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 박사들이 아기께 경배함 – 마태복음 2:1-11

오늘 설교 제목은 동방 박사들이 아기께 경배함입니다. 제목만 보아서는 유치부나 유년반에 가서 전해야할 사람이 교실을 잘못 찾아온 것은 아닌가 생각할 수 있는 제목입니다. 계절이 눈이 오는 때가 아니고 제일 더운 여름철에 주님의 나심, 성탄 이야기를 해야 하므로 실감이 나지 않으실 것 같으니 다같이 탄일 찬송 116장의 1절 후렴 전까지만 함께 불러보도록 하겠습니다. 찬송 제목이 동방 박사 세 사람입니다.

마태복음 본문과 같은 내용이 누가 복음에는 좀 달리 표현되어 있습니다. 누가 복음에는 동방 박사들에 대한 기록이 없으며 그러므로 별에 대한 이야기가 없고 그 대신 양치는 목자들이 천사로부터 아기 예수의 탄생을 전해 듣고 찾아가 보니 천사의 말대로 말구유에 강보로 싸여 누워 있는 아기 예수를 보았고 천사가 이 아이는 구주라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그들이 천사로부터 들은 이야기들을 전해 주었으며 목자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갔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정도로 누가 복음에 기록된 것을 알고 오늘 우리에게 주신 본문을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을 2부분으로 나누어 본문의 뜻을 이해하고 그 본문이 주는 교훈을 찾으며 그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는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헤롯 왕

[2]박사들입니다.

 

[1]먼저 헤롯왕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헤롯 왕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 그의 잔인성과 그의 위선적 신앙으로 나누어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먼저 그의 잔인성입니다. 2장 1절에 나타나는 헤롯왕은 헤롯대왕을 말하는 것으로 유대가 로마의 통치를 받고 있을 때, 로마 황제에 의해 유대왕으로 BC 37년 – AD 40년까지 장기간 통치한 왕으로 70세에 병으로 시달리다 죽었다고 합니다. 그는 피 흘리는 폭군으로 10명의 아내와 15명의 자녀가 있었는데, 자기의 두 번째 아내와 함께 두 아들을 죽일 수 있었던 잔인한 왕이 있으며, 자기 아들을 죽인 5일 후에 본인도 죽었다고 합니다.

헤롯은 유대의 정통 가문이 아닌 에서의 후손의 에돔 사람의 혈통에서 난 자로, 예수님이 태어났을 때 베들레헴과 모든 지역에 있는 2살 미만의 사내아이들을 죽였던 잔인성을 보여줍니다. 그가 죽었을 때 어떤 유대 백성도 그의 자손도 그의 죽음을 슬퍼한 자가 없었다고 합니다. 로마 정부에 잘 보이며 왕좌 지키려고 과중한 세금, 건축 사역에 백성 동원하며 고된 일을 어떻게나 시켰던지 비난을 면치 못했다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하나 남는 것은 예루살렘 성전(제국 성전)을 재건한 역사적 사건이기도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는 정권을 위해 피 흘림과 악정을 거듭하였을 뿐입니다.

본문에서 헤롯의 때라고 말이 나온 것은 첫째는 이런 험악한 사회 분위기를 말해 주기 위함이요, 또 시기로는 주님이 헤롯대왕이 죽기 전에 태어나셨으므로 B.C 4년 초반이니 B.C 5년 후반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즉, 밤이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새벽이 가까워 오듯이 세상이 악할 때로 악하고, 부패할 때로 부패한 한 이때에 꼭 오셔야 할 메시야가 오신 것입니다.

두 번째로 그의 위선적 신앙을 살펴보겠습니다.

4절에 보면 박사들이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라는 질문을 받고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소동하였다고 했으며, 박사들에게 부탁하여 유대의 왕 아기 예수를 찾거든 내게 알려줘 나도 가서 경배하게 해 달라고 거짓말을 함을 보게 됩니다.

