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형제, 내 자매, 내 모친 – 마태복음 12:46-50

지난 두 주 동안에는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그 중 하나님을 가장 엄격하게 잘 믿는다는 바리새인들을 향해 예수님께서 “독사의 자식들” 또는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 책망하심으로, 혈통으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택한 백성이었지만 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영접하지 않은 이유 때문에 선택된 백성으로서 대우를 받지 못한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시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심을 수없이 선포하시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심을 만방이 알게 하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 편에 서시어 많은 기적을 베푸셨지만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구원의 참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예수를 영접하기는커녕 메시아의 구원의 행진을 방해한 무리들을 향해 “내 백성이 아니라, 내 가족이 아니라” 선포하신 말씀이 되겠습니다. 그들은 초청은 받았으나 택함을 받지 못한 무리들이며 이들은 택한 백성이라는 자부심만 갖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서 사는 것으로, 즉 이 세상에서 사는 것으로 인생의 막을 내리게 되는 육적 이스라엘 사람들을 소개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이와 반대로 혈통에 있어서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님으로 택한 백성이 될 수 없는 사람이라도 예수님을 메시아로 영접하므로 하나님의 택한 백성,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진리를 선언해 주므로 처음에는 초청 받지도 못한 존재들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택함을 받은 무리들을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이들은 태어날 때 보잘것없는 이방인으로 태어났거나, 태어날 때부터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태어났거나 주 예수를 구세주로 받아 드림으로 이 세상에서 사는 것으로 인생의 막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마련하신 영적 가나안 땅인 “새 예루살렘”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히 살게 될 영적 이스라엘 사람들을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소개받는 모두는 이 세상에서 사는 것에만 중점을 두지 말고 예수님께서 예비하신 “천국”에 초점을 맞추어 자나깨나 하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성공적인 인생을 운영하여 결과적으로 하늘 나라에서 기쁨을 마음껏 누리시는 성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본문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본문을 이해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예수님의 육적 가족(46-47)

[2]예수님의 영적 가족(48-50) 입니다.

 

[1]먼저 예수님의 육적 가족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에게와 서기관들에게 시기와 미움을 받게 되어 그의 사역에 많은 고통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나사렛에서 성장한 목수의 아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스스로 선포하므로 전통적인 종교관을 갖고 있는 유대 지도자들에게 시기와 미움을 샀던 것은 충분히 이해도 됩니다. 더욱 자기들은 무기력한데 반해 예수님은 가르치는 것에나 능력 행하는 것에서 월등히 뛰어나므로 “그를 어떻게 죽일꼬”하는 궁리가 나올 수 있었으리라 봅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반대만 해도 힘겨운 일이었는데, 이젠 예수님의 가족들이 예수님의 깊은 뜻을 이해하지 못해 그의 사역을 만류하기에 이르렀으므로 예수님은 그 누구의 반대보다도 가족들의 비 협조는 마음에 걸리는 것이었으리라 생각됩니다.

본문 46절에 보니까 예수님께서 무리들에게 하늘 나라의 진리를 가르치실 때에 그의 모친과 동생들이 예수께 말하려고 밖에 서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마 주님께서는 집안에서 가르치시고 계셨으며 또 무리들이 많이 몰려와 있어서 집안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예수님께 무슨 말을 할 수 있을 기회를 얻으려고 기다리고 있었나 봅니다. 물론 본문에서는 “예수께 말하려고”라고만 기록해 주고 있으므로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알 수 없으므로 주님의 사역을 방해하려 했다는 내용으로 보기에는 좀 무리라고 생각할 수 있겠으나 막 3:21에 보면 “예수의 친족들이 듣고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고 기록되어 있어서 예수님께 현재 그가 하고 있는 천국 사역을 중지시키고 집으로 데려가려 했음을 보게 됩니다. 나사렛 마을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족들에게 예수님을 집으로 끌어오라고 말들 했을 것으로 짐작도 해봅니다.

