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신을 쫓아내신 주님 – 마태복음 8:28-34

풍랑을 만나 무서워하는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라고 책망하시고, 바다를 꾸짖으시니 바다가 잔잔해진 사건을 지난주에 소개받았습니다. 이 사건의 목적과 결과는 뭐였을까요? “그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 고” 즉 하나님의 아들아 아니시라면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느냐는 고백을 이끌어 냈던 것입니다.

오늘 분문 내용은 귀신을 쫓아내신 내용이 소개됩니다. 주님께서는 이 사건을 통해서도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세상을 구원하실 메시아이시오, 세상을 심판하실 심판 주이심을 알게 하고, 고백하게 하고, 믿게 하기 위함임을 우리는 알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본문 내용의 배경에 대해 좀 생각해 본다면 같은 줄거리의 내용이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 기록되어 있으며,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을 보다 상세히 기록이 되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마태복음은 가다라 지방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말하고 있고,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거라사 지방으로 표현되어 있으나, 가다라 지방은 인근 10개시로 구성된 헬라 도시들의 연합도시로 이방인들이 거주했던 곳을 말하며, 그 중 가다라란 마을은 그 지방의 수도라 할 수 있는 도시요, 거라사는 가다라와 별로 멀지 않은 마을이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으므로 돼지를 칠 필요가 없는데, 여기 본문에 돼지 떼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보아도 이 지역은 이방인들이 살고 있는 이방 town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 마태는 귀신들린 사람을 둘로 기록하고 있고,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은 한 사람이라 하고 있으나, 결국 우리의 초점은 장소가 어디고 숫자가 몇 명에 있는 것이 아니고,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사건의 목적과 그 사건과 우리와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며 말씀을 상고해야할 줄 압니다.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 크게 4부분으로 나누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귀신의 존재(28-31)

[2]주님께서 가심(28-31)

[3]주님께서 하심(32)

[4]배척 당하신 주님(28-31)

 

[1]귀신의 존재입니다(28-31)

미국에 와 보니 희한한 날을 지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날은 바로 귀신의 날 Halloween Day입니다. 귀신을 억지로 만들어 보는 날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귀신이란 것이 실지로 있는 것입니까? 미신을 섬기는 자들의 대답은 “그럼요” 일 것이고, 믿음이 좋다는 분들은 혹 귀신이란 없다고 말할 자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저도 귀신을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그럼 없는 것일까요? 그런데 본문은 주님께서 귀신을 만나서 귀신과 대화를 한 사실을 보게 됩니다. 주님이 꿈을 꾸셨나요? 아니오 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이 좋은 사람이던, 믿음이 약한 사람이던, 귀신이 실제로 존재하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은 “예”여야 합니다. 만일 아니다 라고 한다면 성경을 믿지 않고, 예수님을 거짓말 장이라 고백하는 것과 같다할 것입니다. 귀신이 있다면 귀신은 그럼 어떤 존재들일까요? 28절에 보면 “귀신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 나와 예수를 만나니라” 했으니 이스라엘 지역의 무덤은 우리가 한국에서와 미국에서 보는 무덤과 달리 동굴 같은 방이나 굴이었으며, 어둠침침한 곳 음산한 곳이었는데 귀신들린 자들이 무덤에서 산다는 것을 보니 귀신은 죽이는 자의 상징이라 생각됩니다. 죽음과 상관이 있는 존재 그래서 한국에서도 공동묘지 있는 곳을 지나가니 뭐가 어떻고, 뭐가 어떻고, 또 옛날 이 자리에 625 때 몇 명이 죽었는데, 꼭 비가 올려 고하면 그 자리에 무슨 소리가 들리고, 무엇을 보았다고 하는 것과 좀 연관이 있어 보입니다. 귀신은 사망의 상징, 주님은 생명의 상징. 귀신을 가까이 하면 죽고, 주님을 가까이 하면 살고 입니다.

또 28절에 보니 “저희는 심히 사나와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 만 하더라”라고 기록되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귀신들린 사람 이야기 좀 들어보았지요? 그들은 첫째 힘이 세다 합니다. 2-3사람이 그 사람 제어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초인적 힘을 가졌고, 즉 짐승 같은 힘과 짐승같이 포악하고 험한 성질을 가진 존재입니다. 귀신들린 사람이 사나와 그 무덤이 있는 길로 아무도 지나갈 수 없을 정도로 사나운 존재였던 것입니다. 내 마음에 예수가 존재하면 양순하고 온유하며, 내 속에 귀신 즉 마귀가 들어 있으면 어때요 사납다는 것이겠지요. 예수와 마귀를 진맥해서 알아 맞추는 방법을 배우고 있습니다.

