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음하지 말라 – 마태복음 5:27-30

지난주에는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의 본 뜻을 주님을 통해 확인했습니다. 사람을 꼭 죽이지 않았더라도 마음으로 미워하고, 그 사람의 인격과 명예를 훼손하는 욕설이나 저주도 살인죄에 해당되는 것이라는 경고를 우리가 받았던 것입니다.

그 설교 듣고 한 주간 삶을 통해 미워하는 마음, 또 화내는 마음, 욕설을 하고자 하는 마음을 얼마나 억제하느라 노력하면서 살으셨는지 궁금합니다. 오늘 설교 내용에 들어가기 전에 강조하고 싶은 것은 매 주일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경고를 경솔히 하지 말고 듣는 바를 실천기 위해 심히 노력하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 주님께서 주시는 교훈은 간음하지 말라는 교훈입니다.

구약 성경을 읽어본 사람마다 많이 혼동되는 것이 1부 1처제의 결혼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구약의 유명한 인물들이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결혼관을 벗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부터 아내 말고 다른 여자가 즉 하갈이 있었으며, 이스라엘 12지파가 누구의 아들이지요? 야곱이지요. 그는 여러 부인을 통해 이 12명의 아들을 낳았습니다. 솔로몬은 몇 여자나 거느렸겠어요? 왕상11:3을 보면 1000명을 거느렸다고 나옵니다. 같은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로서는 구약 시대 인물들은 첩을 거느릴 수 있고, 우리는 못하게 되므로 많이 억울하게 생각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억울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그 대가로 너무 많은 피 비린내나는 싸움과 고통을 겪어야 했었던 그들의 역사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조상도 첩을 거느렸으니 집사 정도에게는 그것이 허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을 법하지요? 구약 성경 말고도 우리 나라 옛 어른들의 경우도 양반이요, 돈 많은 능력자들의 많은 첩들을 거느리고 자기의 능력을 과시했고, 그것을 부러워한 자들이 상당히 있었으리라 봅니다. 그러나 첩을 거느렸기 때문에 그 자손들끼리의 불화는 거느린 즐거움의 몇 배의 상처를 주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자란 우리들로서 결혼관이나, 간음이라는 바른 이해는 약간 혼동을 가져다주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들을 못 낳으면 아들 날 여자를 찾는 것은 너무 당연한 사회적 분위기에서 자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국 그로 인해 얼마나 큰 아픔과 비극이 뒤따르고 있습니까?

더욱 요사이는 고등학교 학생들에게 아예 성행위를 하더라도 AIDS같은 무서운 성병에 걸리지 않도록 콘돔을 사용하라고 학교에서 콘돔을 배부하는 지경까지 이르렀으니 심각한 때에 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AIDS라는 병만 걸리지 말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사회가 어떻고, 그 나라 법이 어떻든지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하나의 법으로 심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소돔과 고모라 성이 불로 멸망당했음을 알고 있는데, 그 당시 사회 분위기를 짐작해 보시기 바랍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너무 음란하다는 소문이 나서 하나님의 두 천사가 이를 확인 차 소돔 성에 이르러 롯의 집에 가게 되었습니다. 외부에서 사람이 온 것을 아는 소돔 사람들이 이 천사들을 끌어내어 음란한 짓, 즉 남자가 남자를 대하여 나쁜 짓을 하려고 롯의 집에 쳐들어와 소리소리 지르므로 롯이 그들을 무마하기 위해 자기 처녀 딸 둘을 내보내 줄 터이니 너희들 마음대로 하고 자기 집 손님들에게는 해코지하지 말라고 했으나 소돔 사람들이 이런 제안을 거절하고 오히려 험악하게 달려들 때,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을 어둡게 만들었던 사실을 기억합니다. 어떻게 자기 딸들을 무리들에게 내 놓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 사화가 그만큼 도덕적으로 부패하여 의식과 기준이 그 정도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불로 멸망시켰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심판의 기준은 사회 분위기가 아니라 뭐예요? 주님의 기준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들이 혹 혼동하고 있는 간음에 대한 분명히 해 주고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두 가지 간음죄를 지적하고 있는데

 

[1]육적 간음

[2]마음의 간음입니다.

 

[1]육적 간음입니다.

육적 간음이란 부부 이외의 육적인 성관계는 간음이라 하겠습니다. 자기 아내, 자기 남편 이외의 사람과의 음탕한 행위가 무엇이던 음행을 했다고 정의를 내릴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름다운 자기 부인 사라와 애굽에 이민을 갔을 때 자기 목숨이 무서워 자기 부인을 지기 여동생이라고 속였는데 정말 그런 줄 알고 애굽 바로 왕이 사라를 자기 첩으로 데리고 가고 그 대신 아브라함에 많은 예물을 준 일이 있습니다.

이 일로 하나님께서 바로 왕께 큰 재앙을 내려, 재앙을 보고 바로 왕이 깨달아 사라를 돌려보낸 일이 있습니다. 그 당시 사회야 어떻든 하나님은 이를 제일 미워하셨다는 것입니다. 결국 아브라함도 자기 아내를 간음하게 했으며, 바로 왕도 간음 자였다고 단정 할 수 있습니다.

