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초청 – 마태복음 11:16-30

미국 생활이 어떻습니까? 만족하십니까? 아니 다른 말로 바꾸어 질문을 해본다면, 미국에 살면서 미국에서 제공하고 있는 모든 권리를 누리고, 또는 미국은 기회가 많은 나라라는데 우리에게 주어진 많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다 내 것으로 만들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요사이 미국 경제 사정이 나빠지고 있는 결과로 모든 국민이 누릴 수 있는 혜택은 자꾸만 줄어지고 있기는 하지만 우리는 어찌 보면 국가와 주 정부와 시 정부가 제공하고 있는 많은 특권과 혜택을 몰라서 못 누리고 또 알면서도 스스로 포기한 이유로 못 누리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지난주에 우리 야외 예배 장소로 택했던 엘도라도 팍에 가서 잠시 쉬고 오니 얼마나 좋던가요? 그런 아름다운 공원 등 국민 정서와 국민 복지를 위해 많은 프로그램과 혜택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 스스로 관심을 두지 못해 많은 기회들을 놓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요사이 우리 교회 교우 몇 분이 밤에 영어를 배우러 다니고 있습니다. 돈을 얼마씩 내고 다니십니까? 무료이지요. 미국 영어 강사로부터 영어를 무료로 배울 수 있도록 특별 배려를 해 오고 있지만 배우지 않으면 아무런 혜택이 되지 못하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즉 나라나 사회가 무엇을 마련하여 놓고 우리를 초청하고 있지만 우리 스스로 그 초청에 응하지 않으므로 좋은 기회들을 많이 놓쳤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또 나라나 사회가 주는 기회 말고도 우리는 많은 혜택과 기회를 어떤 이유 때문에 놓치고 살아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중에서 누가 이렇게 이야기하실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옛날에 내가 정말 큰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있긴 있었다고 말입니다. 또 큰 부잣집 아들과 딸과 결혼할 뻔했다던가, 잘했으면 내가 한자리 차지하는 건데 어떻게 어떻게 해서 기회를 놓쳤다는 이야기를 우리는 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이와 같이 모든 인간에게는 잡았어야 했으나 잡지 못한 것들이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류 역사상 그때 그것을 잡지 못했기 때문에 영원히 불행할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옛날에 놓쳐 버린 그 기회 때문에 몹시 아쉬워할 것은 없고 현재 주어진 나의 기회를 감사하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부터 100년 이전 사람들을 중심 하여 생각해 본다면 기회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다 잡았던 사람이나 좋은 기회를 다 놓쳤던 사람도 아무 구별이 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누구를 끌어내리고 그 자리에 앉은 행운의 사람이나 끌려 내려와 자리를 빼앗긴 비운의 사람이나 지금은 모두 똑같은 자리인 묘지 안에 머물러 있어서 누가 누구였는지 전연 구별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자들, 대통령의 부인이 되지 못한 것을 너무 아쉬워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옛날에 살았던 역대 대통령의 First Lady나 그 당시의 Last Lady가 전연 구별이 되지 않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영원히 후회스럽고 영구적인 실수로 남게 될 것은 찾아오신 예수를 박대했거나, 예수님과 가까이 사귈 수 있었던 기회가 있었는데 사적인 어떤 이유 때문에 그 기회를 놓쳤는데 다시 기회가 주어지지 못하고 죽어 버린 사람들입니다. 죽은 사람에게는 이젠 심판만 남았는데 심판 주로 오실 주님과 일대 일로 만나서 간격없이 친구와 형제같이 사귈 수 있었던 기회를 놓쳤으니 이젠 그 분을 엄한 재판관과 재판 받을 죄인과의 관계로 만나야 하니 일평생 후회스럽고 돌이킬 수 없는 실수로 남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는 주님께서 그런 답답한 친구들을 비유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며 그런 큰 실수를 저지르지 않도록 깨우쳐 주시기 위해 이 본문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주신 이 말씀을 통해 주님의 초청에 응함으로 잃었던 기회를 다시 찾게 되는 참 좋은 기회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말씀을 4부분으로 나누어 본문을 이해하고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과 우리 생활에의 적용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이 세대의 비유(16-19)

[2]고라신, 벳새다, 가버나움의 비유(20-24)

[3]지혜 자에게 숨기시는 비유(25-27)

[4]주님의 초청(28-30) 입니다.

