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기러 오신 예수님 – 마태복음 20:17-34

우리 나라를 ‘동방예의지국’이라고들 말합니다. 말을 바꾸어 말한다면 낮은 사람이 높은 사람을 잘 대접할 줄 아는 나라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분위기가 오래 내려오다 보니 윗사람은 당연히 대접을 받는 것으로만 익숙해져 있어서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을 섬기는 훈련이 전연 되어 있지 않은 현실을 낳았고 또 이런 습관이 변질이 되어 높은 사람에게는 상납이라는 단어로 뇌물 같은 것을 바쳐야만 하고 바치지 않으면 괘씸죄를 짓는 자로 낙인이 찍히는 병든 사회가 바로 우리 사회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와 같이 낮은 사람들은 늘 굽실거리고 또 갖다 바치고 하는 사회이므로 자기도 높임을 받기 위해서는 공부도 열심히 하고 더 높은 학교에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다 보니 높은 자리는 뽐내는 자리요 낮은 자리는 부끄러운 자리로 잘못 인식이 되어 있고 권세 있는 높은 자란 섬김을 받기만 하고 낮은 자리는 섬기기만 하는 것으로 뿌리가 내려진 우리 사회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 주신 본문 말씀은 우리가 평소에 갖고 잊는 고정 관념인 “높은 자란 섬김을 받는 자”가 아니라 “남을 섬기는 자가 높은 자”라는 ‘높은 자’에 대한 올바른 개념을 소개받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에 오신 목적이 남에게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남을 섬기기 위해 오셨다고 소개해 주시고 계십니다. 섬기는 자가 높은 자라는 주님의 가르치심은 남을 섬기는 것은 자신에게도 부끄러움이요 자식들에게까지도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는 우리의 두뇌에 분명한 새로운 사상이요 새로운 문화요 새로운 세계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오늘 주시는 본문을 통해서 우리 교회 성도들이 주님의 모범을 잘 배워 섬김을 받으려는 자세에서 일평생 남을 섬기는 자리에 서시어 주님으로부터 높은 자란 칭찬을 받으시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본문의 뜻을 이해하고 본문이 주는 교훈을 찾으며 그 교훈을 우리의 일상 생활에 어떻게 적용해야 하겠는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십자가의 수난과 부활의 예고(17-19)

[2] 섬기는 자가 큰 자라는 가르침(20-28)

[3] 소경을 고치신 주님(29-34)입니다.

 

[1] 맨 먼저 십자가의 수난과 부활의 예고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매년 200-300 만 명이 몰려들었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예수님은 유월절의 참 희생양이 되시기 위해, 즉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주님을 따라가면서도 주님이 가고 계시는 수난의 길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주님을 따라오고 있는 많은 무리들로부터 12제자를 따로 데리시고 십자가의 수난과 3일만의 부활에 대해 예고하시게 됩니다. 지금까지 이미 2번 이 사실을 예고한바 있으나 아직도 제자들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시어 세상 임금이 되실 것으로만 기대하고 따라가고 있음을 아시는 주님께서 그들의 기대를 바꿔 주어 십자가를 지시는 것을 보고 제자들이 받게 될 큰 충격을 줄이려 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을 회피하실 수도 있는 일이나 그 길은 만세 전부터 하나님이 계획하신 하나님의 뜻이요, 주님이 이 땅에 내려오신 목적이 바로 그것인 것을 아시기 때문에 ‘자기 부정’ 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교훈에 대해 스스로 모범을 보이신 것이며 또 ‘자기 목숨을 잃은 자는 얻을 것이요’ 라는 진리를 분명하게 해주시는 길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본문에서 자기를 ‘인자’라고 하셨는데 인자란 ‘사람의 아들’로 ‘하나님의 아들’과 대조를 이루는 칭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신적 속성’을 대변한다고 한다면 ‘인자’는 ‘인적 속성’을 대변해 주고 있는 것이 되겠습니다. 우리 인간과 똑같이 찔리면 아프고 먹지 않으면 배고픔을 느끼는 인간의 몸을 지니신 것을 강조한 말이 되겠습니다. 인성을 초월하신 존재가 아니고 똑같은 인간임에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계신 그 위대한 발걸음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십자가 지시기 직전에 아버지께 3번이나 고난의 잔을 피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심도 주님께서 인간의 몸을 지니셨음을 증언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인자가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메 저희가 죽이기를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능욕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하리니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고 예고를 하신 것입니다.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란 유대 최고 의결 기구이자 법정인 산헤드린 즉 공회의 구성원을 말하는 것으로 공회는 제사장, 장로, 서기관 각 24명씩 총 72명으로 구성원을 이루며 그들은 민사, 형사, 종교 생활 등 모든 사건을 판결하는 유대 최고 회의였는데 바로 이 공회에서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안은 하지만 유대인들에게는 사형을 집행할 권한이 없기 때문에 로마 총독 빌라도의 손에 넘기어질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잡히시면 능욕을 받고, 채찍질을 당하며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될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능욕, 채찍, 십자가는 주님이 당하실 삼중적 형벌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실지로 십자가를 지실 때에 어떤 자는 조롱하고 침뱉는 사실이 있었는데 바로 이것이 능욕이며 채찍이란 사도 바울이 40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다고 했는데 주님께서도 이런 39대의 매를 맞으신 것이며 그 후에 십자가에 메달아 죽이게 한 것을 말합니다. 십자가는 그 당시 흉악범이나 도망치다 걸린 노예 등을 처형할 때 사용한 지극히 수치스럽고 모욕적인 사형 방법이었는데 죄 없으신 주님을 그렇게 처형하게 될 것을 미리 아시고 제자들에게 분명히 눈으로 보는 것 같게 설명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보통 죄수들은 십자가의 처형으로 끝나 버리게 되지만 주님께선 제 3일에 살아나리라는 예언을 하심으로 낙망할 수 있는 제자들에게 소망을 주시며 또한 제자들도 죽을지라도 예수님과 같이 다시 살아날 것에 대한 비전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심도 인류의 죄를 구속하시기 위한 필수적 사역이요 부활하심도 영생을 위한 필수적 사역임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2] 두 번째로 섬기는 자가 큰 자라는 가르치심입니다.

