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고 주께 나아 오는 축복 – 마태복음 9:18-34

마태복음 8-9장에서는 주님께서 많은 병자들을 고치신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는데 오늘은 그 마지막 부분입니다. 세상에 많은 병자들이 있지만, 주께 나아온 병자의 수는 극소수이라 봅니다. 이들이 주님께 찾아와 병 낫기를 구한 그 믿음은 병도 낫고, 영적으로 구원도 받는 이중 축복을 누리는 영광을 안게 된 사실을 우리는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본문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주님께 나아와 지상 최대의 축복을 받음같이 우리도 이들의 모범적 신앙을 닮아 큰 축복을 받는 성도들 되시기 기원합니다.

 

오늘 주신 본문을

 

[1]죽은 야이로의 딸

[2]열 두 해를 혈루증을 앓는 여자

[3]두 소경

[4]귀신들려 벙어리 된 자 등

네 가지의 사건의 공통점들을 찾고, 이런 공통점에서 얻는 교훈을 우리 생활에 적용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죽은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사건입니다.

마태복음에는 한 직원이라고 소개되고 있지만, 누가복음에 보면 회당장 야이로라고 소개되고 있습니다. 회당장이란 그 당시 회당 관리자로 선거에 의해 뽑혔으며, 예배 운영 관리 등 회당의 제반 문제를 책임지는 직분으로,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아주 존경받는 덕망있는 유명한 신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외동딸이 있었는데 죽은 것입니다. 보통 아버지 같으면 외동딸의 죽음을 놓고 비통하며, 절망하여 실의에만 빠져 있었을 텐데 나사렛 예수가 이곳 저곳에서 병고치신 이적을 행하신 소문을 듣고, 자기 딸을 살려달라고 주님께 찾아온 사건입니다.

이 사건을 보고 놀란 것은 첫째 야이로는 주님이시라면 죽은 자라도 살리실 수 있다고 믿었던 점이며, 둘째 그가 유대교 지도자임에도 자기 신분에 대한 위협을 각오하고 주님께 찾아올 수 있는 담력입니다.

본문 18절에 보니 “한 직원이 와서 절하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절했다는 말은 그에게 경배했다, 꿇어 엎드렸다, 예배했다는 말로 볼 수도 있습니다. 유대교 지도자가 사람들의 시선에 구애받지 아니하고 큰 경의를 표한 것입니다. 절하고 가로되 “내 딸이 방장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으소서 그러면 살겠나이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방장 죽었단 말은 지금 곧 죽었단 말입니다. 죽으면 끝난 것이 아니고, 죽었다 할지라도 주님께서 그 몸에 손을 얹으시면 살 것이라고 믿고, 주님께 간청한 것입니다. 첫째는 주님이 자기 집에 오시란 초청이며, 둘째는 자기 딸 몸에 손을 대달라는 간청입니다.

우리는 8장에서 한 백부장이 자기 하인이 중풍 병으로 누워 있음을 주님께 고한 사실을 기억합니다. 주님께서 가서 고쳐주겠다고 하시니 지기 집에 오심을 감당할 수 없으니, 오실 필요 없이 말씀으로만 하시라고 한 위대한 믿음을 보았는데, 야이로도 백부장의 믿음보다는 적다할 수 있겠으나, 죽은 자기 딸이지만 주님이 오시어 그 몸에 손을 대시면 살 수 있다는 믿음 높이 평가될 수 있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의 부탁을 받고 주님이 일어나시어 따라서 그의 집에 가셨습니다.

23절에 보니 주님께서 야이로의 집에 도착해보니 피리부는 자들과 훤화하는 자들이 있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유대 풍습에는 아무리 가난해도 장례 때는 슬프게 피리 불어 주는자 2명과 애곡하는 여인 한 명 이상을 필수적으로 고용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니 야이로의 집에도 이미 장례 준비가 다 되어 있는 정도였음을 보게 됩니다. 훤화하는 자들이란 바로 이 곡하는 여인들을 말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피리부는 자들과 곡하는 자들을 보시고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저들이 비웃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죽었다는 말 대신 잔다는 말로 쓰이고 있는데, 이 소녀가 정말 잠을 자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람의 눈으로 볼 때는 분명히 죽은 것이요, 주님의 눈으로 볼 때는 자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곧 일어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죽은 사람들을 잔다한 것도 언젠가는 다시 부활할 것이기 때문에 잔다는 말은 의미가 있는 말이기도 합니다. 죽은 아이더러 잔다 하셨으니 사람들이 비웃겠지요? 예수님께서는 무리들을 내어 보내시고 소녀의 손을 잡으시매 일어났다는 기록입니다. 비웃었던 자들이 몇 분 후에 비웃음의 어리석었던 일을 자책하고 부끄러워했으리라고 봅니다.

