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에 대한 허상과 실상 – 마태복음 12:1-13

주님께서 12제자들을 전도하러 내 보내실 때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다”고 말씀하심은 진리를 전파하기 위해서는 많은 수난을 당하게 될 것인지를 미리 아시고 미리 예고를 해 주셨던 사실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인기가 대단해짐에 따라 예수님을 반대하는 분위기가 빠른 템포로 조성되어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의 하는 일에 시선을 집중하고 어떤 책잡을 만한 것을 보는 대로 그런 것들을 내놓고 예수님의 지위를 깎아 내리려 하였던 것입니다. 물론 이런 거센 반대를 무릅쓰고서도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진리를 전파하는 일이 강행되어졌기 때문에 이를 막으려는 종교 지도자들은 어떤 방법으로라도 전도의 기를 꺾어 버리려는 핍박이 가속화되었던 것입니다.

12장에서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안식일을 범했다는 죄목을 들어 율법을 범한 예수님께 도전하고 토론하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박해를 보게 되나 주님은 이런 기회를 이용하여 본인의 메시아 되심을 증거 하는 좋은 기회로 삼으심을 보게 됩니다.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 리라”고 예언하신 말씀대로 예수님의 가족들까지도 진리를 가르치는 일에 방해를 하게 되고 같은 민족인 유대인들의 강한 반대를 맞게 되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범했다는 죄목으로 예수님을 범법자로 정죄하려는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의 변론에 패배하자 그 사건이 시발이 되어 14절에 보면 어떻게 하여 예수님을 죽일까 하는 의논하는 계기가 되었음을 보게 됩니다. 부패된 유대의 전통적인 종교 습관과 의식을 고수하려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부패된 종교를 수술하고 하나님이 바라시는 본래의 믿음으로 회복시키려는 예수님과의 전쟁이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하겠습니다.

이런 전쟁은 예수님 당시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현세에도 같은 양상의 전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에 우리의 눈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을 보면서 우리 자신들을 돌아보아 유대 지도자들이 신앙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의식으로 만족했던 그런 신앙을 우리는 갖지 않도록 변화를 갖는 좋은 기회로 삼아야 할 줄 압니다. 성령께서 우리 각자의 심령을 도와 주셔서 본문이 주는 안식일의 허상과 실상을 바로 이해하므로 모든 하나님의 말씀마다 하나님이 바라시는 본래의 뜻대로 실천하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을 2부분으로 나누어 생각해 보려 합니다.

 

[1]안식일을 범했다는 바리새인들의 지적

[2]이에 대한 주님의 변론입니다.

 

[1]먼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을 범했다고 고소했던 내용을 먼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에서 지적된 일이 두 가지인데 하나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게 되었을 때, 제자들이 너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먹은 것을 바리새인들이 보고, 제자들의 잘못을 걸어 예수님을 넘어뜨리려고 예수님께 고하기를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한 것이며 두 번째의 지적은 안식일에 주님께서 회당에 가셨을 때 거기에 한쪽 손이 마른 사람 즉 한쪽 손의 근육의 기능이 상실된 사람이 있었는데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책잡으려고 예수님께 묻기를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본문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 안식일에 대한 성서적 기원과 유래를 먼저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안식’ 이란 하나님께서 6일 동안 창조하시고 제 7일에 쉬셨던 것에 기원을 두고 있는 것으로 그 안식은 ‘노동의 중지’ 즉 쉬는 것을 의미한 것이었습니다. 그후 처음 나타난 안식이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것으로 모든 이스라엘 사람과 그들의 종들과 심지어 육축까지라도 제 7일은 일을 시키지 말고 쉬라는 율법이 주어진 것입니다. 이 날은 거룩한 날이므로 이 날을 범하지 말고 쉬도록 한 것이며 만일 일을 한 사람은 죽이도록 했음을 출 20:9-11이나 출31:14-17 에서 볼 수 있습니다. 즉 이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리신 법으로 “이 안식일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신 언약의 표징”이었던 것입니다. 안식일의 의미가 넓어져 매 7년마다는 안식년이라 하여 심지어 논밭에도 무엇을 심지 않고 1년은 놀렸으며 심지 않은 논밭에 난 것은 객들이나 짐승들의 몫으로 주인이 거두지 않아야 했던 은혜를 나누는 안식년이 시행되었고 7년씩 7번째의 다음해인 50년째 해는 희년이라 하여 종도 자유를 얻고 팔렸던 기업도 되돌려 주는 자비의 법이 시행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이 안식일에는 성회로 모였음을 레위기 23:3에서 보게 됩니다.