제자들에게 십자가의 수난과 부활에 대해 3번씩이나 예언을 하시고 어떻게 고난을 받으시게 될 것을 그림으로 보여주시듯 했으나 제자들은 이것을 전연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즉 주님께서 세상 왕이 되시는 과정에서 로마인들과의 조그만 불상사가 일어나겠지만 주님께서 메시아로서 세상을 평정할 왕이 되시리라고 기대를 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고 자부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나라도 없이 로마 통치 아래 갖은 굴욕을 당하고 있으므로 하나님께서 다윗 왕과 같은 강한 왕을 허락하시어 이웃 나라들까지도 다 굴복시키는 강력한 지도자로 바로 이 예수님을 보내신 것으로 믿고 있으므로 그들 머리 속에는 그 시기가 곧 오고 있는 기대뿐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에 대한 예고가 그들의 머리 속에 들어올 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 머리 속에는 3년 동안 모든 것을 버리고 따라다닌 보상을 받게 될 것만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12 제자 중에서 수제자 3명을 말해 보라고 한다면 베드로,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인데 이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두 아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찾아와서 부탁하기를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임명해 주소서’라고 노골적으로 인사 청탁을 하게 됩니다. 청와대에서 이 사실을 알았더라면 틀림없이 사정 감사에 걸릴 일을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어머니 되는 살로메는 막 15:40과 요 19:25 을 참조하여 볼 때 예수님의 이모님인 것으로 간주되므로 친인척을 이용하여 인사 청탁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 청탁을 받으신 예수님은 얼마나 어처구니 없으셨겠습니까? 앞으로 며칠이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셔야 하는 절박하고 착잡한 심정인데도 그를 따르는 제자들이나 친인척이 전연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예수님을 이용하여 세상에서 높은 자리만 차지하겠다고 했으니 말입니다.

왕의 좌우에 앉게 해 달라고 했으니 왕 다음에 권세 있는 자들이 되게 해 달라고 부탁을 한 것입니다. 어머님들 마음은 다 마찬가지일 것이라 생각됩니다. 이 부탁을 받은 예수님께서 뭐라고 대답을 하셨습니까?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보실 때에는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누가 들어가는 지에 대해 전연 모르는 것 같고 또 주님이 마실 잔이란 주님의 십자가의 수난인데 그들이 이 십자가의 수난까지라도 담당해야 함에 대해서는 전연 모르는 것을 아신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고 하실 때 할 수 있나이다’라고 대답함으로 그 잔이란 왕 좌우 편에 앉아 축배의 잔이나 마시는 것으로 오해했나 봅니다. 물론 결과적으로는 야고보는 사도 중에서 첫 순교자가 되었고 요한도 밧모섬에 오랫동안 유배를 당했으니 자기들의 대답대로 고난의 잔을 마시게 되었지만 그 당시 그렇게 대답할 때에는 그런 의미로 알고 할 수 있다고 대답한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미래에 그들에게 되어질 일을 미리 다 아시므로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 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고 답하신 것입니다. 그 두 제자들이 과연 그들의 말대로 순교도 당하게 되겠지만 하늘 나라에 가서 앉는 자리는 하나님께서 재량으로 하실 것이라는 답을 주시게 됩니다.

