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를 사하시는 주님 – 마태복음 9:1-13

오늘은 주님께서 중풍 병자를 고치신 사건과 마태를 제자로 부르신 사건을 통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메시아이시오, 죄를 용서해 주시는 권세를 가지신 분, 또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는 전능자이심을 증거 하시게 되며, 결과적으로 이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됨을 보게 됩니다. 오늘 말씀을 소개받는 우리 모두는 오늘 말씀을 통해 주님을 더욱 확실히 알아 우리 믿음 키우는데 큰 도움이 되시기 원합니다.

 

본문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생각해 보고 이 본문이 주는 교훈을 찾고 우리 생활에 적용하도록 해보겠습니다.

 

[1]중풍병자를 고치신 주님 (1-2, 6-8)

[2]서기관들을 책망하신 주님 (3-5)

[3]마태를 부르신 주님 (9-13)

 

[1]중풍병자를 고치신 주님(1-2, 6-8)입니다.

본문 1-8절까지는 한 중풍병자를 고치신 사건을 다루고 있는데, 같은 내용을 막2:1-12, 눅5:17-26에서도 기록해 주고 있고,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보다 자세히 기록해 주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마태는 한 중풍병자를 친구들이 예수께 침대에 뉘워 데려 왔다고만 소개해 주고 있지만,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은 네 사람이 들것에 들고 왔는데 주님이 병 고치시고 가르치시는 집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있어 주님 가까이 접근할 수 없게 되자 지붕 기와를 벗기고 환자들 달아내려 주님을 만날 수 있도록 했다는 자세한 기록을 봅니다.

우리는 이 장면을 통해 큰 감동을 받게 되는 것은 혼자는 전연 이동할 수 없는 친구에 큰 관심을 가진 친구들입니다. 남에 대해 자기의 시간과 정열을 쏟기가 어려운 이 시대임으로 더욱 그들의 선행이 돋보입니다. 돈 많고 내게 도움을 주는 친구에게 관심을 쏟을 수 있겠지만, 자리에 누워있는 돈 없는 힘없는 친구에게 사랑과 관심을 주어 보아야 내가 힘들고 괴롭기만 하지 않겠어요? 관심을 두기보다 모른 체하는 것이 내겐 좋지요. 그러나 중풍병자의 친구들은 자기들에게는 힘들고 불편하지만 자리에 누워있는 친구에 특별한 우정을 갖고 어떻게 해서라도 그가 회복되어 자기들과 같이 자유스럽게 활동하도록 해야 한다는 각별한 동정을 가졌음을 보게 됩니다. 과연 친구란 나를 위해 잘해주는 사람이란 차원보다 그가 어려울 때 내가 돕게 되는 그런 관계의 사람을 친구라 할 수 있을 것 같게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믿어집니다.

이런 좋은 친구를 가지고 계십니까? 이런 좋은 친구가 없음을 아쉬어 하지 말고, 이런 좋은 친구가 되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께는 주님께서 늘 그런 친구이상의 친구가 되어 주실 것입니다. 감동을 주는 사랑 어린 동정심 있는 좋은 친구들을 보며 마음이 훈훈해집니다. 더욱 관심 가져야 할 것은 이들의 동정과 사랑은 어느 정도 하다 중지하는 그런 보통 정도가 아니라 기어이 병든 친구를 낫게 해줘야한다는 적극적이요, 사명감이 투철한 사랑입니다.

네 사람이 들것에 들고 의사 선생님을 만나러와 준 것만도 대단합니다. 환자 pick up 하여 병원에 와 준 것만도 큰사랑이라 생각지 않으십니까? 그러나 병원에 사람들이 많아 그대로 되돌아 왔다면 병원에 간 목적이 이뤄지지 못한 것 아니겠어요? 예수님을 만나러 와보니 소문 듣고 사람들이 어찌 많이 모였던지 도저히 주님의 도움을 받을 수 없음을 알고 남의 집 지붕을 뚫고 환자를 달아내려 예수님 곁에 떨어뜨린 사건입니다. 사실은 대단히 무례한 사건임에 틀림없습니다. 솔직히 무식한 사람들이란 평을 받기에 충분합니다. 그러나 지붕 값을 물어주는 한이 있어도 지붕보다 더 중요한 것은 친구의 고통을 풀어주는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뭐가 더 중요한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또 감동스러운 것은 그들의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병을 고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진 사실입니다. 그런 확신이 없이 어떻게 남의 지붕을 뚫겠습니까? 그가 아니면 친구의 병을 그 누구도 고칠 수 없음을 안 그들은 줄을 서있는 질서도 무시하고 남의 집을 뜯기까지 한 것은 주님은 능치 못하심이 없는 분이라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주님만이 하실 수 있다고 애써 찾아온 친구들의 믿음을 보시고, 지붕까지 뜯으면서까지 주님을 만나겠다는 그들의 확신 있는 믿음의 자세를 보시고, 주님은 저들의 믿음을 보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믿음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들의 예배를 받으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안심하라”고 위로해 주십니다. 지붕을 뚫고 달아 내렸다고 책망을 하시지나 않을까 하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달래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중풍병만 고쳐가겠다는 육적 병 고침을 받을 뿐 아니라 영적으로 병든 죄까지 용서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선포하십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선포하셨고,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갔다고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소원하고 기도하는 것보다 더 좋을 것으로 더 큰 것으로 채워주시는 주님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중풍병자를 고치시고 죄 사함을 주심으로 주님이 메시아이심이 증거 됩니다.

 

[2]서기관들을 책망하심(3-5)

주님께서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선포하심을 서기관들이 듣고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목수 나사렛 예수가 어찌할 수 있겠느냐고 이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이요, 불경스런 일이라고 마음에 분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그 마음속을 보시는 주님께서 “왜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고 책망을 하심을 보게 됩니다.