마 13:55-56 에 보면 예수님의 가족을 소개하면서 모친 마리아,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 그리고 누이들이라고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이 가족들이 예수님께서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므로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미워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서는 예수님의 신변에 무슨 일이라도 생길 것을 염려하여 어머니와 형제들의 입장에서 예수님을 보호해야 하는 목적으로 데리러 올 수도 있었을 것이며,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도 하고 또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을 많이 하므로 능력 있고 총명한 그가 헛것에 사로잡혀 인생을 낭비하고 있다고 아쉬워하는 의미로 그런 것에서 벗어나도록 그를 데리러 왔으리라고도 보아집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고 이미 제자들에게 예고한바 있었는데 예수님의 가족들이 하늘나라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사역을 이해 못하고 오히려 그의 사역을 중지시키려 예수님을 찾아오므로 스스로 자기 가족 식구의 반대를 당하는 체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제일 마음 아픈 것이 바로 자기 가족이 이해해 주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할 때 주님께서도 많이 답답하셨으리라 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선지자가 제 고향에서 대접을 받지 못한다는 말씀을 하신 바대로, 자기와 제일 가까운 가족에게서나 자기 마을 사람들은 너무 가깝게 지내고 친근하다는 이유로 오히려 가치를 바로 평가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 사실인 것입니다. 자기 가족 식구 중에서 메시아가 있는데도, 또 그 마을 사람 중에서 메시아가 났는데도 그 가족이나, 그 마을 사람들은 그를 믿지 못하고 또 등한하며 그의 값진 가르침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거나 또는 오히려 미쳤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족들이 밖에 서서 기다리고 있을 때 “한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말씀 드리기를 보소서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섰나이다”고 예수님께 전해 준 사실이 47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2] 다음은 예수님의 영적 가족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모친과 동생들이 밖에 서 있다는 전달을 받은 예수님은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하시므로 가족 관계를 부정하는 듯한 오해를 나을 수 있는 질문을 던지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자기 어머니를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모시도록 부탁한 효성스런 태도를 보아 서 예수님께서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고 하신 질문은 신앙을 위해서는 가족을 버려야 한다는 의미도 아니며 신앙을 위해서는 가족을 등한히 돌보아도 된다는 그런 의미는 전연 내포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믿음이 좋다는 어떤 사람 중에는 교회나 신앙 생활을 핑계 대고 가족을 돌보지 않는 것이 당연한 것 같이 변명하는 경우를 보게 되는데 딤전 5:8에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고 한 말씀을 보아도 주님께서 가족 관계를 부정했다는 의미로는 전연 볼 수 없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주님의 의미는 50 절에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신 대로 영적 가족 관계를 강조하고 그의 중요성을 선포하기 위함임을 알게 됩니다. 추호도 주님께서 가정은 별것 아니므로 게을리 해도 된다는 의미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으로 오해해서는 아니될 것입니다.

주님의 사역을 중단시키려고 달려온 사건을 이용하여 “영적 가정”을 선포하는 주님의 일하시는 방법을 눈여겨보시기 바랍니다. 동물적 가족의 특성은 이기적이요, 배타적이요, 폐쇄적이며 가족적으로 얻은 이익을 가족 이외의 사람들과 나누기를 싫어하며 타인이 가족 안에 끼는 것을 거부하고 타인은 언제나 경쟁자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혈육으로 구성된 가족의 울타리에 갇혀 있는 한 동물의 차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며 인간이 동물의 차원을 벗어나는 때는 혈육으로 맺어진 가족 차원의 울타리를 넘을 때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족의 울타리를 넘는 도약이란 가족의 거부가 아니라 승화이며 초월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이 지평선에서 하나가 되듯 욕심 많은 동물적이요 세상 ]적인 내가 영적이요 하늘나라 적인 나로 승화된 모습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성도들이 가족관에서 혈육의 담을 뛰어넘지 못하는 약점을 아시는 주님께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 하셨고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바로 내게 한 것이라” 하심으로 단일 공동체요 영적 공동체인 교회 가족의 울타리를 쳐주신 것입니다.

