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와 하갈의 비유 – 갈라디아서 4:21-31

우리들은 매주 갈라디아서를 통해 율법과 복음에 대한 정답을 확인해나가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배운 말씀을 통해 율법에 대해 어떤 정답을 갖고 있습니까? 지금 드리는 질문에 함께 답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구약의 율법은 우리 성도들이 지켜야하는 법인가요? 예 입니까? 아니오 입니까? 율법은 누가 오시기까지 주어진 시한부 임시법인가요? 율법을 학문으로 말하자면 온전한 학문이 되지 못하고 초보적인 학문에 불과하다는 의미로 무슨 학문이라 했나요? 율법은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역할을 했다는 의미에서 어린아이를 학교 선생님에게 대려다주는 무슨 선생이라 했나요? 율법은 유산을 상속받을 수 있는 자유인의 아들이 아니고 상속받을 수 없는 누구의 아들로 비유 했나요? 십계명은 무엇인가요? 율법의 핵심이지요 그럼 우리들이 십계명을 지켜야 하나요? 왜? 지금까지 답한 모든 말씀에 근거하여 우리는 율법 중 어떤 법에도 얽매이지 않으며 만일 그것을 지킨다해도 더 나은 것이 없고 오히려 모든 율법의 속박 속으로 스스로 들어가는 결과가 되는 것임을 확인했습니다. 율법은 복음이 주어지기 전까지 임시적으로 주어진 법이므로 복음이 주어진 지금은 율법을 지켜야 하는 얽매임에서는 해방되고 복음을 받아드림으로 은혜에 의해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가르쳐준 말씀만으로도 구약과 신약을 확실하게 구별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우둔한 우리들을 더 분명하게 깨우쳐주려고 오늘은 사라의 여종 하갈이 낳은 이스마엘과 사라가 낳은 이삭을 대조하여 율법과 언약의 뚜렷한 차이점을 다시 한번 더 확인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을 통해 우리 교회 성도들은 구약과 신약의 대조에서는 남들에게도 잘 가르쳐줄 수 있는 선생님들이 다 되시기를 원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본문의 뜻을 이해하고 본문이 주는 교훈을 찾고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는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하갈의 아들과 사라의 아들(21-28) [2]핍박(29) [3]유업을 함께 받지 못하는 계집종의 자녀(30-31)입니다.

 

[1]맨 먼저 하갈의 아들과 사라의 아들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는 율법은 하갈의 자녀로, 복음은 사라의 자녀로 비유하면서 우리들에게 율법의 위치와 복음의 위치를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율법이라고 하면 매우 엄숙하고 절대적인 존재로 우리가 느끼기 쉬운데 율법은 하갈의 자녀요 신약의 복음은 사라의 자녀로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과 복음이 종의 아들 이스마엘과 사라의 아들 이삭으로 대조된다면 그 누구도 율법에 미련을 갖고 선호하는 사람이 없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율법도 지켜야 한다는 유대주의자들과 잘못된 가르침에 빠져 들어간 무리들을 향해 율법에서 말하고 있는 의미를 어찌 알지 못하느냐고 책망을 하면서 오늘의 가르침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25장에보면 아브라함에게 후처 그두라가 있어 그에게서 아들 6명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아들이 많이 있었는데 오늘 본문 22절에서는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인에게서 났다고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보면서 우리들은 성경을 읽을 때에 성경의 맥을 집을 줄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서는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늘 두 줄기를 중심하여 소개하면서 두 줄기중 바른 줄기를 택하도록 유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덴 동산에서의 아담과 하와에게 두가지의 길이 있었는데 하나님의 말씀과 뱀의 말이요, 가인과 아벨이며, 이스마엘과 이삭, 에서와 야곱, 유대인과 이방인, 성령과 사탄, 천국과 지옥, 성령의 열매와 육의 열매, 선과 악, 구약과 신약, 순종과 불순종 등과 같이 늘 두 줄기의 길이 대조되면서 우리 인간들로 하여금 각자의 자유 의지로 옳은 길을 선택하도록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갈과 사라는 비유로서 두 언약에 비유된다고 하면서 두 언약을 두 여자와 두 여자의 아들로 대조해 주고 있습니다. 두 여자를 비교하기를 한 여자는 자유가 없는 여종, 한 여자는 자유하는 여인, 또 두 아들을 비교하기를 하나는 종의 아들,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비교하고 있습니다. 종의 아들은 육체를 따라 낳은 아들이요 자유하는 여자에게는 약속으로 말마암아 낳았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하나님으로부터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으나 사라는 육체적인 조건으로는 너무 늙어 아이를 갖는다는 것이 전연 불가능함을 알고 자신의 여종 하갈을 아브라함에게 주어 아들을 낳도록 하여 이스마엘을 낳았던 것입니다. 조금만 기다렸다면 인간의 육체적 조건으로는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약속대로 이삭을 낳게 될터인데 인간의 육체적 조건에 의해 자기 힘으로 이스마엘을 낳았던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두 아들을 비교할 때에 하나는 육체를 따라 난 것이요 하나는 하나님의 힘에 의한 약속에 따라 난 것이라는 것입니다.