 

[2]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여인 사건입니다.

혈루증 여인은 출혈성 자궁염증이나 암을 앓는 여인으로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지금 같으면 간단히 수술로 회복이 가능하나 그 당시는 불치의 병으로, 율법적으로도 부정한 몸으로 간주되어 이런 사람의 몸에 닿는 것은 부정한 일이므로 이런 여인은 사람들이 모인 장소에 올 수 없는 처절한 형편의 사람인 것입니다. 절망감과 한숨만 쉬고 12년을 지내온 불쌍한 여인이었습니다. 이 여인이 다 방면으로 자기의 살길을 찾고 있던 차에 예수의 소문을 들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자기 몸에 손을 대면 틀림없이 묵은 혈루증이라도 나을 줄을 알고 있지만, 부탁드리지도 못하는 부정한 몸을 가진 여인이었던 것입니다. 주님의 손이 자기 몸에 닿는 기대는 전연 불가능함을 안 그는 지나가시는 예수님의 뒤로 와서 예수님의 겉옷깃을 만진 것입니다. 그는 주님의 손이 비록 자기 몸에 닿지 않는다 해도 그의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을 것으로 믿었다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아무도 몰래 예수님의 겉옷을 만졌는데 주님께서 이 사실을 아시고 뒤를 돌아보시며,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그 여자가 그 시로 구원을 받았다는 기록입니다.

주님께서 겉옷을 만진 것을 어떻게 아셨을까요? 그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진심으로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돌아보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소망이 없고 절망 가운데 있는 자의 눈물과 울부짖음은 주님의 마음을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겉옷만 만져도 자기의 무서운 병이 나을 수 있다는 믿음 대단하지요? 주님의 능력이란 꼭 손을 얹지 않아도, 멀리서 말씀한마디로 해결할 수 있는 분이신 것입니다.

 

 

 

[3]두 소경의 간청입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집에서 그의 딸을 살리고 주님이 기거하시는 집으로 돌아오시는 길이었습니다. 두 소경이 소리 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한 것입니다. 한 번하고 만 것이 아니라 계속 따라 오기를 주님이 기거하시는 집에까지 따라 온 것입니다. 집에까지 따라오는 동안 계속 소리 질렀음에도 주님께서 왜 일찍 응답하시지 않았는지는 모르지만, 주님으로서는 깊은 뜻이 있으셨으리라고 봅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질문을 하십니다.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하시니 그들이 대답하기를 “주여 그러하오이다”라고 대답하였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저희 눈을 만지시며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시니, 그 눈들이 밝아졌다고 했습니다.

 

[4]귀신들려 벙어리 된 자의 사건입니다.

나면서부터 벙어리 된 자도 있겠지만 본문의 벙어리는 귀신들려서 벙어리가 된 자를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이 벙어리는 귀신들린 상태이므로 본인의 믿음으로 주님앞에 나올 수 있는 입장이 되지 못하겠지요. 그러니 다른 사람들이 그들 예수님께 데려오니, 귀신이 쫒겨나고 벙어리가 말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사건을 보고 두 가지 반응이 나옵니다.

첫째, 이스라엘 역사상 이런 일을 본 때가 없다고 하나님의 능력, 나사렛 예수의 메시야 됨을 긍정적으로 받는 무리들이 있었고, 즉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무리가 있었고

두 번째, 바리새인들은 귀신의 왕 즉 바알세불을 힘입어서 바알세불이 준 능력으로 향한 것이라고, 하나님의 능력을 정면 도전한 용서받을 수 없는 망언을 한 것을 보게 됩니다. 즉 이들은 하나님을 불신하고 오히려 귀신의 왕을 믿은 것입니다.

방금 소개된 4가지 사건을 통해 우리가 공통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공통점이 무엇일까요?

첫째, 비참한 환경입니다.

