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들이 치룰 값 – 마태복음 10:34-42

본문의 중심한 설교 제목은 “제자들이 치룰 값”입니다. 주님께서는 12제자들 전도하러 내 보내시면서 제자의 이름을 가지고 제자들이 해내야 할 일을 해내기 위해서는 많은 값을 치루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분명히 예고해 주시고, 큰 각오를 가지고 전도 사역에 임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더욱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본래의 목적을 분명히 해 주심으로 제자들에게 올바른 소망을 갖게 해주시고, 바른 소망 가운데서 흔들림이 없이 사명을 감당하고 하나님이 예비하는 보상을 받도록 격려를 주시며 사명 의식을 고취시켜 주고 계십니다.

본문을 네 부분으로 나누어 본문을 이해해 보며,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과 우리 실 생활애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는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주님의 오신 목적(34)

[2]가족과의 불화(35-37)

[3]져야할 십자가(38-39)

[4]제자 영접하는 자가 받는 보상(40-42)

 

[1]주님이 오신 목적(34)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내 보내시면서 세상 사람들이나 또한 제자들까지도 오해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메시야에 대한 기대를 분명히 해 주시므로 새로운 충격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역사적으로 늘 피해자들이었으므로, 오직 하나의 소망은 메시야가 오시어 빼앗겼던 나라를 찾고,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온전한 회복이 이루어져 보란 듯이 잘 살게 될 것을 기대하며 살아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즉 그들이 기대하던 메시야는 세상에서 당한 모든 고통과 어려움을 세상적으로 보상해 줄 것으로 믿어온 것입니다. 무엇보다 외부의 적으로부터 늘 침략 당하고 빼앗기고 잡혀가고 안정과 평화가 없었던 그들에게 메시야가 오시면 그 이상 전쟁이 없고 평화가 오리란 기대였던 것입니다.

눅 2:14에 보면 주님이 탄생하셨을 때 천사들이 하나님을 찬송하여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는 자들에게 평화로다” 라고 함 같이 주님은, 메시야는 평화, 즉 ‘샬롬’을 가져다주시는 분이시오, 이 평화의 본체이심에 틀림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바라시는 평화와 이스라엘 사람들이 소망하는 평화에 큰 차이가 있는 것이 현실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잘못된 인식을 재확인시켜 주시려고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을 분명하게 말씀해 주시고 계십니다.

34절에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즉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칼을 주러 오셨다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무슨 말일까요? 주님께서 오신 것은 죄악된 세상을 그대로 인정해 주고, 하나님을 거역하고 사는 세상 사람들과 그대로 화목한 관계를 유지하고 죄악 속에 사는 사람들을 그대로 인정해 주는 외적 평화, 거짓 샬롬을 위해 오신 것이 아니고, 칼을 휘둘러서라도 죄악을 도려내고 수술하여 세상 사람들이 죄를 회개하고, 구원받아 하나님과의 평화, 하나님과의 연합을 이루게 하는 내적 평화 온전한 평화, 영원한 평화를 주시기 위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사용하시는 칼을 어떤 칼입니까?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주님이 오신 것은 죄악과 싸우시는 전쟁을 위해 오셨으므로 지금 전도하러 나가는 12제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자들과 싸우러 칼을 가지고 전쟁터에 나가는 자들임을 깨닫게해 주신 것입니다.

 

[2]가족과의 불화(35-37)

세상에 칼을 주러 오셨다고 말씀을 시작하신 주님께서는 35절에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그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 하게 하려 왔다”고 선포하고 계십니다. 이 성경 구절이 주어진 배경과 본 뜻을 모르고, 이 성경 구절을 읽는다면 기독교를 크게 오해할 수 있는 말씀 같기도 합니다.