29절에 보니 “저희가 소리 질러 가로되 하나님의 아들이여”라고 했으니 귀신은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 수 있는 밝은 눈, 즉 밝은 영안을 가진 존재들임을 보게 됩니다. 주님 따라 다니면서 이적을, 기적 행하심을 직접 본 제자들도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지 못하는 반면 그런 것을 직접보지 않고도 아는 영특한 존재들입니다. 무당들이 무엇을 맞추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모양입니다. 영안은 밝아 아는데, 주님을 영접을 하지 않는 존재들이 바로 귀신입니다. 그러 면에서 용케 잘 알아 맞추는 예언기도, 환상, 보는 것 즉, 영안이 밝다는 것과 믿음이 좋다는 것은 비례하지 않는 것이므로 이에 속아넘어가서는 아니 되겠습니다. 용케 잘 알아 맞추는 종교 지도자에 속아넘어가서는 아니 된다는 말입니다. 요사이 탁명환 소장을 죽인 살인자가 다니는 교회 목사님이 아주 용하다고 신문에 났습니다. 자기 교회 교인 중 국무총리가 될 것이라고 예언을 했는데 정말 그렇게 되었대요. 그런 용한 눈을 가졌기에 신도들이 그를 예수님 같이 맹신을 한다 하지요? 그래 자기 목사님께 잘못하는 탁명환 소장을 살해했다 했습니다. 용한 눈으로 볼 때 이 사건이 어떻게 되리라 보고 있는지 참 궁금합니다.

또 귀신이 “때가 이르기 전에”라 말한 것은 주님께서 심판하실 때를 알고 있으며, 그가 심판자이심도 알고 있음을 보게 되며, 31절에 “우리를 쫓아 내실진대”라고 했으니 주님은 귀신을 추방할 수 있는 능력자로 알아본 영특한 눈을 가진 존재임을 성경을 통해 알게 됩니다. 그런 이유로 예수 믿는 자가 무당 굿하는 곳에 가 있으면 무당이 굿을 못한다고 하잖아요. 여기 예수장이가 와 있다고. 또 어떤 병든 사람에게 예수 믿으면 그 병이 나을 거라고 예수 믿으라고 무당이 말하기도 한다 하지 않아요. 귀신은 주님을 알아보고, 또 주를 믿는 자를 알아보며, 무덤에서 나오라고 하지도 않았는데도 스스로 나와 주님께 굴복하여, 돼지 떼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간청을 할 정도로 예수께는 귀신 즉 마귀가 항복하고 마는 존재임을 보게 됩니다.

역시 예수 믿는 자들에게만 귀신이 맥을 못 추기 때문에 귀신이 보이지도 않고 힘을 못 쓰는 것이며, 믿음이 혼란한 자에게 귀신이 접근하고 귀신이 그를 지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2]주님께서 가심 (28-31)

무덤이 있는 길로 사람들이 무서워 못간 것은 무덤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귀신들린 자가 무덤 속에서 살다가 사람이 지나가면 나와서 험악하게 해코지하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길로 가셨습니다. 주님도 영안을 가지시고 그 길로 가면 그 귀신들린 자를 귀신으로부터 해방시키고 구원을 얻도록 해야 함을 아시고, 그 사명 감당하여 그 곳에 가신 것입니다. 주님 앞에는 악한 자도, 선한 자도, 부자도, 가난한 자도, 가엾은 자도, 귀한 자도 다 구원을 받아야하는 주님의 사랑을 받을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라면 좋은 사람 착한 사람만 만나러가고, 위험이 예측된 포악한 사람에게 전도는 포기하겠지만, 주님은 사람의 가기 싫어한 곳에 가서 사랑을 나타내 보이십니다.

저는 우리 교회에 아주 좋은 사람만 모이게 하여, 교회가 늘 평안하도록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는데, 그렇게 응답되었으나 이것은 모든 사람을 공평하게 사랑하시는 주님의 뜻과는 좀 다른 것 같습니다.

 

[3]주님께서 하심(32)

귀신은 주님께서 자기들을 사람에게서 쫓아내실 줄 알고 있었습니다. 이왕 쫓겨난다면 돼지 떼에 들어가게 해 달라고 간청을 했는데, 주님께서 “들어가라” 하시니 돼지 떼에 들어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마가복음에 보면 귀신이 돼지 떼에 들어갔고, 귀신이 들린 돼지 떼들은 비탈길로 내려가 바다에 빠져 몰사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누가 귀신을 사람에게서 나오게 할 수 있었습니까? 주님이십니다. 어떻게 나오게 했습니까? 귀신들린 사람 고치는 광경을 보게 되는데, 묶어놓고 두들겨 패는 모습을 보면, 주님은 오직 능력으로, 사람은 오직 힘으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 듭니다.

주님은 오직 말씀으로 “가라”하시니 귀신이 쫓겨 나왔고, 또 돼지 떼에 들어가게 했습니다. 귀신을 나오게 하고, 돼지 떼에 들게 하여, 그 천 마리가 바다에 몰사하게 한 것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기에 충분한 사건이었습니다. 2천 마리의 돼지를 잃은 그 주인에게 동정심도 가지만, 천하보다도 한 생명이 더 귀하다는 큰 교훈을 여기서 보여 주시는 같습니다.

