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에 관한 교훈 – 마태복음 5:21-26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다는 주님께서 구체적 예증을 들어가면서 본래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실 때의 본 뜻에서 많이 벗어난 율법의 시행을 바로 잡아주게 됩니다.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 즉 종교지도자들은 율법을 읽고 해석하고 있는 자리에 있었으나, 그 이와의 보통 사람들을 스스로 율법을 읽을 수 있는 지식이나 환경이 되지 못했으므로, 하나님의 율법을 귀로 듣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들이 들었던 것은 종교 지도자들을 통해 해석된 율법 또 말로 전해 내려온 구전, 또 전통에 대해 들었던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하나님이 율법에 의도하사 본 뜻과는 상당히 거리가 먼 아니 어떤 것은 정반대의 뜻으로 전달되어질 수도 있었던 불행한 시기였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실은 예수님 이후 1500년이 지난 종교 개혁이 있기 전만 해도, 카톨릭에서는 신부들이 성경을 읽되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인 라틴어로 읽어주던 습관이 있어서 이해할 수도 없는 성경을 들었으며, 물론 평신도는 성경을 읽을 수 있는 권리를 빼앗아 버리므로 죽은 선조들의 영혼이 구원받도록 면죄부를 팔기까지 기독교는 성경 본래의 뜻과 정반대의 길을 걷게 되었던 것을 생각하며 기독교의 암흑시대 즉 성경을 직접 읽을 수 없는 자들의 불행을 생각해 봅니다.

종교개혁 이후 지금 이 세대에도 교파의 전통과 설교자의 편견, 또 취향에 따라 건전하지 않는 것들을 들려주고 있음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파, 진통, 조직의 권위가 성경 위에 존재하고 있는 현실이므로 스스로 읽어본 주님의 말씀보다는 귀로 들었던 교회 지도자들의 가르침이 우리의 신앙을 좌지우지하고 있는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QT를 강조 받고있는 우리 교회 교인들은 너무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 교회에 찾아오시어, 우리들이 잘못 알고 있는 것들을 하나하나 지적해 주시며, 성경의 본 뜻으로 바로 잡아주시고, 그대로 실천하여 영원히 천국에서 살도록 안내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바로 실천하지 못한 이유로 주님의 가르치심이 좀 부담스럽게 느껴지더라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깊이 깨닫고 오늘 주어지는 말씀을 마음 문을 열고 받아드려, 각자에게 생의 말씀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의 주제는 살인에 관한 교훈입니다.

주님께서는 잘못된 지식을 바로 잡아주기 위해 설명을 전개해 나갈 때 똑 같은 어법을 써 가시면서 가르쳐 주시고 있습니다. “너희가 들었으나” 와 “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입니다. 옛 사람에게 말한바 또는 “너희가 들었으나”는 잘못된 지식을 말하고, 바른 지식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로 시작된 부분이 되는 것입니다. 율법 학자들이나 전통은 사람을 죽인 자는 살인자로서 심판을 받게 된다고 하였으나 나는 이것을 너희에게 바로 잡아 주노니, 누구든지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된다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사람을 직접 죽이지 않았다 하더라도 사람을 미워하고 욕하고 저주한다면 결국 그 사람을 죽인 것과 똑 같다는 것이 주님의 해석입니다. 세상 법으로야 심판받지 않겠지만 하나님의 법으로는 사람을 죽인 자나 화내고, 욕하고, 저주한 모두 똑같은 살인제목으로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노하는 자마다, 화내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된다고 했는데 왜? 그럴까요? 화는, 미워함은 살인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미워하여 화를 내고 나면 평소에 할 수 없는 더러운 욕설이 나오고, 욕설이 시작되면 입으로 그 사람에게 있었던 일, 없었던 일을 과장해서 폭로하며 인격과 품위를 완전히 떨어뜨려 인간을 매장에 버리는 저주 섞인 말이 쏟아져 나오고, 또 못 참아 죽여 버리는 결과까지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미움, 화는 그 사람의 인격을 죽이고, 생명을 죽이므로 미움이나 살인을 같은 죄목으로 보시는 것 같습니다. 미련한 놈, 병신 같은 놈, 모자란 놈이라고 미워서 하는 욕설, 어디 가서 죽어 버려라, 아니 왜 저런 놈은 귀신이 잡아가지 않는다고 저주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중동전쟁 때, 사담 후세인을 잡아 죽였다면 대부분의 기독교인들도 속 시원했을 것입니다. 또 총을 난사하고, 사회를 너무 불안하게 했던 자가 잡히면서 T.V 화면에 나오면 여러분은 무슨 감정이 튀어나옵니까? 저런 놈들을 총으로 “빵” 쏴 죽여버려야 한다 그것도 양이 차지 않아 팔도강산을 끌고 다니다가 죽이면 정말 그제야 속이 시원하다고 할지 모릅니다. 간음한 적이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주님의 기준에 의한다면, 현 세상에서는 그렇게 죽여야 한다고 말한 자는 결백하고 훌륭한 사람 같고, 사담 후세인 같은 사람과 살인강도는 너무 흉악한 자로 너무나도 쉽게 구별되지만, 주님의 심판 때는 사담 후세인이나 살인강도나 마땅히 그들을 죽이라고 죽여야 한다고 미움을 보였던 자들이나 같은 죄인이 된다는 것이 주님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므로 미워하지 말고, 화내지 말고, 욕하지 말고, 저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우리의 모습을 파괴해 버리고 마귀의 형상으로 바꾸어버린 결과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 성도들끼리 불화가 있다면, 먼저 급히 사과하고, 그 다음에 예배드리러 가란 말입니다. 미움가지고, 불화한 상태에서 예배드리면 그 예배를 받아주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회인과의 불화에서도 빨리 문제를 풀어서 재판에까지 가지 아니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본문의 초점은 수직으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다 고백하고, 용서함 받아 하나님과 화해된 화목된 관계를 갖고, 또 수평으로는 이웃과의 관계에 있어서 자가 잘못을 용서받고, 또 이웃의 죄를 용서해주므로 어떤 미움도, 욕설도, 저주도, 마음속에 입에 있지 아니한 화목된 관계를 유지하라는 것입니다.

