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와 방종 – 갈라디아서 5:13-18

민주주의의 꽃은 자유입니다. 그런데 자유란 무엇이든 내가 원하는 것을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인 줄 알았는데 자유라는 것에도 한계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술을 마음대로 마실 수 있을 지 모르나 술을 마시고 운전하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왜? 내 자유가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을 금하기 위해서입니다. 담배를 피우는 것은 자유이지만 사람들이 있는 장소에서 담배를 피우므로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법적으로 막고 있는 것입니다. 자유의 국가에서 자유를 잘 못 사용하여 법에 걸리면 자유를 빼앗기고 구속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자유를 멋대로 사용하는 것을 방종이라고 하는데 오늘 본문의 설교 제목은 자유와 방종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주님께서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되는 자유를 주셨는데 이 자유란 어떤 것이며 그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을 교훈 해주고 있습니다. 즉 지금까지는 율법과 자유에 대한 이론 편을 정리해주었고 오늘부터는 실제적인 삶에 적용될 실천 편을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율법의 얽매임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은 성도들도 그리스도께서 주신 자유의 참 뜻을 오해하면 방종의 삶을 살게 되어 결과적으로는 참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또 그 무엇에 얽매여 사는 삶을 살게 될 것임으로 오늘 본문에서는 자유의 삶과 방종의 삶을 소개하면서 자유의 삶을 안내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본문의 뜻을 이해하고 본문이 주는 교훈을 찾으며,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 생활에서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는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13-15) [2]성령을 좇아 행하라(16-18)입니다.

 

[1] 13절부터 15절까지의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에 대해 먼저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신앙의 자유라는 단어의 깊은 뜻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닙니다. 많은 율법 조항에서 우리를 해방시켜주었으니 이제는 아무 것에도 매이지 않아 내가 내 마음 내키는 대로 신앙 생활을 하면 된다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율법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를 얻은 사실을 그렇게도 여러 차례, 또 여러 비유를 들어 강조했던 사도 바울은 율법에서 해방된 성도들에게 종노릇을 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무슨 종노릇입니까?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자유를 주시려고 그리스도 안에서 불리움을 받은 것은 사실이나 그 자유가 잘못 해석되어 육체의 욕심에 따라 육체의 욕심대로 살아나가는 육체의 자유의 기회로 삼지 말고 이웃을 서로 섬기고 사랑하는 종이 되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얽매임에서 자유를 주신 것은 아무 것에도 메이지 않고 작은 그리스도의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작은 그리스도의 삶이란 무엇일까요? 그리스도가 살았던 사랑과 희생과 봉사와 순종의 십자가를 지면서 살라는 것입니다. 어두움에 빛을 비추신 주님과 같이 우리들의 작은 빛을 비추어 어두움을 밝히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있는 곳에 자유와 평화가 있듯이 우리들의 삶의 주변에 역시 평화와 자유가 있도록 우리들의 빛을 비추라는 것입니다.

 

많은 율법 조항이 있는데 우리의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함으로 모든 율법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십계명의 앞부분 넷은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고 뒷부분 여섯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입니다. 십계명이란 온 율법을 요약한 것이라고 했는데 또 십계명을 요약하자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로 요약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예수님께 누가 묻기를 율법중 어떤 계명이 가장 크냐고 물었을 때에 주님께서 대답하시기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첫째요 둘째는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대답을 하셨음을 우리들은 잘 압니다. 그런 의미에서 반대로 서로 물고 뜯으면 사로 상하고 망하게 되어 율법을 어긴 것이며 자유를 버리고 얽매임의 삶을 사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을 율법의 매임에서 해방 시켜 주셨다고 했는데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란 우리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우리의 이웃을 사랑함으로 참 자유를 누리는 것이지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으로는 참 자유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 13장에서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투기하지 않으며, 자랑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으며, 무례히 행하지 않고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으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으며, 불의를 기뻐하지 않으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딘다고 했습니다. 즉 이런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은 모든 얽매임에서 해방되어 참 자유를 누리는 자가 된다는 말인 것입니다. 반대로 아무리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우리들에게 자유를 주셨다 할지라도 우리 속에 미움과 시기가 있고, 온유하지 못하고 성질을 잘 내며, 이기적이고 악한 일을 좋아하며, 참지 못하고 소망하지 못한다고 한다면 그 사람의 마음은 늘 불안하고 무엇에 매어 있는 불행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참 자유란 모든 일에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는 것이란 결론이 내려지는 것입니다.