 

[1]이 세대를 주님께서 어떻게 비유하셨는지를 먼저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당시 세대 사람들의 마음 상태를 삐뚤어진 어린아이와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아이들이 노는 모습에서 아이들의 마음 상태를 이해하셨고, 어른들이 마치 어린아이들과 똑같이 삐뚤어져 있다고 보신 것입니다. 비유로 말씀하시기를 아이들이 어른들이 하는 결혼식 놀이를 흉내내면서 피리를 불고 옆의 친구들에게 함께 노래를 부르며 결혼 놀이를 하자고 하니 싫다고 하여 그러면 슬픈 장례식 놀이를 하자고 해도 그것도 싫다고 하는, 그런 원칙이 없고 의욕도 없고, 생각도 없고, 판단력이 전연 없이 오직 현실에 부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자들이라고 주님은 비유하신 것입니다. 실 예를 들자면 세례 요한이 와서 메뚜기와 석청만 먹고, 금식을 자주하며 금욕적인 절제의 생활을 자주하고 잔치나 식사 초대 등에 전연 합세하지 않음을 보고는 “귀신이 들렸다”고 했고 이젠 주님이 오시어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나누시고 사람들을 사랑함을 보고 “먹기를 탐하는 자”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회개를 외쳤을 떼에 그들이 마땅히 회개했어야 하며, 주님이 구원과 죄에서의 자유를 외칠 때에 그들이 이 구원의 기쁨에 동참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세례 요한의 초청에도 거절하고 주님의 초청도 거절하였으므로 노래부르는 것도 싫고 슬피 우는 것도 싫다고 한 어린아이들과 같다고 비유하신 것입니다.

 

[2]고라신, 벳새다, 가버나움의 비유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세대를 또 소개해 주시기를 주님께서 시간과 정력을 제일 많이 쏟으시어 능력을 많이 행하셨던 고라신, 벳세다, 가버나움이 냉랭한 것을 보시고 경고하시기를 “심판 날에 심판을 받기로 예언된 두로와 시돈에서 그런 권능을 베푸셨다면 두로나 시돈 사람들이 다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또 그런 권능을 소돔에서 행했다 하더라도 그 성이 유황불에 타지 아니하고 지금까지 남아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많은 권능을 행했지만 미지근하거나 또는 오히려 거역한 고라신, 벳세다, 또 가버나움이 심판 날에 오히려 죄악이 들끓었던 두로와 시돈, 그리고 소돔보다도 더 견디기 어려울 무서운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주님께서 자기 고향에서는 대접을 받지 못하신 것까지는 어느 정도 이해되지만 그렇게 권능을 많이 베풀어 이적과 기사를 체험한 도시들이 오히려 믿음을 멀리하여 주님의 엄한 심판을 면치 못하게 됨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인간 사회에서도 도움을 많이 받은 사람이 오히려 원수 짓을 하는 경우가 가끔 있고 오히려 도움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협력자들이 되는 경우를 보게 되는데 주님 당시나 지금이나 인간의 모습은 별 차이가 없으리라 봅니다. 그러기 때문에 지금까지 우리가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무한하신 능력을 배운 우리로서는 더 뜨거운 믿음을 가져서 주님의 초청을 거절하고 우습게 안 고라신과 벳세다와 가버나움이 당하기로 한 심판에서 벗어나라고 경고하신 것입니다.

 

[3]지혜 자에게 숨기시는 비유입니다.

주님께서는 세례 요한도 반대하고, 주님도 반대하며, 능력을 많이 행한 도시들이 회개치 아니하고 교만해지는 것이 우연이 아니고 진리임을 밝혀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지혜 있다 하고 스스로 슬기 있다고 교만한 자들에게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시고 보아도 알지 못하게 하나님께서 숨기시며 오히려 어린아이와 같이 겸손하고 천진한 자들에게는 이 천국의 비밀을 깨닫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겸손한 자에게는 진리를 깨닫는 마음의 지혜를 주시고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교만한 자들은 진리를 깨닫지 못하도록 귀를 어둡게 하고 눈을 못 보게 하여 진리와 상관없도록 만드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일이 어찌 보면 간단한 것 같고 하나님을 우리가 알고 믿는 것이 나로부터 시작된 것 같지만 본문에서는 주님이 이 비밀을 알려 주시기 위해 택한 자만이 이 진리를 깨닫고 믿음을 가질 수 있다 했으니 우리의 믿음이 하늘로부터 오는 선물임을 알게 됩니다. 한없이 겸손하여 하나님을 만나기 원하고,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임을 아는 사람에게는 진리를 알게 하는 지혜를 주시며 하나님이 필요 없는 교만한 자에게는 하나님을 모르게 하는 어리석음을 주신다는 하나님의 확실하신 구원의 길을 제시해 주신 말씀입니다.

