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모범을 보이신 예수님 – 마태복음 12:14-21

지금 연세가 50, 60 70 되신 어른들에게 인생을 20부터 다시 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인생을 어떻게 설계하여 보시겠습니까? 어떤 학교 출신이 되고 싶으시며 직업은 무슨 직업을 가질 것이며, 어떤 배우자를 만나고 싶으시며 자녀들은 몇이나 낳아 어떻게 길러 보시겠습니까? 이렇게 본인이 원하는 대로 대통령이 되고 싶으신 분들이 대통령도 되고, 몇 천만 불을 가진 부자도 되어 보고, 내가 해보고 싶은 것을 마음껏 다 해볼 수 있게 된다면 그가 죽을 때 이젠 죽어도 만족하다고, 성공한 인생을 살았다고 말할 수 있게 될까요?

요사이 흑인의 민권 운동을 위해 수십 년간 감옥살이를 했지만 결국 그가 그 나라 대통령이 된 남아프리카의 만델라 대통령을 보면서, 또 대통령을 하다 물러났던 닉슨 전대통령의 죽음을 보고, 또 유명한 케네디 대통령의 아내였었고 또 이 세상에서 가장 호화로운 사람 오나시스의 아내로 살다가 아직 그렇게 늙지 않은 나이에 사망한 재클린 여사의 죽음을 보면서, 100억 재산을 일구어 두고 그 재산에 탐난 자기 장남에게 죽임을 당했던 50줄도 못된 부부의 죽음을 보면서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가장 후회하지 않은 인생을 살 것인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 각자는 우리의 인생을 돌아보며 성공된 인생을 살았다고 자평하십니까? 실패된 인생이었다고 자평을 하십니까? 왜 그렇게 평가를 하십니까? 얻고 싶은 것을 다 얻어서 입니까? 아니면 얻고자 한 것을 다 못 얻어서 입니까?

요사이 젊은 학생들이 자기들의 장래를 결정할 때 가장 영향을 많이 받는 것이 자기 부모도, 자기 선생님도 아니고, 위인전을 통해 결정한 것도 아니고 TV 프로그램 같은 것에서 영향을 받아 자기 인생의 운명을 결정하게 되는 율이 가장 높다고 합니다. 자기 부모를 죽인 아들이 비행기 타고 가면서 보았던 영화에서 부모를 살해할 방법을 얻어냈다는 말이 바로 이런 데이터를 크게 뒷받침해 주는 듯합니다.

우리들은 내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 지에 대한 답을 어디서 얻고 계십니까? 나의 삶에 대한 상담자는 누구입니까? 내 생각을 결정짓는 근거는 무엇이며 누가 내 생각을 결정지어 주십니까? 아이 벤 여인이 잘생긴 아이 사진을 보고 내가 벤 아이가 이 아이를 닮아 주기를 바라고 늘 그 사진만 쳐다본 다고 하던데 내가 성공된 삶을 살기 위해 누구 사진을 날마다 처다 보고 계십니까?

이 세상에 살았던 모든 인생들은 자기 인생을 돌아보며 과거를 후회하지 않은 사람이 별로 없으리라는 생각을 해보고 인생을 다시 살 수 있다면 과거를 다 지워 버리고 다시 살고 싶은 마음들이 공통적으로 있을 것이라 생각해 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인생을 다시 산다 할지라도 또 후회할 수밖에 없는 인생을 운영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 생각하게 되는 바로 그 이유는 내가 날마다 쳐다보고 있는 사진이, 내가 목표하는 그 목표가 우리 눈에 성공했다고 보여지는 모순 투성이요 실수투성이인 어떤 인간의 겉모습이기 때문일 거란 생각을 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흠없고 점없이 완전한 삶을 사는 길이란 후회함이 없는 삶을 사신 예수님의 삶이 우리들 삶의 모델이 될 때에만 가능할 것이라고 믿게 됩니다.