롯의 아내는 어떻게 됐지요?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 기둥이 됐지요? 롯이 자기 두 딸과 함께 소돔에서 벗어났습니다. 두 딸이 남자가 있어야지요. 그러니 자손을 잇기 위해 아버지께 술을 마시게 하고 취하게 한 후 하룻밤씩 아버지와 동침하여, 두 딸이 아이들을 갖게 되었던 사실을 보게 됩니다. 그 아버지는 전연 술 때문에 몰랐지만 결과는 간음이요, 근친 상간이라 규정되어야 할 것입니다.

야곱의 12아들 중 유다 지파의 머리되는 유다는 자기 아들들이 차례로 죽고 며느리가 시아버지 눈치만 보고 있으나, 유다의 막내아들이 다 컸는데도 자기의 남편을 삼아주지 않아 대를 이를 자녀를 얻기 위해 시아버지가 여행한다는 소문을 듣고 창녀로 가장하고 시아버지가 지나가는 길거리에 나갔다가 시아버지와 동침하여 아이를 가졌습니다. 비록 시아버지가 며느리인줄 몰랐어도 창녀인줄 알고 여자와 지냈으니 유다는 성적 간음을 한 것이며 며느리는 자손을 얻기 위해 그랬다지만 이것도 간음임에 틀림없습니다.

유대 풍속은 자녀가 없다면 자기 친족 중 가장 가까운 친척의 대표와 동침하여, 자손을 갖게되는데, 우리가 잘 아는 룻이 남편이 죽고, 역시 이렇게 보아스라는 사람에게 들어가 다윗의 할아버지를 낳지만, 이것도 정식 남편, 정식 아내가 아니었으므로 유대 풍속이야 어떻든 이것도 간음이라 정의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그 나라 풍속으로는 아브라함이 첩을 거느린 일, 야곱, 다윗이 첩을 거느린 일이, 한국 풍속이 어떻든지 간에 1부 1처제가 아닌 1부 다 처제나 아니 한 여자에서 많은 남편을 거느리는 것을 간음죄라는 것입니다. 부부이외의 어떤 성적인 행위는 간음이라는 것입니다. 즉 아담과 하와에게 1부 1처제를 지정하신 하나님의 본래 취지에 어긋난다는 것입니다.

 

[2]마음의 간음입니다.

남자들에게는 한국 풍습이 유리하게 생각 듭니다. 남자는 바람 피워도 여자가 다른 남자와 차 한 잔 만해도 용납되지 않는 풍습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남자, 여자 구별 없이 비록 육적인 성행위가 없었다 하더라도 마음으로 음탕한 생각을 품었으면 역시 간음자라고 단정을 내리고 있습니다.

마음의 간음이란 음탕한 생각을 가지고 남자를 아니 여자를 처라 보았다면 이미 간음했다는 것입니다. 눈으로 보았기 때문에 마음이 음탕한 생각을 했던지 음탕한 마음이 있어 눈으로 보았던지 간음했다는 것입니다. 또 더러운 마음을 가지고 음탕한 대화를 나누는 것이 바로 또 간음이라는 것입니다. 또 음탕한 책이나 비디오나 음탕한 영화를 보며 음탕한 분위기에 들어가 있다면 간음이라는 것입니다. 음탕한 짓을 목적으로 쳐다보는 눈도 간음이요, 음탕한 생각을 꾸미는 마음도 간음이요, 발걸음으로 옮겨 음탕한 행위를 저지른 것을 물론 간음이라는 것입니다.

요셉이 형님들에게 팔려 애굽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서 있을 때,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욕심 내어 요셉을 유혹했으나, 요셉의 거절하므로 요셉은 누명을 뒤집어써서 감옥에 갇힌 일 일지요? 감옥에 들어간 요셉은 하나님 앞에 청결하고 보디발의 아내는 비록 자기의 계획이 실패했으나 간음했다는 결론입니다. 그러나 그의 남편은 그 여자가 간음죄를 진 줄 전연 모르는 일입니다.

간음하다 현장에 잡혀온 여인을 예수님 앞에 데려와서 이 여인이 간음하다 현장에서 집혔는데 어떻게 할까요? 했을 때 주님은 뭐라 했지요?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 했습니다. 즉 너희 중 비록 들통이 나지 않았을 뿐이지 너희도 다 간음죄를 진자가 아니냐? 라는 것입니다. 재수 없이 걸린 사람은 간음 죄인이요 걸리지 않은 사람은 자기는 깨끗하다고, 재수 없는 사람을 욕하고 손가락질을 한다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우리 교인 중 살인자 있으면 매우 천대받겠지요? 아니 어떤 남자와 어떤 여자와 간음한 사실이 들어 나면 교회 나올 수 있겠어요? 사람들이 죄인 시 하기 때문에 부끄러워서 교회에 못 나오시겠지요? 우리 사회는 그런 것을 전연 용납 못하는 풍조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주님은 혹시 우리 마음속에 여자를 보고, 남자를 보고, 음탕한 생각을 가지면 이미 간음죄를 지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난주의 미워하는 것이 곧 살인이라는 주제와 음욕을 품는 자체가 간음이라는 주제는 말씀 전하는 제가 가장 두려운 제목입니다. 누구보다도 이런 죄를 많이 지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가 정결하기 때문에 이것을 강조하며 전하는 것이 아니라 심히 약한 약자이지만 주님께서 약자들에게 이겨내라는 말씀이므로 그대로 내가 내게 전하고 또 성도들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통해 어떤 교훈을 받게 됩니까?