이런 유래를 가진 안식일을 보다 더 잘 지켜보려는 시도에서 안식일을 지키는 39개 조항이 만들어졌고 39개 조항 가운데는 안식일에 밀 이삭을 비벼서는 아니 된다든지, 또는 안식일에는 약 1 Km 이상 걸어도 안된다는 조항들이 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 등 여자들이 안식 후 첫날에 예수님의 무덤에 찾아 간 것도 그 제도를 준수하고 안식일을 피해 왔던 것임을 보게 됩니다. 즉 안식일을 잘 지키기 위해서는 무엇을 사거나, 팔거나, 무엇을 들거나, 음식을 만들거나, 많이 걷거나, 물을 긷거나, 전쟁을 하거나 하는 모든 것이 제한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 안식일이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으로 낙착되었고 또 39개 항목 때문에 꼼짝 만하면 그 조항에 걸리게 되어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되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사람과 하나님을 위해 제정한 안식일이 오히려 하나님께나 사람에게 짐이 되고 만 것입니다. 즉 안식 속에 들어 있는 안식의 본질인 자비와 사랑과 은혜의 맛은 사라지고 걸림과 부담과 비판만 살아 남게 된 것입니다.

이런 유대인들의 유전과 습관 속에 젖어 살고 있었고 남보다도 더 철저히 안식일을 잘 지켜 자기들의 믿음을 사람 앞에 과시하려는 바리새인들로서는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먹은 것이나 안식일에 병을 고칠 수 있다는 주님의 주장은 자기들의 정통 신앙에 위배되는 것이었음으로 주님을 고소할 수 있었으리라 봅니다.

 

[2]이들의 고소에 주님께서는 어떤 대답을 하셨는지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밀 이삭에 대한 답변입니다.

신명기 23:25에 보면 배고픈 사람은 남의 곡식 밭에서 이삭을 따도 되는 것으로 허락되어 있어서 제자들이 남의 밀밭에서 이삭을 따서 먹은 그 자체는 법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었고 안식일에 했기 때문에 이를 바리새인들이 지적한 것인데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정당하였음을 제사장만이 먹을 수 있는 진설병을 다윗이 먹었던 예를 증거로 들어 합법적임을 변론한 것입니다. 진설병이란 떡을 말하는 것으로 성소 안의 금상 위에 2줄로 6개씩 놓아둔 12개의 떡으로 매주 새로 만든 떡으로 바꿔 놓도록 되어 있는데 거두어 둔 떡은 제사장만이 먹을 수 있게 제한한 것이 율법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사울 왕을 피하여 도망하다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 제사장 아히멜렉이 주는 떡으로 다윗과 그의 소년들이 주린 배를 간신히 채운 일이 있었는데 제사장외에는 진설병을 먹는 것이 율법에 어긋나는 일이었으나 배고파하는 다윗을 위해 제사장이 준 사실을 정죄하지 않았음을 바리새인들이 알았다면 안식일에 배가고파서 밀 이삭을 먹었던 사실이 정죄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변론에 이어서 주님께서는 제사장들이 안식일에 진설병을 바꿔 놓는 일이나 짐승을 잡고 가죽을 벗기고 제물을 불사르거나 또 곡물 제사를 드리는 것 등이 안식일을 지키는 율법에는 어긋나는 것이나 제사장들이 안식일에 봉사해도 죄가 없는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성전에서 봉사하기 위해 안식일에 일을 해도 허용이 되는 정도이니 주님은 성전보다 더 크신 분이시므로 더욱 문제가 될 것이 없다는 것이며 주님께서는 안식일의 주인이시라고 선포하심으로 안식일의 법을 주신 분임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러시면서 주님은 안식일의 본뜻이나 알고 안식일을 지키라고 알맹이 없는 제사보다 사랑의 실천이 있는 자비를 원하신다고 제사의 본질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대한 주님의 답변을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묻기를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진 양 한 마리가 있다면 당연히 건져 낼 것인데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한 존재이므로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 주는 선행을 하는 것은 옳은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시면서 그 손 마른 사람의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 손을 내밀매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하여졌다고 기록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책잡아 기를 꺾겠다고 고소한 자들이 주님의 변론에 말 한마디 못하고 완전히 눌리게 된 이번 일을 계기로 어떻게 하여 예수님을 잡아 죽일꼬하는 궁리를 하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본문이 주는 교훈은 무엇이며 우리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안식일과 주일의 본래의 의미를 바로 알고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2:27에 보면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지 않다”고 되어 있음같이 하나님께서 안식일과 주일을 사람을 위해 주셨는데 오히려 안식일과 주일이 사람에게 불편을 주고 피해를 주고 있는 것은 사람들이 본래의 뜻을 잘못 해석하고 사람들이 만든 잘못된 규정 때문인 것입니다. 일곱째 날인 안식일에는 종들도 쉬게 하고 심지어 육축도 쉬게 할뿐 아니라 7년째 되는 안식년에는 논밭까지 쉬게 하며 7번째의 안식년에는 종들도 놓아주고 팔렸던 기본 재산들도 다 돌려주는 긍정적이요, 자유, 자비, 사랑이 있는 풍성한 삶을 위해 안식일이 있는 것인데 종교 지도자들이 본래의 의미대로, 하나님 중심으로 안식일을 실천하지 아니하고, 안식일을 지키는 것을 유대인의 특징으로서, 선민의 과시를 위한 것으로,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기준으로 잘못 적용하므로 안식일은 자유나 안식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을 묶는 포승줄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러다 보니 안식일에 밀 이삭을 딴 것은 곡식을 거두어들인 일에 해당되고 밀 이삭을 비비는 것은 탈곡한 행위에 해당된다고 법규를 만들어 놓았으니 안식일에는 자선도 베풀어서는 아니되는 부자유의 날이 되고 만 것입니다. 안식일을 잘 지키도록 만든 법규는 안식의 뜻을 빼앗고 안식을 짓밟는 결과가 되어 사람이 만든 39개 항목은 사람과 하나님에게 악법이 된 것입니다.