오늘 본문서 주는 예수님의 삶에 우리 눈의 초점을 맞추어 날카로운 눈으로 말씀을 보시고 그분의 삶을 본받아 그분이 성공적인 삶을 통해 영원히 행복하시듯 우리 모두도 성공된 삶을 통해 행복하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본문을 3부분으로 나누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1] 예수님에 대한 두 가지 반응(14-16)

[2] 선택된 종(17-18)

[3] 주님의 일(19-21)

 

[1] 먼저 주님에 대한 두 가지의 반응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선한 사역과 가르침은 불의한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커다란 찔림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가르침대로 회개하고 돌이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하고 의논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그들의 음모를 알아차린 주님께서는 그 도시를 피하여 다른 도시로 옮기셨는데 많은 무리들은 주님을 좇았음을 보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주님을 필요로 하여 따르는 자들에게 그의 사랑을 나누어주시어 그들의 모든 병을 고쳐 주신 것입니다. 자비를 베푸신 예수님을 시기하여 어떻게 해서라도 죽이겠다는 무리도 있고 또 반면에 주님이 그들의 삶에 꼭 필요한 인물이므로 주님을 따랐던 무리들이 있었음을 보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자기를 따르는 자들의 모든 병을 고쳐 주시고 이런 이적 행하신 사실을 공개하지 말기를 무리들에게 부탁한 사실을 16절에서 보게 됩니다. 어떤 이유였을까요? 우리가 몇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주님을 반대하는 종교 지도자들을 되도록 자극하지 않으므로 주님께서 전도의 기회가 더 길어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주님께서는 핍박하려는 지도자들의 눈치를 알아차리고 다른 성으로 피하셨으며 아직 주님의 때가 이르지 않았으므로 그들과 정면 대결을 피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약해서 도망치신 것이 결코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그가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 당하실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으므로 그때까지 더 많은 사람에게 그를 보내신 하나님을 소개하고, 주님께서 가르치시고 모범을 보이실 겸손과 사랑과 소망을 소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자기의 목숨을 내놓으시고 죽음을 기뻐 택하시는 참 용기를 보여줄 그 때 까지 시간을 벌기 위함이었습니다.

둘째로는 예수님을 세상의 왕으로 세우려는 군중들의 움직임을 막으려는 의도였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2]두 번째는 선택된 종입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 중 17절부터 21절까지는 메시아에 대해 예언된 이사야서 42:1-4 을 인용한 것으로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그가 택하신 종, 즉 메시아에 대해 기록해 주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위대한 뜻을 성취하기 위해 택한 일군이란 것입니다. 다른 말로 말한다면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자기를 온전히 바칠 겸손히 준비되어 있고, 그 뜻을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는 성령을 풍성히 소유하신 분임을 본문에서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이사야서에선 “내가 붙드는 나의 종”이라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일을 시키기 위해 꼭 필요하여 하나님께서 붙드는 종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직장에서, 우리의 사회에서 우리를 놓칠세라 우리가 붙들림을 받는 존재가 될 때 얼마나 자부심을 갖겠습니까? 반대로 요사이 같은 불경기에는 혹시나 잘리지나 않을까 걱정하는 처지가 있을 수도 있음을 생각해 본다면 주님께서는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사역을 위해 붙들림을 받는 분임을 보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세례 받으실 때 또 변화 산상에서 하늘에서 소리 있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였는데 본문에서도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나의 사랑하는 자로다” 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아버지께서 기뻐하실 만한 아들, 아버지 마음에 꼭 드는 아들, 부모를 거역할 어떤 틈도 없는 아들이라면 그 어떤 아버지도 자기 아들더러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께 완전히 인정받는 하나님의 일을 맡은 자요, 하나님께서 붇든 자요, 하나님 마음에 만족한 사랑하는 자요, 그가 맡은 일을 할 수 있도록 능력을 받은 자요, 실지로 빈틈없이 큰 일을 해 낸 위대한 아들이었던 것입니다.

 

[3]세 번째는 주님의 일입니다.

주님께서는 자기가 해내야 할 일을 맡은 분이셨고 그 맡은 일을 완전 무결하게 해내신 완성자이십니다. 본문이 소개하는 주님의 일하는 모습이나 그의 일은, 첫째 정의를 선언하는 것이었습니다. 무엇이 하나님께와 사람에게 옳은 일인지를 만인에게 소개하는 것입니다. 즉 무엇이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의인지를 선포하되 유대인에게나 이방인에게 차별대우하지 않고 의를 선포하므로 누구나 구원에 이르게 하고 누구나 심판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공평과 정의를 실현시킨 것입니다. 세상 어느 구석엘 가나 인종 차별, 지방 차별, 학교 차별, 빈부 차별 등 차별을 받을 수밖에 없는 세상에 차별을 완전히 초월하는 정의와 공평의 공동체를 선언한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데 어떤 차별을 느끼게 된다면 그 공동체는 주님 중심의 공동체가 아니라 사람 중심의 불공평한 공동체라 판정을 내려도 무방하겠습니다. 주님은 정의와 공평을 선언하셨고 그것을 실천하셨는데 그를 따른다는 제자들이 차별을 실시한다면 그것은 주님의 공동체라 할 수 없겠습니다.