 

24절에보니 하가는 지금의 예루살렘에 비유되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으로부터 종을 낳았다고 했으며 하갈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노릇한다고 했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무엇을 받았나요? 율법을 받았습니다. 하갈이 시내산으로부터 종을 낳았다는 말과 하갈이 자녀들과 함께 종노릇한다는 말은 모세를 통해 주어진 그 율법아래에 있는 모든 자들은 종과 같이 자유가 없는 생활을 했다는 말입니다. 예루살렘이라는 곳이 어떤 곳입니까? 율법의 총본부가 되겠습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을 중심하여 율법을 따른다고 수고들하고 있으나 그 생활은 자유도 없고 하늘나라의 상속도 받지 못하는 종의 생활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육의 족보를 따라 태어난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예루살렘성전을 중심하여 율법을 지켜오고 있지만 그들은 참 자유를 모르고 결국은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못하는 종의 아들과 같은 존재임을 비유해주고 있습니다. 율법을 알고 해석한다는 그들이 메시야도 몰라보고 십자가에 못을 박았으며 지금도 메시야 오시기를 대망하고 있으니 그들이 어떻게 새 예루살렘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반면에 26절에서는 위에 있는 예루살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위에 있는 예루살렘이란 지형적이 예루살렘이 아닌 영적인 예루살렘을 말하는 것으로 궁극적으로는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 내려올 새 예루살렘을 말하는 것이요 지금은 누구든지 새 언약을 받아드리고 그리스도를 영접한 모든 개인들이나 교인들의 모임인 교회가 되겠습니다. 비록 사라는 아들을 낳을 수 없는 여자였으나 약속에 따라 은혜로 아들을 낳은 것 같이 육적으로 유대인으로 태어난 자들이나 육적으로 이방인으로 태어난 이들이나 하나님의 은혜로 약속에 따라 주어진 복음을 받아드림으로 자유 여인의 아들 이삭과 같이 천국을 유업으로 받을 수 있는 약속의 자녀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구원되는 숫자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뽐내는 유대인들보다 더 많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2]두 번째로 29절의 핍박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창세기 21:9에 보면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기억하면서 그와 같이 오늘날에도 육체를 따라 난 자들이 성령을 따라 난 자들을 핍박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을 비롯하여 육에 따라 난 사탄의 역사가 성령의 아들들을 핍박한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진리가 비진리에게 고통당하는 것은 당연한 일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저는 성경적인 진리를 강조해 나가다 보면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하는 희롱을 가끔 받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교회가 진리라면 그렇게 발전이 없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말은 진리가 아닙니다. 소수는 늘 진리라는 말은 맞지 않아도 진리가 소수일 수 있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따르는 것이 진리이지 다수가 진리일 것이라는 말은 틀린 말임에 틀림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은 성경은 어떻든지 사람의 많고 적음으로 진리와 비진리를 구별하려고 하기 때문에 종말에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심판이 있는 것입니다. 대다수의 군중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를 지른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을 그렇게도 잘 지켰던 자였으나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는 율법에서 해방되어 복음 안에 들어왔고 그 자유의 복음을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전했는데 유대주의 자들인 이스마엘과 같은 존재들이 복음만을 전하는 사도 바울을 헐뜯어 비난하는 핍박을 당했던 것입니다. 늘 비 진리는 진리의 수호자들을 경멸하고 핍박한다는 진리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3]세 번째로 30절과 31절의 유업을 함께 받지 못하는 계집종의 자녀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한 일로 결국 하갈과 이스마엘은 쫓겨나게 된 것입니다. 즉 결과적으로 이스마엘은 이삭과 함께 상속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이 박탈당했음을 강조하면서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율법에 비유하여 율법은 여종과 같아서 율법을 지키는 여종의 자녀들은 복음을 받아드린 약속의 자녀들과 함께 천국을 상속하지 못할 것임을 단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복음을 받아드린 자들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자유하는 사라의 아들 이삭과 같아서 새 예루살렘을 유업으로 받는 상속자들이라고 격려해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오늘 본문을 통해 어떤 교훈을 받았으며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첫째 우리들은 은혜로 약속의 자녀가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우리의 직무를 최선을 다해 수행해야 하겠습니다. 어떤 인간도 모든 율법을 다 지켜서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어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사라가 자기 힘으로는 아이를 가질 수 없으므로 하나님의 힘으로 약속의 아들을 가짐같이 우리들도 우리들의 힘으로는 의로와 질 수 없으므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될 수 있는 길을 내리셨기 때문에 그 은혜를 받은 우리들은 하나님께 감사하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면 이 진리를 받지 못하고 계속 내 선한 행위로 구원을 얻어보려고 얼마나 헛수고를 했겠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 하나님의 은혜로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갈 수 있게된 것에 진심으로 감사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합니다.