모두 희망이 없는 절망적인 환경에 처했음을 보게 됩니다. 인간은 해결할 수 없는 하나님만이 해결이 가능한 고통의 환경 속에 있는 그들을 보게 됩니다. 딸이 죽은자가 그렇고, 열 두 해 혈루증으로 고생하는 자도 그렇고, 눈을 못 보는 소경의 상태가 그렇고, 귀신들려 벙어리된 자가 그렇습니다.

 

둘째, 예수를 믿는 믿음입니다.

딸이 죽은 야이로는 주님께서 자기 딸에 손을 대시면 죽은 중에서라도 다시 살 수 있다 는 믿음을 가졌으며, 열 두 해 혈루증을 앓은 여인은 예수님의 겉옷만 만져도 병이 나을 것으로 믿었으며, 두 소경은 다윗의 자손 예수님이 자기들을 돌아보아 불쌍히 여기신다면 눈을 뜨게 할 수 있는 능력자임을 믿었고, 귀신들려 벙어리 된 자들 데리고 온 자들은 주님께서 귀신을 쫒아내실수 있는 전능자임을 믿었던 것입니다.

 

셋째, 예수를 찾아가 간청한 사실입니다.

그들 모두가 주님이 전능자이심을 알고, 자기들의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인 것을 알고 앉아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주님이 말씀 전하고 계심을 방해하고라도 찾아가 애원을 했으며, 찾아가 옷을 만졌으며, 주님의 집까지 따라가며 소리 질렀으며, 벙어리 데리고 주님을 찾아가 부탁한 그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체면, 신분, 남의 눈치 보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주님께 나간 그들의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4]주님이 해결해 주신 사실입니다.

아버지의 간청대로 죽은 딸이 살아났고, 열 두 해 혈루증도 나았고, 두 소경이 눈도 떴으며, 벙어리가 말하는 특별한 은혜를 주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절망 가운데서 오직 주님만이 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님께 간청하고 들어 주실 때까지 매어 달리는 자의 소원을 들어주신 것을 보게 됩니다. 그들의 믿음대로 다 해결 받은 것입니다. 믿음의 분량만큼 응답을 얻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본문이 주는 공통점을 통해 우리가 어떤 교훈을 받게 되며, 우리 생활에 어떻게 적용해야 하겠습니까?

 

내게 주어진 나쁜 환경, 절망스러운 사건을 부정적으로만 해석하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지혜의 눈을 가져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딸이 죽었기 때문에, 12해의 혈루증 때문에, 소경되었기 때문에, 귀신 들렸기 때문에 주님을 찾는 믿음의 눈을 가졌고, 찾아간 담력을 가졌고, 그 때문에 예수님 만나 구원을 얻은 사실을 보면 우리의 약점, 나의 나쁜 환경은 나로 하여금 주님께 더욱 매달려 주님만이 해결할 수 있는 분임을 믿게 하는 믿음을 가져다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한다면 내 어려움이 크면 클수록, 나의 환경이 나쁘면 바쁠수록 더욱더 인간을 의지하는 일을 줄어들고 오직 해결하실 수 있는 분, 예수님을 의지하고 믿는 믿음의 양이 증가할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엄청난 사건일수록 주님을 더 의지하므로 쉽게 오히려 해결될 수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실패는 나의 좋은 스승이 된다는 비슷한 말로 나의 여러 가지의 불편하고, 마음 아파하고, 절망적 형편들이 우리에게 기쁨을 가져다주고, 주님을 바로 만나는 요소가 될 수 있음을 알고, 부정적인 해석보다 오히려 감사하고 하나님의 뜻을 그 안에서 찾아보려는 그런 믿음의 눈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절망스런 사건이 내 안에 있습니까? 주님은 이를 해결하실 수 있는 분으로 첫째, 믿으시기 바랍니다. 먼저 큰 믿음 가지시고 주님께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시도록 온전히 맡기실 수 있기 바랍니다. 믿음대로 다 이뤄 주실 것입니다. 간절한 기도, 주님만이 하실 수 있다는 믿음, 끈질기게 매달리는 간청은 주님의 마음을 움직여, 주님께서 발로 찾아오시고 손을 대시어 돌봐주시고,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주님은 내 문제 해결하실 수 있는 분이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안될거야’라고 믿는 분은 안되고,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믿는 분은 무슨 문제든 해결될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진실된 믿음을 소유하셔서, 주님의 손이 어루만지시며 위로와 소망 주시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