 

[2]두 번째로는 16절부터 18절까지의 성령을 좇아 행하라 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지금까지의 갈라디아서 강해에서는 율법은 이스마엘과 같은 육체를 따라 얻은 아들에 비유되며, 은혜는 이삭과 같은 약속을 따라 난 영의 아들에 비유된다고 했는데 오늘 본문에서는 만일 사람이 육체의 욕심대로 하지 않고 성령의 욕심에 따라 사는 사람은 율법아래 있지 아니한다고 하면서 성도들은 마땅히 성령을 따라 행하라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바로 앞부분에서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므로 참 자유를 누리도록 권면하였는데 사랑으로 종노릇하기 위해서는 성령을 따라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의 마음에는 두 가지의 생각과 욕심이 있습니다. 하나는 육체의 생각과 육체의 욕심, 다른 하나는 영의 생각과 영의 욕심입니다. 그런데 육의 생각과 영의 생각은 서로 거슬려서 영의 욕심은 육의 욕심을 이루지 못하게 하고 육의 욕심은 영의 욕심을 이루지 못하게 서로 싸운다고 했습니다. 영의 욕심은 온유하며 진리를 사랑하며, 남을 위해 일하게 하고, 모든 것을 참고 모든 것을 소망하며 모든 것을 믿게 하는 것이고 육의 욕심은 미워하고 시기 질투를 하게 하며 이기적이고 남에게 무례한 행동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도 두 마음이 있는데 때로는 영의 생각이 육의 생각을 이기면 자유를 누리게 되나 어떤 때는 육의 생각이 영의 생각을 이기면 마음에 평화가 없어서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율법 아래에 있을 때와 같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적은 일에도 화를 내고 남의 적은 실수도 용납이 되지 않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 때는 바로 성령의 힘이 약하고 육의 힘이 더 강할 때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남이 내게 큰 실수를 했는데도 용서가 가능하고, 참을 수 없는 일에도 참아지는 때가 있을 것입니다. 욕을 퍼부어 주려다가도 참을 때가 있습니다. 바로 그 때는 성령의 힘이 육의 힘보다도 더 강할 때입니다. 자기 아들을 죽인 원수를 사랑할 수 있으려면, 또 배신자를 사랑할 수 있으려면 얼마만한 성령의 힘이 필요하겠습니까? 왜냐하면 육의 욕심은 원수를 꼭 죽여야 한다고 할 것이고 도저히 배신자는 그대로 두면 안 된다고 할 터이니 말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성령을 따라 행하여 율법을 이루라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오늘 주신 본문을 통해 어떤 교훈을 받았으며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는 교훈입니다. 기독교란 그리스도가 가신 길을 따라가는 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역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그리스도를 본받아 그가 가신 모범적인 길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만일 기독교나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가 가신 길을 따라가지 못한다고 한다면 그리스도가 주신 참 자유와 평화를 누리지 못하고 수박 겉 핥기의 신앙 생활이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일생은 사리 사욕을 온전히 버리고 사랑과 봉사와 희생과 순종의 삶이었음을 우리 모두가 인정한다면 기독교와 기독교인들은 그가 모범을 보이신 대로 사리 사욕을 버리고 사랑과 봉사와 희생과 순종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현대 교회가 왜? 시끄럽습니까? 어떤 일로 비난하고 심지어는 세상 사람의 심판을 받고자 재판까지 하고 있는 것입니까? 서로 사랑으로 종노릇하려고 하는데 이를 못하게 방해하기 때문입니까? 불행하게도 그런 사건은 찾아볼 수도 없고 서로 남을 깔보고 남의 약점을 들추며, 자기를 인정해주지 않고 대접해 주지 않기 때문에 시끄럽다는 사실입니다. 자기들의 예배를 통해 영광을 받으시라고 하면서도 마음속에는 육의 마음인 미움과 시기와 교만과 이기심이 가득 찼으니 그런 것을 통해 어떻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겠습니까? 소란을 피우는 자들도 자기 나름대로의 많은 이유와 변명이 있겠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서로 사랑으로 종노릇하라고 하십니다. 지금까지는 어떤 삶을 살았던지 간에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여야 하겠습니다. 때로는 이것을 행할 때에 내 마음속에 있는 육의 생각이 그럴 필요가 있느냐고? 그런 사람은 그런 대접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말을 할지도 모릅니다. 그 때마다 나 같은 죄인을 받아주신 예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용서 못할 사람이 없을 것이며 사랑으로 종노릇한 것은 내가 주님께 진 빚 때문이므로 겸손한 마음으로 종노릇이 가능하리라 봅니다.

 

성령의 힘이 육의 힘을 이겨 늘 사랑으로 종노릇할 수 있도록 성령의 힘을 늘 강하게 소유하므로 종노릇이 가능합니다. 지금 우리들 각자가 자신을 저울로 달아본다면 영의 욕심이 더 무겁다고 생각이 되십니까? 육의 욕심이 더 무겁다고 생각되십니까? 날마다 자신을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지금 나는 성령이 육을 이기고 있는가? 아니면 육이 성령을 이기고 있는가를 살펴보고 만일 성령의 힘이 약하게 생각되어지면 성령의 힘을 키워야 합니다. 성령의 힘을 키우기 위해 우리들은 말씀을 늘 상고하고 늘 기도하며 찬송하는 삶을 지속해나가야 합니다.

 

우리 교회 모든 성도들은 삶의 목표가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는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사는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