24절에 보니 높은 자리를 청탁하는 두 형제를 보고 열 제자들이 분히 여겼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생은 다함께 했는데 두 형제가 제일 높은 두 자리를 차지하겠다고 했으니 화들이 날 수 있겠지요. 그러나 12 제자들이 모두 헛다리를 집고 있는 것을 보고 계신 주님께서 얼마나 답답하셨을까요? 그들을 향해 주님께서 올바른 교훈을 주십니다. 이방의 세상 임금들이나 또 높은 자리를 차지한 자들은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권세를 가지고 휘두르지만 신앙인의 세계에서는 전연 다르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세계에서는 세상과 정반대로 남을 섬기는 자가 큰 자이므로 높아지기를 바라면 종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세상 나라의 통치 원리는 섬김을 받은 자가 높은 자이고 큰 자이나 메시아 왕국의 통치 원리는 반대로 남을 섬기는 자가 높은 자요 종된 자가 높은 자라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큰 자이시나 세상에서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섬기러 오셨고 섬길 뿐 아니라 자기의 몸을 인류의 죗값 대신 드리는 대속물로 드리기 위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종이 아니신 대도 종같이 철저한 순종을 통해 종의 참 모습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모범을 보이시고 교인들더러 헛된 자리 욕심에 관심을 두지 않을 뿐 아니라 이웃의 성도들을 위해 섬기고 몸을 희생할 수 있기를 기대하시는데 요사이 교회 안의 현상은 어떻습니까? 12제자보다 나은 것이 있을까요? 우리가 더 높아지기를 바라고 남이 자기를 더 섬겨 주기를 바라고 있지 않습니까? 나를 희생하지 안고 남이 희생되기를 바라고 있지는 않습니까? 헛된 영광을 구하는 제자들을 보여 주시며 우리 자신들이 혹시나 그런 위치에 있지 않기를 바라시는 주님의 마음을 읽게 됩니다.

 

[3]세 번째로 소경을 고치신 주님입니다.

인자이신 주님께서는 십자가의 수난을 예견하고 계시므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발걸음이나 그 마음이 많이 무거우셨으리라 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여리고를 지나가실 때에 소경 둘이 소리질러 가라사대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하니 무리들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라 하였으나 오히려 더욱 소리질러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므로 주님께서 그들을 부르시고 너희들에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바라느냐고 물으시니 ‘주여 우리 눈뜨기를 원하나이다’하여 주님께서 불쌍히 여기시고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었고 그들이 주님을 좇았다고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지금 십자가를 지시게 되는 마음의 짓눌림이 있는 주님 자신의 사정은 전연 개의치 않으시고 모여든 무리들에게 진리를 가르치시고 또 절실하게 주님의 도움을 요구하는 소경에게 자비를 베푸신 주님을 보게 됩니다. 또 사람들이 시끄럽다고 꾸짖어도 주님의 도우심이 절대로 필요한 이 소경은 무리들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오히려 더 소리질러 ‘주여 불쌍히 여겨 달라’고 소리질렀기 때문에 주님께서 고쳐 주신 것을 보게 됩니다. 기도에는 진실성과 지속성이 있어야 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정말 주님의 도움을 바라시는 것을 진심으로 구하시고 또 하나님이 응답하실 때까지 매달리라는 교훈인 것입니다.

우리는 소경을 고치신 본문을 소개받으면서 우리들의 시선이 ‘보게 되었다’는 사실에만 집중되어 있을 것이나 우리들이 관심을 가져야 할 중요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를 좇았다’는 부분입니다. 즉 영혼의 눈이 떴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보게 해 주셨던 그 육의 눈은 그가 죽으므로 끝이 났지만 그의 영혼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소경으로서의 불편과 고통이 그를 주님께 인도한 불행한 행복자를 보면서 눈을 떴기 때문에 주님을 찾지 않고 결국 주님을만나지 못한 행복한 불행자들을 생각하게도 됩니다. 인생에의 불행은 눈을 감았기 때문이 아니요 무엇이 없어서가 아니라 예수를 좇지 않은 것이 불행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들이 스스로 불행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실은 불행이 아니라 일시적인 불편이요 고통일 뿐이기 때문이며 참 불행이란 불신자가 맞게 되는 운명을 말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본문을 통해 우리가 받는 교훈이 무엇이며 그 교훈을 우리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본문이 주는 교훈은 바른 인생관을 갖고 살아라 는 것입니다.