 

첫째, 자기 마음을 정결하게 갖도록 최선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사람 중에 세상 욕심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아름다운 여자를 보고 잘 생긴 미남을 보고, 욕심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욕심에 사로 잡혀 있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약점인 음탕한 생각에 사로 잡힐 수 있는 가능성을 아시고, 그런 욕심에서 해방되라는 것입니다. 눈은 되도록 피하고, 마음으로는 생각지 말고, 눈도 넘어졌고, 마음도 넘어졌으면 마지막 발로라도 도망쳐 보라는 간곡한 부탁입니다. 눈이 뭐라고 꼬셔도 마음더러 따라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음이 뭐라고 꼬셔도 눈더러 쳐다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눈과 마음이 뭐래도 발더러 공법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눈은 마음을 지키고, 마음은 눈을 지키며, 발은 눈과 마음을 지켜 자신을 음탕의 구렁텅이에 빠지지 않도록 잘 지키라는 것입니다.

욥31;1-2에 보면 “욥은 내 눈과 언약을 세웠나니 어찌 처녀에게 주목하랴 그리하면 위에 계신 하나님이 내리시는 분깃이 무엇이겠으며 높은 곳에서 전능자의 주시는 산업이 무엇이겠느냐? 하였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눈과 마음과 우리의 다리와 언약을 새워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이 내리실 상을 받기 위해 내 마음과 몸을 정결케 지키겠다고 말입니다. 아멘입니까?

 

두 번째는 이웃을 정결케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웃이 나로 인해 간음치 않도록 나를 잘 관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로 눈으로 옷 입는 것으로 근심하라는 것입니다. 나 때문에 이웃이 음탕한 생각이 들지 않도록 이웃을 정결케 지켜주어 결과적으로 나와 이웃이 다 하나님 앞에 정결케 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인기 있다는 색시한 옷, 색시한 몸, 색시한 피부를 자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웃의 눈이 범죄하지 않도록 자극을 주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본인의 정결과 이웃의 정결을 유지하기 위해 눈이라도 내빼어 버리고 손이라도 잘라 버리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목표는 우리의 영혼이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눈이 늘 범죄를 하고 손이 늘 범죄를 하면 오히려 눈을 빼 버리거나 손을 잘라 버려서 죄 때문에 천국 못 가는 일이 없도록 죄를 절단하라는 것입니다. 어떤 자는 성적 범죄를 짓지 않으려고, 스스로 고자가 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대단한 결단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잘라 버리므로 생각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외적 범죄와 내적 범죄를 다 원하지 않습니다. 눈을 빼버리라는 것은 잘라 버리라는 직접적 교훈보다 그런 결단을 내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직장 분위기 때문에 힘들면 직장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친구 때문에 범죄케 되거든 친구를 버리라는 것입니다. 분위기 때문에 꼭 범죄케 되거든 그 분위기에서 빠져 나오라는 것입니다. 마귀가 눈을 꼬실 때, 사단아 물러가라고 외치라는 것입니다. 마귀가 마음을 꼬실 때 사단아 물러가라고 그 자리에 뛰어 나오라는 것입니다. 정결하지 않은 부인은 남편 앞에서 자신 없고, 정결하지 않은 남편은 부인 앞에서 힘이 있을 수 없습니다. 정결하지 않은 성도 하나님 앞에서 능력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오로지 정결은 기도의 능력이요, 찬송의 능력이요, 말씀의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성도들 정결한 영을 유지하시어 능력 있는 기도, 힘있는 찬송, 살아있는 말씀이 늘 충만할 수 있어야 합니다. 미국의 기준도 한국의 기준도 일본의 기준도 아니며, 아브라함이나, 다윗이나, 야곱의 기준도 아니며 오직 마음의 음욕을 품은 자마다 간음하였느니라 는 주님이 기준에 따라 사는 자라야 천국을 소유하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간음한 사람 동정하고 책망하고, 격려하고, 위로하고, 다시 회복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똑같은 실수 할 수 있는 연약한 우리이기 때문입니다. 돌로 치려고 달려들지만 말고 자신을 살피라는 것입니다. 들통 난 범죄자만 죽일 죄인으로 보지 말고 마음속에 품었던 죄도 같은 죄인임을 알고, 자기 죄를 고백하고, 남의 죄를 용서하는 자리에 서야 합니다.

주님의 기준에 합격하는 정결한 성도들 되시기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