 

[4]배척 당하신 주님(33-34)

돼지를 치던 자들 즉 목자들이 자기들이 돌보던 돼지 떼가 바다에 다 빠져죽었으니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즉시 마을로 들어가 주인에게와 마을 사람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니 온 시내가 예수를 만나려고 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왜 예수를 만나러 왔을까요? 예수를 만나려 왔다는 문장만 보아서는 예수 믿으러 나왔다는 말같이 들리나, 사실은 주님께 항의하고 혼을 내주려고 나왔으나 주님의 위세에 눌려 손은 못 대고 주님더러 그 지방에서 떠나 달라고 간구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지방 사람들은 이방인들로서 불신자들이므로 귀신으로부터 해방된 두 사람에 대한 관심과 기쁨은 전연 없고, 잃어버린 2천 마리의 돼지 떼 때문에 큰 실망을 했고, 그 이상 그 지방에 물질적 손실을 막기 위해 주님께서 다른 지방으로 떠나 달라고 요청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과 돼지 둘 중 놓고, 돼지를 택한 것입니다. 불신자의 당연한 결정이라 생각됩니다. 찾아오신 주님을 제발 그 마을에서 떠나달라고 간청을 한 것입니다. 주님을 모시자니 물질적 손해를 감수해야 하니, 차라리 예수를 모른척하고, 예수를 안 믿고, 이대로 죄 짖고 살자는 모습을 보여 준 것입니다.

 

제가 아는 사람이 불교 신자인데 전도 받고 예수를 믿었대요. 그런데 예수 믿자마자 중풍에 걸렸어요. 그래서 다시 빨리 불교로 환원했더니 그 병이 나았단 말을 들었습니다. 귀신은 우리로 주님 못 믿게 하기 위해 여러모로 방해를 놓기 때문에 주님과 세상 둘 중 선택하기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본문을 통해 무슨 교훈을 받게 됩니까?

 

첫째는, 우리도 귀신을 물리칠 힘이 있다는 확신입니다.

귀신이 힘이 세도 그가 주님을 알아보고 예수 믿는 자를 알아보기 때문에 주님의 이름으로 나아가면 귀신이 벌벌 떨 것입니다. 주님 말씀을 가지고 나타나면 도망칠 것입니다. 우리도 기도와 찬송으로 귀신을 막아내고, 추방할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귀신이 무식하면 안되겠지만 귀신이 유식해서 우리가 주님의 군병인 것을 알고, 주님이 뒤에서 봐주고 계시므로 우리와 싸워서는 game이 되지 않을 줄 알고 있기 때문에 뒷걸음질치고 만다는 사실입니다. 믿으십니까? 이를 믿고, 귀신을 대항하면 귀신은 도망칠 것이고, 귀신이 무서워 벌벌 떨면 귀신은 나를 사로잡을 것입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는, 돼지 떼를 포기하고 주님을 택해야 한다는 경고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이방인들은 기왕에 믿음이 없던 사람들로 오직 돼지만 통실 통실 살쪄주면 인생을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는 인생들이지만, 우리는 현세가 전부가 아니오, 미래에 소망을 두고 살고 있는 천국 시민인 만큼 혹시라도 귀신의 꼬임에 빠져 주님과 세상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귀신이 도전해 올 때 주님을 택하고 돼지 2천 마리를 포기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네게는 무엇이 돼지 2천 마리에 해당됩니까? 무엇이 내게 우상이 되고 있습니까? 탁명환씨 살해한 자는 자기 목사님이 우상이 되어 칼로 찔렀습니다. 그리고도 후회 않는다고 합니다. 눈에 보이지 아니합니다. 깨달음도 없습니다.

주님 만나는 것을 포기하고 우린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말씀 보는 것 포기하고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기도하는 것, 찬송하는 것 포기하고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택하고 있는 것입니까? 바로 보시고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내가 지금 무엇을 택하고 무엇을 버리고 있는지 말입니다. “주님, 제발 내게서 떠나주세요, 괴롭습니다. 주님 믿는 양심 가지고는 먹고살기도 힘듭니다. 주님이 눈감아 주시지 않는다면 살아남지도 못합니다. 눈을 감아주시던지 제발 떠나주세요” 입니까? 아니면 “내가 굶더라도, 내가 친구를 못 만날지라도, 아니 내가 상당히 손해 볼지라도, 내가 누명을 쓰더라도 주님, 내 마음에 계셔 주십시오. 그 다음은 주님이 다 책임져 주시리라 믿습니다” 입니까? 내게 돼지 떼가 무엇이 해당이 되던지 그 돼지 떼가 1마리일지 5천 마리일지 모르지만 돼지 떼 버리고 주님 택하는 귀한 성도들이 되셔야 합니다.

 

세 번째, 어려운 일은 내가 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남이 가지 않는 위험한 길을 가심 같이 우리도 어렵고 위험한 일을 남이 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실은 내가 해야 합니다. 전도자가 힘든 일을 하면 부인이 꼭 당신이 하느냐고 합니다. 자기 아들이 하면 어머니가 안스러워 합니다. 누가 해야합니까? 고양이 목에 방울을 누가 달아야 해요, 잘못하면 죽는데, 그래도 내가 해야합니다.

우리 성도들이 주님의 능력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며, 주님을 택하고 돼지 2천 마리를 버리며, 어려운 일은 내가 담당하는 귀한 성도들 되시기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