을 확실히 배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유대주의자들의 속임에 넘어가 복음도 받아드리고 또한 율법도 지켜야 하는 것으로 잘못 배운 갈라디아 교회 교인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또 유대주의자들의 정체를 폭로하며 갈라디아 교회를 향한 사도 바울의 진정한 사랑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순수한 기독교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오늘 본문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본문의 뜻을 이해하고 본문이 주는 교훈을 찾고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 생활에서 어떻게 실천할 수 있겠는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의 잘못(8-16) [2]유대주의자들의 정체(17-18) [3]사도 바울의 헌신적 사랑(19-20)입니다.

 

[1]먼저 8절부터 16절의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의 잘못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의 잘못을 몇 가지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아신 바 된 자들이 어찌 다시 초등학문으로 되돌아가 다시 종노릇 하려느냐고 지적합니다. 율법은 약하고 부족한 것이므로 임시적으로 주님이 오실 때까지 주어진 것이요 때가 차서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이제는 더 좋은 언약인 새 언약을 주셨는데 더 좋은 언약인 복음을 받아드린 너희들이 어떻게 옛날 법, 더 못하고 천한 법,십자가에 못 박아버린 율법을 지키겠다고 하여 율법의 종이 되려느냐는 지적입니다. 율법을 지키겠다고 한다면 모든 율법을 지켜야하는 굴래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의 지적은 율법에서는 날과 달과 해를 삼가 지키도록 했으나 새 언약에서는 날과 달과 해를 삼가 지켜야하는 속박에서 벗어나도록 해주셨는데 다시 옛날 같이 날과 달과 해를 삼가 지키니 모든 속박에서 해방 시켜주는 기쁜 소식을 전한 모든 수고가 헛될까 염려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구약에서는 날로는 안식일 초하루, 또 유월절 등 절기를 지키는 것이 의무적이었는데 지금 다시 날과 달과 절기를 지키기 시작하면 구약의 그림자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므로 복음의 의미도 없고 모든 수고도 헛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율법에서는 날과 달과 절기를 지키도록 명령되었지만 신약에서는 그런 속박에서 온전히 해방되었으므로 구약의 어떤 습관을 우리 교인들에게 짐을 지워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 교회는 어떤 특수한 날을 성별해서 지키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부활절, 성탄절, 추수 감사절 등 열심히 지키는 교회가 정통 같고 보수적으로 느껴지는 것이 바로 유대주의 자들이 갈라디아 교회에 가르친 같은 종류의 교육을 각 교단의 풍습에 따라 또는 목사님들이 교육을 통해 배웠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들은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여 모이는 주일 예배를 통해 주님의 나심과 죽으심과 부활을 기년하고 또한 우리들의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잘한 점을 칭찬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 복음을 전할 때에 사도 바울은 어떤 질병으로 인해 건강도 좋지 않았고 외모로도 볼품도 없었지만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은 사도 바울의 외모가 어떻든 상관하지 아니하고 복음을 전하는 사도 바울을 천사를 대접하듯, 또 그리스도를 영접하듯 했었다는 사도 바울의 감동과 기억을 전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 성도들의 뜨거운 사랑을 말하자면 만일 사도 바울이 눈이 필요했다면 그들의 눈이라도 빼어 줄 정도로 뜨거웠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교회 지도자의 어떤 외형적인 조건이나 모습을 개의치 않고 진실로 복음을 전하는 참뜻을 이해하여 복음 전도자가 필요한 것이라면 눈이라도 빼어 줄 수 있는 정도라면 그 자체가 큰 복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런 면에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묻습니다. 그 때의 그 큰복이 지금 어디로 가고 이제는 외모로 사람을 대우하여 외모가 그럴 듯한 유대주의 자들의 말은 신용하고 옛날 그렇게 대우받던 사도 바울 자신은 천대를 받아야 하는 거냐고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 자신은 순수한 말씀을 그대로 전했는데 이제 유대주의자들의 거짓을 받아드리고 사도 바울을 배척하고 있으니 참말을 전한 이유로 결국 너희들과 원수가 되었단 말이냐고 질문성 책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2]두 번째로 17절로 18절까지의 유대주의자들의 정체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의 마음을 사기 위해 열심을 내는 유대주의자들의 열심은 좋은 열심히 아니라 그 열심에는 다른 흑심이 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유대주의 자들이 갈라디아 교회를 위해 열심을 내어 헌신하는 목적이 갈라디아 교회를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사도 바울과 갈라놓고 갈라디아 교인들이 유대주의자들에게 열심을 내게 하려는데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물론 좋은 목적으로 너희들을 위해 열심을 내는 일이라면 내가 전에 너희들을 위해 열심을 냈던 때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지만 열심이라고 무조건 수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너희를 위한 것 같지만 언젠가는 너희에게 해를 끼치기 위해 위장된 열심히라고 경계한 것입니다.