안식일의 이런 잘못된 사상이 기독교의 주일에까지 영향이 되어 현대인인 우리에게도 주일을 풍성한 삶을 내게 가져다주는 좋은 날로 보다 나를 얽어매는 부자유스럽고 불편한 날로 소화되고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주일에 대한 본래의 뜻을 바로 알고 주일답게 보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주일은 안식일의 고정 개념인 무엇을 할 수 없다는 부정적인 개념보다도 오히려 주일에는 무엇을 해야 하는 긍정적으로 받아 드려야 하겠고, 주일을 지키는 것을 성도의 의무로서 받는 소극적인 면에서 반대로 성도가 누리는 특권으로 받을 수 있는 적극적인 면으로 소화되어져야 할 줄 압니다.

 

주일은 우리 인간을 위해 주신 좋은 날로서 이 날을 바로 지키는 길은,

첫째, 일상 생업에서 해방될 수 있어야 합니다.

7 days open 이란 푯말이 바뀌어 Sunday close 란 푯말로 바뀌어져 생업에서 완전히 해방될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도 쉬고 종업원들도 쉬게 하고 짐승까지라도 쉬게 하여 6일 일하고 하루 쉬는 리듬을 지킬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리듬은 하나님이 정하신 리듬인데 이 리듬을 깨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하나님이 내게 주신 “노동에서의 해방”을 스스로 포기하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돈의 노예가 되다시피 한 내 일상생활에서 하루만이라도 그런 노예 생활에서 벗어나 돈의 상전이 되어 보는 것입니다. 주일은 주님이 부활하신 날인데 이 축제일에 생업을 중지하고 축제일을 맞을 수 있는 자유와 특권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일에 일을 하면, 주일에 가게문을 연다면 하나님께서 어떤 벌을 내리겠느냐고 누가 묻는 다면 해방감 과 축복을 누리지 못하는 벌을 받는다고 답하고 싶습니다.

 

둘째, 하나님께 예배드려야 합니다.

내게 생명을 주시고 내게 생업을 주시고 날마다 숨을 쉬고 살게 하시며, 내가 죽은 후에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살게 하실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에게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의미가 꼭 의무적인 소극적인 면으로 받아 드려질 수 있겠지만 이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는 영광이 되고 내 삶이 활력이 충전되는 삶의 제사가 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내 죄의 용서를 빌며, 내게 힘을 주시도록 기도하며, 남을 용서해 달라는 기도는 나를 늘 새롭게 태어날 수 있도록 만들어 줄 것이며,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드리는 찬송은 내 마음에 무한한 소망과 기쁨과 감사를 충만케 할 것이며, 내게 주시는 말씀은 내게 밝은 등불이요 시험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는 안내자가 될 것이며, 감사하여 드려진 헌금은 내 삶을 더욱 풍성하게 해줄 것이므로 하나님께의 예배는 내가 풍성한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너무나도 감사한 방법이기도 한 것입니다.

 

셋째, 내가 가진 것을 나누는 성도의 교제가 있어야 합니다.

내가 가진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시고 청지기로서의 역할을 하게 한 것이 무엇입니까? 주일에는 내가 가진 것을 가지고 형제와 나누는 좋은 날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가진 것으로 약한 자를 돕고, 병든 자를 돌아보며, 죄에 억눌린 자, 소망이 없는 자, 빛이 없는 자에게 자유와 소망과 빛 되시는 그리스도를 만나게 하는 좋은 날로 보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일상 생업에서 벗어나 평상시에 하지 못했던 봉사의 삶, 나누어주는 삶을 살게 될 때 내 삶의 의미와 기쁨이 증폭되는 축복의 삶이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제사보다 자비를 원하신다 하셨는데 자비의 제사란 인간끼리 나누는 사랑을 강조한 말입니다. 사랑과 용서의 생활이 있는 자의 예배를 받으신다는 강조인 것입니다. 부정적으로 표현한다면 시기, 질투, 미움, 욕심 속에 사로잡힌 예배는 하나님 앞에 합당치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 문제들이 내 마음에서 해결됨이 없이 예배에 임하는 것은 온전히 열납되는 제사에 미흡하다는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이렇게 볼 때 사람과의 나눔의 생활은 성도의 일상생활에 크게 부각되어질 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주일은 우리 성도들을 위해 주신 축복의 날입니다. 하나님께 주시고자 하는 풍성한 축복을 누리시는 좋은 주일들을 보내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