요일 4:20-21에 보면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받았으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해야할 특권을 주셨으나 형제를 미워하고 죽여야 할 책임은 받지 아니했다는 사실입니다.

사 1:15에 보면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고 하므로 우리의 열심이 있는 봉사와 큰 액수의 헌금과 큰 목소리의 찬송과 기도도 이웃을 미워하고 불화한 상태에서는 받아 주시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형제와의 화목, 미워하는 마음의 회개는 예배드리러 오는 일보다 먼저 있어야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아니라 진심으로 사과하고 용서하고, 화목하는 것을 전재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주신 본래의 목적은 미움이나 살인 같은 죄목을 가진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으로 요일 3:15에도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본문을 통해 우리 생활에 적용할 어떤 교훈을 받게 됩니까?

 

본문을 통해 우리는 무엇이 살인인지 분명히 알게되며, 살인자는 심판을 받아 영영한 불에 던지워지게됨을 배우게 됩니다.

성경을 가까이 대하는 우리들에게도 살인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우리의 지식으로 남아 있을 수 있는데, 오늘도 분명히 해결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나라마다 개인마다 살인에 대한 이해가 다르나 살인이란 주님의 말씀에 따라 판정됩니다.

모세가 애국심을 발휘하여 애굽 사람과 유대 사람이 싸울 때 유대 편을 들어 애굽 사람을 죽였는데, 위대한 지도자가 한 일이라도 이것은 살인으로 간주될 것이니, 이것은 죽일 이유까지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죽였는데 하나님을 욕하는 골리앗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싸웠고, 하나님께서 그의 손에 부치셨으므로 이것은 살인으로 간주되지 않고 글자 그대로 성전의 승리였으며, 사담 후세인이 아니 그 이상의 악질이 있어도 그를 죽이거나 죽여야 한다고 미움을 앞세우는 것은 살인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이유로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살인이요, 살인 음모도 살인이며, 살인 미도 살인이요, 사람을 미워하고, 매장시키려고 그 사람의 생명이나 다름없는 명예, 인격, 품위를 파손하는 그 어떤 언행도 똑 같이 살인으로 간주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 모두는 체포되지 않은 살인자들이라고 이름을 붙여도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쉽게 미워하고, 파당짓고, 인격을 짓밟고, 어떻게든지 나의 정적을 죽여 버리려는 숨은 생각을 잘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총든 살인 강도만 살인자로 무서워하고 있으나 찬송하는 모습이나, 기도하는 모습의 큰 액수의 헌금을 손에든 성도 같은 살인자나 얼마든지 있을 수 있음을 주님의 지적을 통해 깨닫게 됩니다. 그렇다면 살인자들이 어디에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까? 교회당 안에, 가정 안에, 학교 안에, 직장 안에, 사회단체 안에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들더러 총 가지고 칼 가지고 사람을 죽여서는 아니 된다고 가르치기 위해서 본문이 주어진 것이 아니라, 마음에 품은 미워하는 마음이 자라서 화를 내고 화를 내므로 더러운 욕설 저주가 나오게 되므로 마음에 미움을 품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음에 품은 미움은 가슴에 품은 칼과 같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지금 미운 감정이 있습니까? 회개하시고, 사랑의 감정으로 이 시간에 바꾸라는 것입니다.

누가 나에게 큰 실수하게 잘못을 기억하며 가슴에 맺혀 있는 것이 있습니까? 이 시간에 용서하시고 평안한 마음으로 회복하시라는 말씀입니다.

누구에게 잘못한 것이 있습니까? 미루지 마시고 내가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어둡고 악하다 하더라도 우리 성도들은 말씀대로 산다면 최소한 내 가정은 내 직장은 내 교회는 늘 사랑과 평강이 넘쳐서 살맛이 나지 않겠습니까? 미워하는 자, 미련한 놈이라 욕하는 자는 영생을 얻지 못하고 지옥 불에 들어간다는 말씀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두려움 갖고 각자의 마음을 다스려 죄 짓는 자리에 들어가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마음으로 미워하는 것이 살인임을 많이 들었을 줄 압니다. 알면서 죄지으면 용서받기 어렵습니다. 미워하는 감정을 주님의 사랑으로 내 마음에서 쫓아내는 훈련이 절대 필요합니다. 미워하면 내 얼굴과 내 마음과 내 영이 찌그러져 결국 나에게 심각한 손해를 가져다줍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자는 이 교훈의 참뜻을 이해할 것이며, 역시 실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 힘입어 미움을 정복하고 사랑과 화평의 열매 맺는 성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