주님을 그저 보통 선생님, 또는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치료사 정도로만 알고 있고, 믿고 있는 이들에게 책망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믿지 못하는 자들을 책망하시며 그가 죄를 사할 수 있는 분으로 받지 못하는 불신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의 병도 낫게 하시는 분일 뿐 아니라 우리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분이심을 믿으십니까? 우리의 지식은 우리의 경험은 우리의 얕은 과학 지식은 불신의 요소를 제공하지만 우리의 믿음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그가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심과 그가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시고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고 지금 살아 계시어 우리를 지키시고 간섭하시며 보호하시고 계심을 믿게 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확실히 믿을 수 있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서기관들의 마음까지 꿰뚫어보신 일로 주님이 메시아이심이 증거 되는 것입니다.

 

[3]마태를 부르신 주님이십니다(9-13)

마태가 누구입니까? 마태복음의 기록자입니다. 마태는 자기 이야기를 남의 이야기를 써나가듯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기록하기를 9절에 보니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을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고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9절에서 우리가 발견한 주님은 마태를 보신 주님입니다. 마태는 세리로서 세리는 그 당시 로마 정부의 앞잡이이며, 유대인들의 돈을 뜯어내는 부정적, 횡령의 대표 직업으로 검은 돈으로 부자 된 부류의 사람을 말해주는 직업이기도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마태의 부정직함을 보신 것입니다. 그의 인생을 불쌍히 보신 것입니다. 허송 세월하는 그의 일생에 꿰뚫어 보시고, 새 생활, 새 사업, 새 사람이 되도록 그를 부르신 것입니다. 세리의 자리에 앉아있는 사망의 자리에서 가치 있는 생명의 자리로 옮겨 주시기 위해 부르십니다.

“나를 따르라”하시니 그가 돈이 쏟아지는 돈방석의 미련 버리고, 즉시 주님을 따르는 결단력을 보여주며, 주님을 따르는 길이 자기가 사는 길임을 확신하는 믿음을 갖고, 자기 재산, 돈벌이를 털어버리고 그 자리에서 일어서 주님의 제자의 길을 택한 사실입니다.

10절부터 13절까지 보면 마태는 주님의 제자의 길을 선택하고 즉시 자기가 택한 제자의 길을 함께 죄짓고 생활한 친구들에게 소개하기 위해 친구들을 초대하여 주님과 함께 하는 잔치를 마련하였습니다. 그 곳에 참석한 사람들은 창기, 포주 그리고 세리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모두 죄인들이었으므로 유대인들 잘 믿는 자들이라는 종교인들은 이들을 비난하고, 상대도 해주지 않고, 먼 거리를 유지하여 부정 타지 않게 하는 것이 상례인데, 예수님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므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겁이 나서 주님께는 직접 말도 못하고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하니 주님께서 들으시고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고, 병든 자에게만 쓸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느니라” 말씀하심으로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을 분명히 밝히신 것입니다.

우리가 죄인이었기 때문에, 지금 죄인이기 때문에 주님과 만나는 이유가 된 것입니다. 죄인일수록 주님이 필요합니다. 죄인일수록 교회에 몰려와야 합니다. 죄 때문에 창피해서 교회 못나오는 모순이 우리 주변에 일어나서는 아니 되겠습니다. 죄인이라고 교회 오는 것을 거절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죄인과 함께 하셨는데 죄인들과 거리를 두거나 멸시하는 눈초리가 있어서는 아니 되겠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죄인을 찾으시는 죄인의 친구이심을 다시 확신하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죄인들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메시아이심이 증거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본문을 통해 무슨 교훈을 받게 됩니까?

 

첫째, 이웃들의 영혼에 관심을 갖는 성도들 되시라는 것입니다.

네 명의 친구들과 같이 불신자들, 즉 영적으로 중풍 병에 걸린 사람들을 몇 명이 합심해서 주님을 만나게 하고 주님으로부터 치료받고, 구원 얻도록 책임을 지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불신 이웃에 관심을 갖고, 기도하여, 그들의 영혼을 사랑하여 기어이 주님께 인도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지붕을 뚫고라도 전도하는 사명을 새롭게 부여받는 성도들 되어야 하겠습니다.

둘째, 과거를 돌아보지 말고 즉시 증거자들이 되라는 것입니다.

마태는 유대인들의 지탄받는 나쁜 관리였으나 부르심을 받은 즉시 자기 과거의 죄를 기억치 아니하고 새 사람 된 위치에서만 자신 있게 친구들에게 주님을 소개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과거에 어떤 죄인이었든지, 누가 나를 뭐라 생각할 것인지? 에 매달리지 말고 현재의 기쁨, 현재의 정결로서 주님을 자신 있게 소개할 수 있는 증거자들이 되시라는 것입니다.

 

셋째, 죄인의 친구이신 주님을 늘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자들입니까? 작정하고, 결심하고, 새롭게 태어나려고, 발버둥을 치지만 쉽게 다시 실수하고 죄를 지으므로 허물어져 버린 자기 자신에 얼마나 스스로 실망을 하는 저희들입니까?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께 더욱 의지하고 용서받고 다시 힘을 얻어야 하는 존재들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의인이라면 주님과는 접촉이 필요 없습니다. 나 같은 연약한 죄인의 친구 되시는 주님만 다시 한번 머리 숙여 감사드리게 됩니다.

 

죄인 마태를 보시는 주님께서 우리를 보시며, 중풍병자에게 “안심하라는” 주님께서 우리를 돌보시고 계시며 위로하심을 믿고, “우리 모두 죄인의 친구 되신 주님께 더욱 의존하고 힘을 얻는 성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