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 마태복음 9:14-17

주님께서 마태의 집에서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시므로 유대의 종교적 습관과 전통에 정면 도전하신 사실을 지난 주에 소개받았습니다. 유대적 전통은 죄인이나 이방인과는 접촉하는 자체를 금하나, 주님은 오히려 죄인을 만나고 접촉하여 죄인을 구하므로 죄인과 의인, 이방인과 유대인을 하나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의 종교적 전통이 절대적으로 존중하고 그대로 지켜졌다면 이방인인 우리는 영원히 메시야를 영접할 수 없게 되었을 것입니다. 유대 전통과 관습은 죄인을 영원히 버리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은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면서까지 라도 죄인을 영원히 살리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볼 때 오늘날에도 정면 도전 받아야할 개혁되어져야 할 종교적 전통과 습관에 우리 신앙 주변에 있는 것이라고 믿어지게 됩니다. 오늘 주신 본문도 주님께서 그 당시 종교적 습관과 전통을 따르지 않는다고 비난을 받으시고, 주님께서 이에 대한 올바른 강해를 해주시는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본문을 3부분으로 나누어 본문의 내용을 알아보고 본문이 주는 교훈과 우리 생활에서 적용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금식에 대한 비난(14)

[2]혼인집의 비유(15)

[3]생베 조각과 새 부대의 비유(16-17)

 

[1]금식에 대한 비난 (14)

본문에서는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금식하지 않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지적하고 있는데, 누가복음에서는 바리새인들이 비난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례요한도 금식에 대해서는 유대의 전통을 엄격하게 잘 지켰고, 또 그의 제자들도 잘 지키도록 지도를 한 모양입니다.

모세 율법으로는 속죄일에, 즉 년 1회 금식을 하도록 정해져 있으나, 보다 잘 믿고, 보다 열심히 있다는 이들이 자기들의 믿음의 정도를 과시하기 위한 수단과 방법으로 금식은 주 2회 금식의 규례가 생겨나게 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그런 결과로 금식 많이 한사람, 금욕생활 많이 한 사람이 덜 하는 사람보다 믿음이 좋다는 기준이 되어 금식의 본뜻에서 많이 멀어진 금식을 보게 됩니다. 이미 주님께서는 산상 설교에서 금식에 대한 바른 교훈을 주셨었지요? 금식을 하되 그런 목적으로 남에게 자랑하고 보이려고 하지 말라 하셨지만 사람들 모임 속에는 껍질, 외모, 겉치장이 많이 남아 있는 줄 압니다.

세례요한의 제자들로서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금식을 하지 않음이 전연 이해가 되지 못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푼 세례요한이 지금 옥에 갇혀 있고, 예수님은 세례 요한보다 크시고 메시야이신데, 그로부터 지도 받은 제자들이 금식을 하지 않으니 정말 궁금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 와서 “세례요한의 제자들인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을 하는데 왜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을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오히려 자기들 보다 금식을 전통과 습관을 지키지 않느냐는 질문이었을 것입니다.

[2]혼인집의 비유(15)

이 질문에 주님께서는 혼인집을 비유하며 답을 주게 됩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는 신랑으로서 신부인 성도들을 부르러 오시는 것으로 비유를 하시고, 세례 요한도 주님을 신랑으로 자기는 신랑의 음성 듣는 친구(요3:29)로 비유했었는데, 신랑과 함께 있는 혼인집이란 기쁜 집이요, 그 잔치는 기쁜 잔치인데 슬퍼하거나 금식해서야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유대 풍습은 7일 동안 혼인 잔치를 하고, 마지막 날에 신랑이 친구들과 함께 장인 집에 가서 신부를 데리러 가게 되는데, 신랑 친구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 어떻게 금식을 하겠는가 입니다. 오히려 먹고 마시고 기쁨이 충만해야 한다는 것이며, 신랑을 빼앗겼을 때, 즉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을 때 자연히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며 금식할 때가 있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금식을 때에 따라 형식적으로 외형적으로 하기 보다 정말 필요할 때 해야 한다는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성도의 생활은 금욕이나 금식 등 슬픔의 생활보다 밝고, 기쁘고, 감사하고 풍성한 삶이 이어져야 한다는 교훈이 있는 것 같습니다. 즉 금욕이나 금식이 신앙 기준의 잣대가 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 한 단계 넘어서 “기뻐하라”는 신앙의 단계를 암시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3]생베 조각과 새 부대의 비유(16-17)

생베조각이란 한번도 세탁은 일이 없는 천조각으로 이를 빨면 줄어들기 마련이므로 만일 낡은 옷이 헤어졌더라도 생베조각을 대고 기운다면, 이 옷을 빨았을 때 생베조각이 줄어들면서 약한 헌옷을 찢어지게 되므로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다고 답변을 하셨습니다. 금식을 왜 하지 않느냐는 비난에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일까요?

또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넣지 않는다고 했는데, 새 포도주란 지금 발효되고 있는 포도주를 말합니다. 가죽 부대란 염소나 양, 또 돼지를 통째로 가죽을 벗겨 한 쪽을 꿰매어 물을 담을 수 있게 만든 것으로, 오래된 가죽 부대는 신축성이 없어서 새로 발효되는 그 힘에 견디지 못해 헌 가죽 부대가 터지게 되면 가죽 부대도 버리고 포도주도 버리게 되므로 새 포도주는 신축성이 있는 튼튼한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는 비유입니다. 이 새 부대 비유 역시 금식에 대한 질문과 어떤 연관이 되는 것일까요?