49절에 보면 손을 내미시어 제자들을 가리켜 가라사대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나의 모친이요, 나의 동생들이라고 손으로 가리키신 “제자들”이란 각종 병자들인 귀머거리, 벙어리, 소경, 문둥병자, 앉은뱅이, 창녀, 귀신들린 자, 간질 병자, 가난한 자, 실업자 등 심지어 자기 혈육의 가족들에게서조차도 천대받는 자들을 가리켜 하신 말씀입니다. 자기 어머니나 자기 동생이 문둥병에 걸렸고 앉은뱅이일 때 자기 부모를, 자기 동생을 자기 부모라, 자기 동생이라고 자신 있게 남에게 소개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께서는 육적으로는 전연 혈연 관계가 없고 사회적으로 밑바닥의 인생들을 향해 저들이 주님을 받아 드리고 따랐던 이유 때문에 나의 모친이요 형제들이라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히 2:11 에 보면 주님께서는 우리 같은 부족한 인생들을 두고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신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죄인들을 의인이라고, 또 사회적으로는 밑바닥 인생들일지라도 “누구든지”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모친이요 형제들이라고 선포하심은 복된 소식이요 놀랄 만한 소식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을 받아 드린 모두를 주님께서 자기 형제라 부르시는 것을 주저하거나 부끄러운 일로 생각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라 함은 그의 과거 신분이나 현재 신분을 묻지 않은 것입니다. ‘누구든지’란 개방성, 포용성, 무한대성이 내포된 것으로 빈부, 지역, 문화, 인종, 사상, 계급의 차이 없이 영원한 세대에 이르기까지 영구적 공동체에 들어올 수 있음을 보장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의 3대에 사는 누구든 주 예수를 받아 드림으로 모두 주님의 형제가 될 수 있다는 초청인 것이며 아무런 차별대우 없이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하기만 하면 그가 곧 하나님의 아들이요 딸이며 주님의 형제들이 될 수 있다는 복된 소식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란 그가 죄인이었다 하더라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 드리고 세례 받아 죄사함 얻은 자를 말하며,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천국을 소망하며 자기를 부정하고 주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 모두는 하나님의 자녀들이요 예수님의 형제들이 된다는 한 차원 높은 가족 관계를 소개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본문 말씀에서 어떤 교훈을 받게 되며 우리 생활에 어떻게 적용을 할 수 있겠습니까?

 

첫째, 예수님의 형제가 되자는 것입니다.