온 유대인들은 대대로 메시야가 오기를, 유대인의 왕으로 오실 구세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유대인의 왕이 베들레헴에 오셨는데도 몰랐을 뿐 아니라, 왕이 낳다하니 소동이 났습니다. 왕이 볼 때에는 새 왕이 탄생했으니 정권 교체가 되겠고, 왕 밑에서 밥벌이 하고있는 자들이 볼 때는 실직 당하겠고, 백성들이 볼 때는 부패된 이 사회 그대로 있어야 살기 쉬울 것 같아서 어떤 새로운 개혁도 바라지 않은 상태였던지라 갑작스럽게 왕이 나셨으니 소동이 일어날 수밖에 없고, 아기 예수를 죽이려는 음모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도 가서 경배하겠다는 위선 신앙심을 보인 것입니다. 겉포장은 그럴듯한 위장된 신앙입니다.

여기에서 눈 여겨 볼 것은 그 당시 종교 지도자 등이 헤롯왕의 그리스도가 어디에 나시겠느냐고 질문에 구약 예언서 미가 5장 2절을 인용하여 분명히 베들레헴에 나실 것을 알려 주었으면서도 자기는 찾아가지 아니하고 박사들에게 찾으면 알려달라는 소극적이며 위선적 신앙을 보게됩니다. 만나보고 싶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이려는 음모를 가지고 있었던 그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그 시대의 왕이 종교 지도자나 국민들이 오기를 바라던 바라지 않던 만 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예언대로 작은 고을 베들레헴에 나신 것입니다. 베들레헴은 떡집이라는 말로 다윗의 고향, 다윗이 살았던 마을이며, 생명의 떡 되신 구주가 영적 떡을 먹이실 주님이 탄생하신 것입니다.

 

[2]박사들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 동방으로부터 온 박사들이란 유대백성이 아닌 이방인들이며, 어느 나라인지 확실치는 않으나 페르시아, 바벨론, 메데, 아라비아 등 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중 유대인들이 포로로 잡혀가서 메시야의 오심에 대해 알게 해줬던 바벨론이 아닐까도 생각합니다. 어떻든 동방이란 이방 나라이며, 박사란 희랍어로 ‘마고이’인데 철학자, 천문학자, 과학자, 의학자를 칭하는 말이 됩니다.

본문에 몇 명의 박사들이 찾아왔다고 했지요? 3명이 아니라 몇 명인지 모릅니다. 동방 박사 세 사람은 맞는 숫자는 아닙니다. 박사들이라 했으므로 몇 명인지 몇 나라에서 왔는지 알 수 없습니다.

두 번째, 별을 보고 별을 따라 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경배하러 왔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갖고 있는 지식은 그들이 갖고 있는 신앙은 특별한 별이 나타난다는 것이고, 그 별이 곧 유대인의 왕이 나심의 징조로 알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조금 들었던 예언의 말씀을 그대로 믿었던 순수함을 보게 됩니다. 여기의 별은 보통 별이 아니라 초자연적인 별이었다고 봅니다. 그들은 그 별을 따라서 예루살렘까지 왔고, 아마 예루살렘까지 나타났던 별이 보이지 않다가 헤롯왕으로부터 베들레헴에 가보라는 말을 듣고 나올 때, 별이 다시 나타나 그 별의 인도에 따라 가서 아기가 있는 집에까지 갈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별을 따라 찾아온 목적 자체가 이방인인데도 메시아께 경배 드리기 위해 멀리서 왔으며, 아기 예수께 엎드려 경배하고 자기들이 가져온 예물 황금, 유향, 몰약을 예물로 드린 것입니다. 여기는 말구유가 아니고 집에 있는 아이라 했으니 시기적으로 며칠 지나 방을 얻은 후여야 한다고 봅니다.