두 번째는 주님께서는 겸손을 실행하셨습니다. 본문 19절에서 소개되는 주님의 모습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하였습니다. 본문에서 들렌다 는 말을 영어 번역에서 보면 “울다”, “소리지르다”로 되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본문이 주는 의미는 주님께서 맡으신 일을 수행하실 때 목적달성을 위해 묵묵히 겸손하게 행동으로 실행하신다는 뜻입니다. 말로 떠들거나 소리 시끄럽게 광고하거나, 일을 해내야 하는 방향을 잃고 다투고 싸우는 일이 앞서는 그런 일이 결코 없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소리만 시끄럽고 일은 하나도 진전이 없거나, 무슨 일을 시작도 못하고 싸움만 일삼는 우리 사회의 부조리에 반성을 촉구하는 메시지임에 틀림없습니다. 사회에서야 어떻든 심지어 교계에도 같은 풍조가 만연해 있어, 선전이나 앞세우고, 자기 이름이나 내려고 자리다툼을 일삼거나 온 세상에 선전하려 큰 대회를 주최하는 것을 일삼는 우리 교계의 개선을 강력히 촉구하는 설교임에 틀림없습니다. 소리 없이 행동으로 일하는 사람, 자기가 한일을 길거리 사람이 들을 수 없이 은밀히 일하는 자세. 이것이 주님이 모범을 보이신 일하는 자세인 것입니다. 주님의 등단은 많은 군중이 모여 화려한 의식을 열어 어벌쩍하게 하심도 아니었음을 우리는 눈여겨보면서 필요 이상으로 화려한 의식을 좋아하는 우리 마음의 뿌리를 뽑아야 함을 배우는 기회가 되어야 할 줄 압니다.

세 번째는 주님께서 격려를 실행하신 것입니다. 20절에 보니 “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라 하였습니다. “상한 갈대” “꺼져가는 심지” 란 상처받은 마음, 매맞은 사람, 눌림 받고 실망하고 안전이 업고, 열등의식을 갖고, 부끄러워하며, 패배감에 젖어 있는 사람들에게 위로와 격려를 주시되 주님께서 재림하실 심판의 시기까지 끊임없이 지속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손이 아니었다면 쓰러져 버릴 수 있는 연약한 심령들에게 위로와 격려를 주시는 분으로 나타나십니다. 주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초청하신 바 있는데 세상 짐을 지고 수고하고 있는 무거운 짐진 자들이란 바로 본문에서 말한 상한 갈대나 꺼져가는 등불과 같은 맥락의 사람들입니다.

네 번째는 소망을 실현시키신 것입니다. 21절에 보니 “이방인들이 그 이름을 바라리라” 했으니 이방인들이 어떻게 아브라함의 자손이 받는 축복을 받겠으며, 이방인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 딸이 되겠습니까? 그런 소망은 오로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에 따라 주님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이방인들도, 유대인에게 젖붙임을 받아 영적 이스라엘 사람이 되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주를 믿음으로 내리실 심판을 피하게 하셨으며, 신랑으로 오실 예수님의 신부와 같은 자리까지 이방인들을 끌어올리신 것입니다. 바랄 수 없는 것을 실현시켜 주셨으니 메시아가 오시어 해내실 일을 완전히 해내심으로 예수님은 오시리라 예언된 메시아이심이 완전히 증거 된 것입니다. 이방인인 우리에게 삶의 소망을 실현시키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본문을 통해 어떤 교훈을 얻게 되며 우리 생활에 어떻게 적용을 할 수 있겠습니까?

 

33 년을 살았지만 완전한 삶을 사신 예수님의 삶의 모형을 따라 살아 나가라는 것입니다.