바른 인생관이란 높은 자의 개념을 바로 갖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이해하고 있는 높은 자란 계급이 높고, 권세를 휘두르고, 돈이 많고, 학벌이 높은 것을 의미하게 되는데 성도들은 그런 의미에서 남보다 높아지려고 하지도 말고, 또 그런 자만이 높은 자로 알고 혹시 라도 그러치 못한 환경에 있는 자신을 스스로 못 낫다고 생각하거나 또는 높은 자들은 존대하고 낮은 자들을 깔보아서는 아니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평가할 때 그가 가진 것을 가지고 평가하지도 말고, 스스로를 또한 그런 것들에 의해 평가하여 스스로 우쭐해지거나 반대로 풀이 죽어서도 아니된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럴지라도 성도들은 그러지 말라는 것입니다. 교계라고 하는 사회에서도 내가 높아지려고 남을 죽이는 일들이 연속되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나 이런 일들은 스스로 불행을 끌어 드리는 일임을 늦게야 깨닫고 후회하게 될 것은 뻔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평가하실 때에 그런 것을 가지고 우리가 높다든지 낮다든지 하시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런 식으로 높아지기를 바라는 자들을 사정없이 낮추실 것입니다. 계급이 높았던 자나, 권세를 휘둘렀던 자나, 아니 세계적으로 부자들, 또 학식가들이 역사적으로 과거에 많이 살아 숨쉬었으나 지금 그들을 아무도 기억치 않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주님은 살아 계실 때에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음을 우리는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높은 자가 낮은 자를 섬기신 예입니다. 높아지기 위해서 남을 섬긴다는 것보다도 우리 성도들은 언제 어디서나, 또 상대가 높던지 낮던지 개의치 아니하고 높여 주며 섬겨 주라는 것입니다. 상대가 섬김을 받을 만큼 높던지 낮던지, 가치가 있던지 없던지 우리가 판단하지 말고 기회 있는 대로 남을 섬김으로 남의 종이 되라는 것입니다. 궂은 일을 내가 솔선 수범으로 해내야 하며 행여나 나 같이 높은 자가 이것을 해서 되겠는가 라는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일이 어떤 낮은 사람에게 하도록 정해진 것이 아니라 내가 하도록 주어진 것으로 받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어디서든지 눈에 띄는 사람이 있습니다. 기회만 있으면 봉사하는 사람이 눈에 띄고 또한 언제나 몸을 사리는 사람이 눈에 띄게 되는 것입니다. 또 기회만 있으면 남보다 높아지려고 안간 힘을 쓰는 사람이 눈에 띄고, 언제나 자기를 나타내려 하지 않는 겸손한 사람이 눈에 띕니다. 주님께서는 남을 섬기고 남의 종이 된 자가 높은 자라 하셨습니다.우리는 지금 얼마나 높던지, 얼마를 가졌던지 상관없이 남을 섬기고 어디서나 종의 자세를 가짐으로 주님이 주시는 높은 자란 타이틀을 차지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의 높낮이, 세상의 귀천의 신분에 메이지 아니하고 언제나 섬기는 자들이 다 되시기를 바라고 계신 것입니다.

한 걸음 나아가 섬기는 결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맛보며, 모두가 주님을 충실히 따르는 제자들이 되기를 주님은 바라시는 것입니다. 이런 생활을 하시는 성도들에게 현세에서도 죽은 것 같으나 산 자요, 가난한 자 같으나 부요한 자요, 낮은 자 같으나 높은 자로 늘 세워 주실 뿐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서 높은 자리에 앉혀 주실 것입니다.

 

이웃을 높이는 삶, 이웃을 섬기는 삶, 언제든지 내가 가진 것을 가지고 봉사하는 삶은 이미 복받은 삶이요 또 앞으로 큰복을 또 받게 될 삶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만민을 살리시기 위해서 십자가를 피하시지 않으시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던 희생의 삶, 자기는 너무 피곤하고 어려움에 있지만 병든 자를 고치신 봉사의 삶을 우리가 본받아야 합니다. 주님은 그런 삶을 사시면서도 조롱 받고 매맞으며 십자가에 달리신 수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남을 섬기고 남을 위해 희생하며 봉사하는 삶을 산다면 이 세상에서도 우리가 높임을 받을 줄 압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이 걸어가신 그런 희생적이요 봉사의 삶을 살므로 하나님이 예수님을 높이시듯 우리도 높임을 받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