 

[4]주님의 초청입니다.

주님께서는 요한을 반대한 자들의 결과도 알고, 주님을 반대한 자들의 결과도 빤히 다 알고 계시며, 고라신과 벳세다와 가버나움의 결과를 다 아시기 때문에 청개구리 같이 꼭 불순종하는 자들이나, 세상 것을 하나님보다 더 귀히 여기는 우상 숭배자들이나, 아무리 갖고 또 가져도 양이 차지 않는 욕심쟁이들과, 자기 죄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있는 자들과, 유한한 인생에 회의를 느끼고 만족이 없고 소망이 없는 모든 인생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겠다고 초청하신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하셨습니다. 세상의 모든 일이 다 수고입니다. 돈을 버는 것도 수고이며 돈을 거두어 은행에 갖다 저금하는 것도 수고이며, 심지어 그것을 쓰러 다니는 것도 수고입니다. 그렇게 피곤하고 수고한 결과는, 돈을 1만불 2만불 저금한 결과는 하나님의 부르실 날이 더 가까웠다는 것뿐입니다. 아니 그 돈을 많이 쌓기 위해 혹 주님 섬기는 것을 중지했거나 게을리 했다면 그 돈을 볼 때마다 그 사업체를 볼 때마다 죄책감이 떠오를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세상과 함께 멍에를 메고 살았다 한다면 모든 결과는 내게 수고요 무거운 짐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런 수고와 짐을 진자들을 모두 초청한 것입니다. 내게 고민이 있고, 내게 불만이 있고, 내게 미움이 있으며 내게 기쁨이 없고 살아야 큰 의미를 못 느끼는 것은 내가 세상의 멍에를 매고 가는 증거인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초청하시면서 “주님의 멍에를 메고 주님께 배우라”고 처방을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가시는 곳에 내가 가며 주님이 하라는 것을 내가 하며 무엇이든 주님이 가시기 원하시지 않는 곳에 내가 가지 아니하고 주님이 원하시지 않는 일을 내가 하지 아니하는 길이 바로 주님의 멍에를 메는 일인 것이며, 주님의 말씀을 상고하고 그대로 실천하는 것이 바로 주님께 배우는 일인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걷고 주님과 함께 먹고 마시며, 주님과 함께 사업을 하는 사람은 모든 짐을 주님이 져 주실 것이므로 쉼을 얻을 수밖에 없으며, 짐을 자기 혼자 지고 사는 사람은 일생 수고와 짐을 벗어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이 교훈 하신 말씀대로 사는 자에게 고민이 있을 수 없으며, 미움이 있을 수 없고 거짓과 속임수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그 마음에 참 평안과 참 안식이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죽으면 자동적으로 모든 짐을 벗어버리게 되므로 안식에 들어갔다고들 하는데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도 모든 것을 주님께 다 맡기고, 주님이 책임지시도록 할 수 있다면 나는 책임이 없음으로 내가 안식에 들어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세상에 지쳐 있는 모두를 초청하십니다. 그리고 세상 멍에를 메지 말고 주님의 멍에를 메라 하십니다. 그러면 마음에 쉼을 얻게 될 거라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본문 말씀을 통해 우리가 얻는 교훈은 무엇이며, 우리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첫째, 자기 중심적인 인간들의 삶은 모순 투성이요 배신적인 삶을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모순적인 삶 때문에 배신 적인 삶 때문에 스스로 피곤하고 큰 짐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모순을 알고 배신했다는 사실을 스스로 시인하게 될 것이므로 자기가 밉다는 고백을 하며 살수밖에 없는 것이 세사의 멍에를 메고 사는 인생인가 봅니다. 남을 지적했던 똑 같은 잘못을 내가 저지르고, 남의 잘못은 지적하고 내 잘못은 어떻게든 숨기려 하는 삶이 세상과 멍에를 함께 한 삶이요 내 중심적인 삶인 것입니다. 내 욕심을 늘 채우지 못한 이유 때문에 기쁨과 만족을 모르는 삶이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내 중심적인 삶에는 언젠가는 친구였는데 언젠가는 갈라서야 하는 모순과 함께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일평생 살았어도 이룩한 것도 없고, 이룩할 수도 없고 늘 피해 의식에 사로잡히고, 늘 실패 인생임을 인식하고 허무 인생, 인생무상이라는 푸념하며 사는 인생이 될 것입니다. 공감하는 친구가 있어서 밤새 허무 인생을 개탄하며 넋두리를 해도 인생은 새로 태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온전히 주님 안에서 거듭나지 않은 내 중심적인 삶에는 온전한 행복도 온전한 안식이 주어질 수 없음을 재확인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참 안식은 주님의 멍에를 메고 사는 삶에서 온다는 확신입니다.