세 번째, 박사들의 질문입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율법 지키기를 좋아하고 선지서를 통독하고, 택한 백성인 그들에게 메시아가 나타나서 자기들을 일등 국민으로 만들어 줄 것으로 믿고 자만하고 자랑했던 유대인들은 이미 나신 메시아에 무관심하고 있었는데, 이방인들이 메시아를 찾아 경배코자 질문한 이 질문은 유대인들에게 주는 큰 충격이며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베들레헴은 예루살렘 남쪽으로 약 8㎞정도 된다고 합니다. 자기 가까운 마을에 메시아가 나셨는데도 아무도 모르나 먼 나라에서는 알고 찾아온 기막힌 사건입니다. 이방인도 죄인도 주 예수를 믿는 자가 천국 백성이며, 아브라함이나 다윗의 자손도 불신자는 천국의 약속과 무관하다는 것을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본문을 통해 우리가 받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첫째, 진실로 주님 만나기 원하는 자에게는 아무리 비천한 자에게도 나타나시며, 길을 열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정말 주님 만나 죄용서 함을 받기 원하는 자에게 죄용서 함을 주시고, 평안을 바라는 자에게 평강으로 채워주시며, 위로함이 필요한 자에게는 위로를 주시는 하나님이 시다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만나기 원하는 자에게 만나주시고, 보호받기 원하는 자에게 피난처가 되어 주신다고 확신합니다. 초자연적인 별이 나타나 별을 따라가므로 주님 만나게 하신 하나님께서도, 우리 모두에게도 똑같은 사랑으로 나타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예수님과 함께 식사를 한 제자라도 아니 성경을 가르치며 밥을 먹고 있는 교회 지도자이거나 주님 위해 수고의 땀을 흘리는 희생자들이 있다 할지라도 주님의 말씀에 순종치 않으며 주님이 바라시는 길을 걷지 아니하고, 진심으로 주님 만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주님은 그 마음에 들어와 주시지 않으며 만나 주시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둘째, 주님을 찾는 이유는 경배하기 위해서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으로부터 시작하여 현재에 이르기까지 주님을 찾는 이유가 여러 가지 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유는 순수하여 동방의 박사들 같이 무릎을 꿇어 예배드리는 것이며, 자기 가진 것 귀한 것을 드리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 예배드리기 위해 멀리서 달려오는 신앙, 가장 귀한 것은 주님께 바치는 신앙 이것이 바른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한 이유로 주님 찾는 것은 입술로만 찾는 것이요, 성경 지식으로 찾는 것이요, 내 욕심 이루려 찾는 것이며, 이런 사람들은 진정 주님이 나타나시면 돌아서서 도망치는 자가 될 것이며, 때로는 십자가에 못 박는 자가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정말 만나면 내 정권 야욕도 버려야하고, 내 돈벌이, 내 명예, 내 옛 나쁜 습관 다 버려야하기 때문입니다. 글자 그대로 대 개혁을 해야 하므로 개혁을 바랄 자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천국에 못 가더라도 현재 이 상태로 있다가 죽겠다고들 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 피하는 길은 내게 개혁이 없는 길이여서 영원히 죽는 길이요, 주님 만나는 길은 지금 죽을 것 같으나 영원히 사는 길입니다.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베들레헴에 나신 예수를 모르고 찾아가지 못한 것은 축복을 버린 것이요, 먼 나라 동방에서 별을 따라 찾고 찾아와 아기 예수를 만나는 자들은 축복을 택한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동방의 박사들이 헤롯왕께나 요셉이나 마리아께 경배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강보에 싸여있는 어린아이에게만 성경 말씀을 믿고 그가 구세주임을 믿고 경배하고 예물을 드릴 수 있는 신앙은 참된 신앙인 것입니다. 아기께 드리는 경배, 믿음으로 드린 경배이며, 순수한 경배입니다. 반면에 로마 정권에 경배하고, 헤롯 대왕께 경배를 일삼았던 종교지도자들에게나 백성들은 거짓된 신앙인 것입니다. 피의 권세를 가졌던 헤롯은 죽었으나, 구유에 아이로 태어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는 사시어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동방 박사가 찾듯 우리도 내 욕심과 상관없이 나를 드리는 아기 예수를 만나 그에게 꿇어 엎드리며, 그와 상담하여 그의 지시에 따라 살아가므로 위로 받고 감사와 평안 얻으며 하나님과의 소망을 얻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