그러면 이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주님을 전연 모르는 가정에 복음이 전파되어 가족의 일부는 주님을 받아드리고, 가족 일부는 믿음을 받아 드리지 않을 뿐 아니라, 믿음 자체를 반대하고 핍박까지 한다고 가정을 해봅시다. 이럴 경우 가족이 나누어지면서까지 예수를 믿을 필요가 있겠느냐고 화목을 택하고 예수 믿는 믿음을 버릴 사람도 있고, 반대로 가족들과의 불화된 관계를 각오하고라도 예수 믿는 믿음을 택한다면 결과적으로 아들과 아버지가, 딸과 어머니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36절과 같이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가 되고 말 것입니다. 바울을 가장 심하게 핍박하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자들이 이방인들이 아니라 유대인들인 것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주님은 이런 환경에 처한 자들에게 선택의 가치관을 분명히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37절에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다”고 우리가 택해야할 길을 결정지어 주고 계십니다. 세상 살다보면 주님과 내 부모, 주님과 내 자녀, 주님과 내 남편, 내 아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할 경우가 있는데, 행여라도 내 부모, 내 자녀, 내 남편, 내 아내를 우선적으로 택하고, 주님을 둘째로 밀어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럴 경우 주님께 온당한 대우를 우리가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우리를 뒤로 밀어 낼 것이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독자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지시에, 비록 늦게 얻은 독자 아들 이삭을 참으로 많이 사랑했겠지만, 하나님의 지시를 따랐던 좋은 본보기를 우리가 이미 배웠습니다. 결론적으로는 가족 때문에 예수 믿는 믿음을 포기해야할 정도라면 예수를 택하고 가족을 버리는 그런 결단을 내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경고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미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라는 교훈을 배웠습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주님을 우선 순위로 들어야 한다는, 믿음의 일을 우선 순위에 두어야 한다 같은 맥락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3]져야할 십자가(38-39)

경우에 따라서는 가족까지라도 버려야 한다고 경고하신 주님께서 이젠 자기 십자가를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십자가란 사형 선고를 의미합니다. 예수 전한다고 사형을 시킨다면 사형을 당하라는 것입니다. 살기 위해 믿음을 포기하고 전도를 포기하면 결국 임시는 살아 있는 것 같으나 영원히 죽게될 것이고, 반대로 전도하다가 목숨을 잃은 자는 임시로는 죽는 것 같으나 영원히 살게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전도하러 나갔다가 목숨의 위협을 당해도, 목들 내놓고 사명을 감당하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얼마 후에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되실 것을 연상하시며, 제자들도 똑같은 삶을 살기를 바라고 후에 있을 큰 상 받기를 기원하신 것입니다.

[4]제자 영접하는 자가 받는 보상(40-42)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내보내시면서 주님께서 바로 하나님이시요, 하나님의 일부이심같이 제자들도 주님의 분신이요, 또는 바로 주님을 대신해서 보냄을 받고 있음을 확신시켜 주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알아듣기 쉬운 말로 “너희를 영접한다면 바로 나를 영접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선자자를 영접해 주는 자는 선지자가 받을 상을 받게될 것이요, 의인을 영접해 준 자는 의인이 받을 상을 받게될 것”이라고, 제자들을 영접하는 것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요, 제자들을 영접해 주는 자들도 하늘나라에서 제자들이 받게될 큰상을 받을 것이라고 공언해 주고 계십니다.

마지막 절 42절을 보면 아주 작은 자 하나에게 물 한 그릇이라도 대접했다면 그에 대한 상을 꼭 받게될 것이라고 보장을 주고 계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선지자, 의인, 소자는 제자들을 포함하여 모든 크리스천이 포함될 수 있을 것입니다. 주 예수를 전도하는 자나, 주 예수의 사람들을 대접하는 것은 바로 주 예수를 사랑하기 때문인 것이므로 주 예수를 대접한 것이며, 그들은 상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이며, 우리의 일상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주의 제자 되기 위해 값을 치루라는 것입니다.

주님 오실 때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주님과 함께 영광을 누리게 될 터인데, 그 때를 소망하며 지금 우리가 치루어야 할 크고 작은 값들을 치루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의 일을 해내기 위해 진리를 지키기 위해, 혹 직장을 버리고, 혹 직장 동료와 불화가 되고, 가족 식구의 천대를 받고, 핍박을 받고, 내 부모와 형제와의 불화의 값을 치루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외롭고 멸시를 받는 값을 치루고, 매맞고, 목숨을 버리는 값까지도 치루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주님 첫째의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사업 번창 때문에 내 가족의 어떤 일 때문에 내게 아주 중요한 일 때문에 내게 생각되는 emergency 때문에 주의 일을 주님을 제쳐두거나 버려서는 아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주님은 어떤 크기로 늘 존재합니까?. 내 사업보다, 내 부모보다, 자녀보다 더 크게 자리잡고 있기를 기원합니다. 내 생명보다 더 소중한 자로 늘 존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한인그리스도의 성도 모두가 아낌없이 주를 위해 어떤 값이든 치룰 수 있는 당당한 주의 제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