 

다만 은혜로 구원을 얻었으므로 행함은 전연 필요 없다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은혜로 구원을 얻은 우리는 그 은혜가 감사하여 성도로서 마땅히 행할 선을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말에도 행위에도 선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율법을 지켜도 구원될 수 없었던 인간들에게 율법의 속박에서 해방 시켜주시고 복음을 받아드린 믿음으로 구원될 수 있도록 입혀주신 은혜를 감사하고 감사하여 선한 행함이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약속의 자녀가 다 되자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두 자녀가 있되 유업을 받을 자녀도 있고 유업을 받지 못하는 자녀가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누가 유업을 받을 자가 되겠습니까? 육체를 따라 난 자들이 아니라 약속에 따라 난 자녀라고 했습니다. 육을 따라 난 자녀란 자기의 힘으로, 자기 지식으로 자기 의견으로, 자기 고집으로 사는 자녀입니다. 그럼 누가 약속의 자녀일까요? 누구든지 자기의 힘을 버리고 하나님의 힘을 의지하고자 하는 자이며 누구든지 사람의 의견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여야 합니다. 좋은 믿음을 가졌다는 말이나 좋은 교회라는 말은 마땅히 사람의 생각은 다 뽑아내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더 좋은 신앙이란 말이나 더 좋은 교회라는 말은 얼마나 사람의 의견이 얼마나 뽑아졌고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이 그 사람과 그 교회를 지배하고 있느냐로 판정되어야 할 것입니다. 지난 수요일에 사무엘 상 15장을 했습니다. 좋은 믿음이란 순종임을 배웠습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낳고 말씀 따르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순종하므로 약속의 자녀가 되며 약속의 자녀가 되므로 유업을 받는 우리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교회 모든 성도들이 말씀을 열심히 공부하여 하나님의 뜻을 찾고 그 뜻대로 살아서 모두 새 하늘과 새 땅을 유업으로 받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