주님의 멍에를 메고 사는 삶이란 주일에 교회에 나온다는 사실만을 말하는 것도 아니며, 성경을 열심히 읽고 열심히 기도한다는 사실만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의 멍에를 멘다는 말은 주님이 내 모든 것의 주인이시오, 무엇이든 주님께서 나를 온전히 통치하실 수 있도록 주님께 온전히 맡기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그 무엇도 주님을 위하는 일이라면 다 희생할 수 있다는 분명한 사실을 잘 알고 실천하는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멍에를 멘다는 말은 육의 욕심을 점점 더 죽여 가며 영적인 욕심이 점점 내게 왕성하는 삶을 살아가는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의 멍에를 메는 삶이란 육 적인 것에 내 삶의 소망을 두지 아니하고 주님이 예비하신 천국 삶에 전폭적인 소망을 두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욕심을 죽이고, 세상에 소망을 두지 않은 자라면, 그 마음에 미움도, 불평도, 고민도, 갈등도 점점 살아질 수밖에 없으며, 장래에 주어질 영광을 소망하며 날마다 평안하며, 감사하는 삶이 이어지게 되므로 그 마음에 참 안식이 주어지게 될 것입니다. 세상에 살면서 돈 싸움, 자리싸움, 명예 싸움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수고스러우며 무거운 짐들을 많이 지게 됩니까? 주님께서는 그런 세상 욕심에서 벗어나 진정한 가치 있는 삶을 살도록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우리 모두를 초청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생 동안 살면서 정말 좋은 직장에 다닐 수 있었던 기회를 놓쳤어도 별 문제가 아닙니다. 아니 정말 좋은 배우자를 만날 수 있었던 기회를 놓쳤어도 큰 문제가 못됩니다. 세상에서 잃어버린 그 어떤 기회는 놓쳐도 별 문제되지 아니하지만 안식을 주시겠다는 주님의 초청에는 우리 모두 응하여 그 기회를 놓치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주신 안식은 모든 것을 초월해서 평안할 수 있으며 모든 것을 초월해서 행복할 수 있으며 심지어 죽음까지도 초월해서 초연할 수 있는 절대적인 삶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안식의 삶으로 우리를 초청하고 계신데 스스로 우리의 눈을 세상에로 돌려서 스스로 수고와 짐을 불러들이지 않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안식의 양은 우리가 얼마나 많은 세상 멍에와 세상 짐을 벗어났느냐에 비례하게 될 것입니다. 세상에서 얼마나 많이 빠져 나와 하나님께 얼마나 가까이 들어갔느냐에 비례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말한다면 세상일에 빠져 있는 만큼 주님이 주시는 참 평안과 안식을 맛보지 못한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의 고된 삶 속에서도 우리가 평안하고 안식을 누리기를 바라십니다. 우리의 가난과 역경 속에서도 주님이 주시는 참 안식을 누리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아니 부자이고 높은 지위의 사람까지도 세상이 주는 안식 말고 주님이 주시는 깊은 안식을 먹으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내 중심의 삶에서 주님 중심의 삶으로 바꿔 살므로 이 안식의 삶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삶을 본받으므로 참 안식과 평화의 삶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이 주님의 말씀에 따라 주님 안에 살므로 모든 수고와 고통을 다 잊고 참 안식을 누리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