 

[3]세 번째로 19절부터 20절까지의 사도 바울의 헌신적 사랑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처음에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아들딸로 태어나도록 했던 모든 과정을 해산의 고통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상을 숭배했던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이 복음을 받아드려 성도가 되게 하는 과정에 얼마나 고통이 많았었는가를 말해주는 표현이리라 믿습니다. 이런 해산의 고통과 같은 모든 과정을 거쳐 결과적으로 성도들이 되게 했는데 거짓 교사들의 유혹에 넘어가 옛날로 되돌아간 것이나 마찬가지니, 그들을 다시 율법주의자들의 잘못된 가르침에서 해방시켜 바른 진리에로 회복시키는 과정을 또 다른 해산의 고통으로 보고 이 해산의 고통을 다시 겪으면서 기어코 회복시키겠다는 다짐과 진실 된 사랑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직접 만나 부드러운 말로 오해된 부분을 서로 나눌 수 있게 되기를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오늘 주신 본문을 통해 어떤 교훈을 받았으며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첫째는 앞으로 나아가는 신앙을 갖자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복음을 받아드린후에 거짓 교사들의 유혹에 넘어가 복음도 받아드리고 율법도 다시 지키므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에 따른 전진적 신앙을 유지하지 못하고 전진했다가 다시 후퇴한 신앙을 소개받았습니다. 우리들은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 스스로의 신앙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내 신앙은 전진적 신앙인가? 아니면 후퇴된 신앙인가를 점검해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나는 옛날에 우리들을 가르쳤던 교수 중 한 분이 본래는 천주교 신자였던 그분이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는데 요사이 들으니 그분이 독실한 불교 신자가 되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또 교수중 한분은 그렇게도 강직한 그리스도의 교회 주창자였는데 그가 지금은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고 해요.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게 될 까요? 신앙을 갖되 성경에서 얻은 신앙이 아니라 그때 그때 상황에 따라 들은 대로 감정으로 받아드렸기 때문인 것으로 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들의 신앙은 성경에서 확인된 신앙을 받아드려야 하며 점차적으로 성경을 계속 연구하여 내 신앙을 점점 더 성경적인 신앙으로 키워나가므로 나아가는 신앙을 유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성경을 열심히 상고해야 합니다. 성경을 상고하고 그 말씀대로 일상 생활에서 실천하므로 나아가는 신앙이 가능합니다. 내가 가진 열심도 나아가는 신앙인지 아니면 식어가는 신앙인지도 점검해보고 나아가는 신앙이 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세상은 유행하지만 신앙은 유행이 아니므로 구약과 신약이 번갈아가며 유행되지 않으며 각 교파기 유행적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점점 성경적인 신앙으로 나아가는 신앙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날로 새로워지는 신앙이어야 함에도 일반적으로 신앙은 굳어져버린 신앙, 교만해지는 신앙, 주관적 자기 만족적인 신앙이 되기 마련입니다. 기독교가 윤리 도덕적인 종교가 아니요 현세와 미래의 구원을 이루는 종교라면 우리들은 마땅히 날마다 살아있는 신앙, 날마다 나아가는 신앙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해산하는 고통을 감당하자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새로 교인 하나를 회개시키는 일을 해산하는 고통에 비유했습니다. 달리 말을 한다면 우리들이 바른 신앙을 유지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전도자나 교인 자체가 함께 해산의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피나는 수고가 없이 어떻게 좋은 신앙을 유지할 수 있겠습니까? 내 형편에 따라 형편에 맞추어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이 해산의 고통을 느낄 수 잇겠습니까? 교인 하나를 바로 가르치기 위해서도 해산의 고통이 따르겠지만 역시 자기 자신의 올바른 신앙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해산의 고통을 감수해야 함을 마음에 두고 나아가는 신앙을 유지하기 위해 해산의 고통을 감수해보시기 바랍니다. 값진 진주 같은 신앙은 바로 이런 해산의 고통을 통과한 신앙일 것입니다. 우리 모두 내 신앙을 끌어올리기 위해 해산의 고통이라도 감당하는 귀한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상을 주신다고 한다면 왜? 상을 주시겠습니까? 해산의 고통을 다 감당했으므로 상을 주시지 않겠어요. 그런 상이라야 또한 가치 있는 상이 되겠지요.

 

우리 한인 교회 성도님들 모두가 나아가는 신앙을 갖으시기를 바라며 이런 나아가는 신앙을 유지하기 위해 해산의 고통이라도 감수하는 담대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