우리같이 욕심 많고 쉽게 남을 깔보는 자들에게 주님의 형제가 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 길이란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라면 누구든지 주님의 형제요 자매가 될 수 있다고 문을 활짝 열어 주신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란, 아니 주님의 형제가 되는 길이란 주님과 한집에서 태어나고 한집에서 생활하며 같은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행하신 모범을 보고 닮으려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이미 어머니 배속에서 나와 버린 사람더러 다시 태어나라 하신 주님의 말씀대로 내 모든 죄를 하나님께 회개하고 하나님 안에서 새로 태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새로 태어난 모두는 먼저 태어나신 분이 하는 대로 따라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형님 되신 예수님이 가신 길을 그대로 따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형님 되신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위해 자기의 뜻과 욕심을 다 버리신 분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늘 자기 생활의 최 우선 순위에 두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형제가 되는 길은 육적으로는 점점 더 다이었을 해 가고 영적으로는 점점 살져 가는 길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육적으로 아주 바쁘고 육적으로 많이 부강해지기 시작하면 영적으로는 메말라 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면에서 예수님의 형제가 되기 위해서는 체중 조절을 잘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잘 믿는 사람이 되려 한다면 포기해야 할 것은 포기하고 잘라 버릴 것은 잘라 버리고 축소시킬 것은 축소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먹고 싶은 것을 다 먹고 운동도 하지 않으면서 왜 이렇게 살만 찌는지 모른다고 한다면 아니되겠지요? 예수님의 형제가 되지못한 자는 죽으면 인생은 끝나 버리는 것이고 예수님의 형제가 된 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이 마련하신 새 예루살렘에서 무궁한 복락을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분명히 자신을 점검해 볼 때 어느 때는 하나님께 더 쏠려 있을 때가 있고 어떤 때는 세상에 더 쏠려 있을 때가 있음을 스스로 알게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느 자리에 있습니까? 열심히 공부하거나 열심히 일을 하다 보면 반면에 성경 읽는 것, 큐티하는 일에 등한히 하게 되어 자연히 자신은 세상 쪽으로 가고 있을 것이고 또 어떤 때는 자신을 반성하고 열심히 말씀을 보고 큐티를 꾸준히 해 나가다 보면 영적으로 풍성해져서 예수님 쪽에 자기가 쏠려 있음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자신을 반성해 볼 때 자신의 체중이 세상에 쏠려 있고 세상 기쁨에 살고 있다면 빨리 빠져 나와 주님 편에서야 할 것입니다. 너무 몸이 불어난 사람은 다이었을 하기 너무 어렵기 때문입니다. 몸이 불어난 시기에 주님이 오시어 체중을 재신다면 우리는 신체 검사에 불합격이 되고 말 것입니다. 날마다 스스로 자기 신체 검사를 하여서 내가 지금 세상에 쏠려 있는 가? 예수님 편에 있는 가 확인하고 예수님 편에 서 있도록 하므로 늘 예수님의 형제가 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의 형제들끼리 나눌 수 있는 깊은 사랑을 나누어야 합니다.

육적 가족의 담을 넘지 못하는 영적 미숙아가 되어서는 아니됩니다. 육적 가족같이 사랑으로 지내는 내 가족을 늘려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예수님의 형제 된 모두를 우리의 참 형제로 맞을 수 있는 그 가치를 새롭게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육신의 가족들은 이 세상 사는 동안이 전부이지만 영적 가족은 영원히 하늘 나라에서 함께 살게 될 영원한 가족인 것입니다. 육적 가족은 영적 가족의 모형이요 영적 가족이 우리 가족의 실체인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주님께서는 모든 제자들을 자기의 형제요 자매라고 지칭하시며 믿지 않은 육친의 가족들 보다 우선함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부르는 형제의 가치를 새롭게 깨달아야 합니다. 형제란 천국에서 함께 살게 될 가족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형제라, 자매라 부르는 우리는 더욱 사랑스럽게 서로 맞고 하나님의 피를 나눈 영원한 내 가족임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내 믿음을 재 보는 자는 내가 얼마나 육적 가족의 울타리를 넘을 수 있어서 내 가족이 얼마나 확장될 수 있느냐에 있다고 보아도 될 것입니다. 그가 돈이 있던 없던, 어떤 인종이든, 그가 젊거나 늙거나, 그가 천하거나 귀하거나, 그가 병들었거나 불구이거나 그가 예수님을 영접한 예수님의 형제라면 우리가 뜨겁게 사랑할 수 있는 천국 백성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나이 드신 분들에게 형제 자매라 부르게 되면 듣기 거북한 것이 사실이나 그건 형제란 단어가 얼마나 감격스런 단어인지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형제란 주님의 형제, 주님의 혈통, 예수님의 가족이란 말이기도 합니다. 우리 모두는, 아니 주 예수를 믿고 영접한 모든 인류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하고 예수님을 형제로 하는 한 가족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가족이 된 우리 성도들을 대하는 눈이 바뀌어져야 합니다. 성도들을 아끼는 사랑이 달라져야 합니다. 사랑하는 식구들을 점점 넓혀 가야 합니다. 어렵게 사는 이 세상 사는 동안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살다가 영원한 나라에서 정말로 옛말을 나누며 기쁘게 살게 도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한 분도 빠짐없이 예수님께서 자기의 형제라 부르시도록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자들이 다 되시고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진 가족들끼리 나눌 수 있는 최선의 사랑을 나누시는 성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