완전한 삶이란 그 삶 속에 미움과 교만과 갈등과 빼앗음이 없고 후회함이 없는 삶을 말합니다. 우리가 새롭게 태어나면 되어 보겠다는 높은 자리도, 아니 재벌도, 인기 있는 어떤 직업인도 그 마음속에 갈등과 허무와 불만에서 해방될 수 없는 존재들인 것으로 알아야 할 것입니다. 무엇을 차지하기 위해 빼앗아야 하고 미워해야 하는 과정에서 그 마음은 상처뿐인 영광을 누리고 있다고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비록 가졌다 하더라도 잠시 잠간의 영광인데 그 영광을 위해 나를 소비하고 임종시에 후회하는 어리석은 인생을 살아서는 아니되겠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가르침은 이 세상 사람들의 방법과 늘 달리하셨습니다. 사람의 방법은 자기가 높아지기 위해 이웃을 끌어내려야 하고, 내가 무엇을 갖기 위해 남의 것을 빼앗아야 하지만 주님의 방법은 높아지고자 하면 스스로 낮아지고, 살고자 하면 죽고, 섬김을 받고자 하면 섬기는 자가 되고, 받는 자보다 주는 자가 더 복이 있다 하신 것입니다. 원수를 갚는 길은 원수를 사랑하는 길이라고 가르쳤으니 처음부터 우리의 시작과 주님의 시작이 다른 것입니다. 처음이 달랐다면 끝이 달라지게 될 것은 뻔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인생의 가치관을 외모의 나에 두고, 인생 성공 여부의 판정을 외적인 나를 기준 하여 판정을 내리는 인생은 결국 몇 번 태어나도 또 후회 뿐이요 아무리 오래 살아도 아쉬운 인생을 살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다시 태어날 수도 없는 목숨 하나만을 받은 지극히 나약한 존재들입니다. 억울하게 죽었다 하더라도 한번 죽으면 그것으로 그 인생은 끝나 버리는 궁색한 인생살이인 것입니다.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된 것임을 어려서부터 알고 인생을 보다 진실히 살도록 해야 함에도 때가 이미 늦어 버린 때에야 세상 다 헛것임을 알게 되는 어리석고 스스로 속아 사는 인생들인 것입니다. 무엇이 되어 보겠다는 야망으로 시작한 모든 인생은 결국 다 헛것이라고 고백 한마디만 남기고 죽어 가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의 인생살이의 참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처음부터 삶의 목표가 잘못 설정되었고, 삶의 모델이 바로 인생 허무를 고백하게 될 인간 겉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우리의 삶이 어떻게 시작했든지, 또 어디까지 왔든지 상관없이 우리는 후회 없는, 아쉬움 없는 인생을 새롭게 시작해야 하겠습니다. 그 길은 다만 주님이 사신 인생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진을 성경을 통해 날마다 바라보며 그가 어떻게 생겼고, 그가 어떻게 사셨는지 그 모습대로 우리가 닮아 보려고 최선을 다하여 사는 것이며 주님께서 살라 하신 교훈대로 살아 나가는 것입니다. 내 인생을 누가 뭐라 평가하든지? 사회 풍조가 어떻든 우리의 관심은 주님의 삶의 모델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주님의 삶은 어떤 삶이었습니까? 그의 목표가 무엇이었습니까? 그의 삶과 그의 삶의 목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란 세상은 유한하고, 인생은 유한하므로 잠깐 있다 없어질 세상 것에 가치관을 두지 말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가치관을 두고 살아 나가라는 것입니다. 인생 성공의 판정을 세상에서 이룬 것에 두지 맙시다. 마땅히 미래의 삶을 얼마나 준비하며 살았느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무엇을 얼마나 얻느냐고 아니고, 오히려 그 얻고자 했던 것, 세상이 선호하고 있는 것에서 얼마나 우리의 마음이 빠져 나올 수 있어서 얼마나 자유할 수 있느냐 여야 할 것입니다. 또 얼마나 지금 갖고 있느냐에서 얼마나 주었느냐로 생각이 바뀌어져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삶이란 바로 주는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주는 삶에 미움이, 시기가, 욕심이, 갈등이 있을 수가 없을 것이며 상한 심령에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은 심령에 낙담이 있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어려운 사람을 돕는 심령에 불만이 있을 수가 없을 것이며 자기를 희생하는 삶을 사는 사람에게 교만이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자기를 나타내려고 하지 않은 겸손한 삶, 남을 위해 사는 봉사와 희생적인 삶, 미래를 바라는 삶, 이 삶이 바로 주님이 사신 행복한 삶이었습니다. 그런 그의 삶은 과거에도 행복했고, 현재도 행복하며, 또 영원히 미래에도 행복한 삶을 가져다주었던 것입니다. 현재도 행복하고 미래에도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우리 모두 주님의 삶을 모델로 삼고 그의 삶을 닮아 가는 삶을 사실 때 우리도 주님과 같이 하나님의 택한 종이요, 하나님이 사랑하고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 이런 음성을 듣는 성도들 되시기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