여기서 말한 생베조각이나 새 포도주는 새 시대에 적합한 주님의 사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생명을 가져다주는, 구원을 가져다주는, 삶을 가져다주는 새 약을 말하는 것이며, 낡은 옷이나 낡은 가죽 부대란 유대교 전통이나 습관 같은 낡은 사상, 생명이 없는, 활력이 없는 옛 언약을 말하는 것으로서, 금식이란 옛 시대의 옛 사상이나 옛 실천의 대표적 산물로서 사람에게 보이려고 습관적으로, 또 자랑삼아 한번이라도 남보다 더하는 그런 구태의연한 신앙은 결국 새 새대에 맞는 신앙도 못되고, 그런 신앙으로서는 구원에 이르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교훈을 주시기 위해 이런 비유를 주신 것이 틀림없습니다.

옛 사상, 옛 전통에다가 그리스도의 새 언약을 가미한 정도 가지고는 옛 법도 버리고, 새 법도 버리게 되므로, 처음부터 옛 모습, 옛 습관, 옛 전통에서 완전히 빠져 나와 새 언약인 그리스도의 생명의 말씀으로 새로 태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옛날 어른들이 우리 조상들이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했다는 옛 이야기는 버리고, 주님이 주신 새 교훈으로 교훈 삼아 영적으로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본문이 주는 교훈은 무엇이며, 그 교훈을 우리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본문의 교훈은 낡은 옷은 벗고 새 옷을 입으며, 새 술을 담기에 적당한 새 부대가 되라는 것입니다. 옛 옷인, 헌 가죽 부대인 주님의 생각과 어긋나는 나의 생각, 사회적 전통, 종교적 흐름을 버리고, 주님의 생각으로 짜진 옷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헌 옷을 깁기 위해 생베 조각을 데서는 아니됨 같이 내 생각, 주님의 생각으로 하여 나와 주님과 합작품으로 만들지 말고, 내 생각, 우리의 습관은 버리고 주님의 생각, 주님의 습관으로 통째로 바꿔 끼우라는 것이기도 합니다.

나의 옛사람은 어떤 존재인가요, 우리가 입었던 옛 옷은 어떤 옷인가요? 이기적인 나, 욕심 많은 나, 나에게 잘해준 사람은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는 나, 적은 것만 가져도 교만하게 되는 나, 남을 높일 줄 모르면서 나는 존중을 받고자 하는 나, 남이 잘되면 괜히 심술이 나는 나, 우리의 옛 모습은 얼마든지 지적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옷은 생명을 바쳐서라도 남을 살리는 희생적이요, 이타적인 사랑의 주님, 어린아이까지 높이시는 제자의 발을 씻기시는 겸손의 주님, 머리 둘 곳도 없으셨던 욕심 없으신 주님,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원수까지 용서하시고 사랑하시는 주님, 7번씩 70번이라도 용서하신 주님이 입으신 옷인 사랑, 겸손, 순종, 용서, 욕심 없으심 이런 옷으로 바꿔 입으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갈아 입어야할 종교적 전통과 습관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첫째, 이웃의 누구와 비교하여 내 신앙이 괜찮다고 믿고 있는 오해.

둘째, 내가 행한 모든 선행을 통해 하늘나라에 갈 수 있을 것이라는 오해, 그것 때문에 선행에 열심을 내는 습관.

셋째,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지 아니하고 사람은 눈과 귀에 초점 맞추는 저질적 예배, 부패된 예배.

넷째, 봉사보다는 직분이나 명예에 관심을 집중시키는 부패된 교회 조직.

다섯째, 주님의 말씀과 종교적 전통을 구별하지 못하여 주님 말씀 죽이고 종교적 전통을 살리는 기독교의 모순.

여섯째,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이 이름보다도 더 유명해져 버린 교파 잘못.

이런 모든 불순물을 그대로 두고 조금씩 일부분만 개정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벗어버리고 주님의 새 옷을 갈아입으라는 것입니다. 종교 개혁이 아니라, 주님의 뜻으로, 말씀으로, 온전한 환원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내가 입은 옷이 사회에서는 도덕성이나, 사회적 통념에서 그대로 인정을 받는다 해도 주님의 말씀에 주님의 정신에 어긋난다면 과감히 버리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교회 제도가 교회의 습관이 교계의 인정을 받는다 해도 그것이 주님의 말씀에 어긋나고 조화를 이룰 수 없는 인위적인 것이면 과감히 버리라는 것입니다. 내 옷을 벗고, 주님의 옷으로 갈아입으며, 내 생각을 비우고 주님의 생각을 담는 새 부대들이 되시라는 것입니다.

 

세상 따라 풍습 따라 사는 길은 사는 것 같으나 죽는 길이고, 말씀 따라 사는 길은 죽은 것 같으나 영원히 사는 길임을 분명히 해 주고 있습니다. 새 술을 담은 새 부대들이 다 되시기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