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에 대한 권면 – 벧전 2:18-25

오늘의 본문 말씀에서는 노예들이 주인에게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인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 편지가 쓰여질 당시에 로마 제국에는 약 6백만명이 넘는 노예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교회마다 노예들로 가득 찰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신약 성경은 고린도 전서, 골로새서, 디모데 전서, 디도서 그리고 오늘의 베드로 전서에서 노예들에게 당부하는 글이 주어지고 있으며 빌레몬서는 도망친 노예에 관해 쓰여진 편지이기도 합니다.

 

그 당시의 종이란 돈을 주고 사고 파는 정도의 신분에 불과했었기 때문에 노예의 인권이란 인정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 분위기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종과 주인이 한 형제로서 교회 생활을 하게 되었을 것이므로 노예의 신분에 있었던 자들은 자기의 주인이 주님 안에서 한 형제 자매라는 새로운 관계를 갖게 된 것입니다. 그런 새로운 관계가 형성된 관계로 노예들은 자기 주인 되는 형제가 자기들에게 노예로서가 아닌 형제 차원에서 자기들을 대접해주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노예 제도가 신앙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제도이었으나 성경에서는 노예 제도 자체가 부당한 것이니 노예제도 자체에 항거하여 인간이 누려야 할 권리를 찾으라고 노예 제도를 충동한 말씀은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만일 노예들이 그렇게 항거했다고 한다면 아무런 보장을 받을 수 없었던 그들에게 무참한 희생만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미묘한 감정을 갖고 있었던 노예들에게 베드로는 본문을 통해서 노예제도가 있는 이 세상이 끝나면 노예 제도가 없는 평등의 새로운 나라가 있으므로 그 좋은 나라를 소망하면서 주인들에게 순복하도록 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노예 재도 자체는 없으나 직장 생활에서 주인과 종업원, 또는 직장 상사와 부하 직원으로서의 관계 속에서 생활하고 있기 때문에 오늘의 본문은 이런 관계에서 날마다 생활하는 우리들이 사업주나 직장 상사에게 어떻게 대해주는 것이 신앙 인으로서의 마땅한 자세인지를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이 주는 교훈을 통해서 사람이 일상 생활에서 가질 수 있는 여러 가지의 갈등을 신앙으로 해소할 수 있는 좋은 말씀이 되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의 말씀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본문의 뜻을 이해하고 그 본문이 주는 교훈을 찾고 그 교훈이 주는 교훈을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주인에게 순복하라(18-20) [2]그리스도의 고난의 자취를 따르라(21-25)입니다.

 

[1]먼저 18절부터 20절까지의 주인에게 순복하라 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요사이 직장 생활을 하는 직장인들이 주인이나 또는 직장 상사를 잘 못 만나 고난을 당하는 자들이 많을 것입니다. 견디다 못해 결국 직장을 옮겨야 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의 주인공인 노예들은 어떤 자유가 없었기 때문에 잘못도 없이 호된 매를 맞아도 다른 주인에게 옮겨 갈 수 있는 입장이 되지 못하므로 때리면 맞고 욕하면 듣고 죽을 때까지 모든 고난을 당하고만 살아가는 신세였던 것입니다.

 

이런 자들에게 베드로는 권면하기를 범사에 두려운 마음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두려운 마음이란 성도로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주인을 섬기라는 말입니다. 직장 주인이나 직장 상사를 잘못 만나 직장생활 하는 것이 너무 힘들어 때로는 당장 그만 두겠다는 생각을 가질 수 도 있겠지만 직장 생활이 주는 여러 가지의 의미가 있기 때문에 힘들다고 당장 그만 둘일 만은 아닌 것입니다. 갖가지의 고난이 있고 힘들지만 이를 참고 일을 하므로 자기 가족의 생계를 꾸려나가야 하는 중요한 의미가 있고, 또 자기가 하는 일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공급한다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또 다른 큰 의미는 믿는 자들이 보여주는 모범 된 삶을 통해 나쁜 주인이나 나쁜 상사에게 하나님을 믿는 성도의 아름다운 삶을 보여줌으로 성도들이 믿고 있는 하나님이 누구 이신지 소개하는 일이 성도의 큰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본문 18절에서는 두려운 마음으로 주인에게 순복하되 너그럽고 선한 주인에게나 또한 까다롭고 성질이 나쁜 주인에게나 똑같이 두려운 마음으로 순복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참 좋은 주인이라고 덜 충실하고 까다로운 주인이라고 눈앞에서만 하는척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19절에 보니 애매히 고난을 받는다 해도 하나님을 생각하므로 슬픔을 참아낼 수 있다면 이는 아름다운 일이라 했습니다. 아름다운 일이란 하나님께서 용케 참아내는 자를 지켜보시고 인정하시어 그가 받을만한 상을 주신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죄가 있어 매를 맞으면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상이나 칭찬이 없지만 선을 행했음에도 고난을 받고 참으면 하나님께서 다 아시고 그에게 받을 만한 보상을 내리실 것이라는 뜻이 되겠습니다.

 

[2]두 번째로 21절부터 25절까지의 그리스도의 고난의 자취를 따르라 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베드로는 애매히 고난을 당하는 노예들의 고난을 주님께서 당하신 고난에 연계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에 따라 주님께서 고난을 당하시도록 예정되어 있고 그 고난을 위해 세상에 오심같이 성도들은 고난을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다고 했습니다. 그 말은 그리스도인들이 애매한 고난을 당하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오히려 당연한 일이라는 뜻이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고난을 당하심으로 친히 그리스도인들에게 모범을 보이셨으므로 주님을 따라가는 제자들이라고 한다면 주님의 고난을 본받아 주님의 자취를 따라 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주님께서 고난을 당하셨지만 그는 철저히 죄가 없으셨으며 그가 고난을 당하셨으나 아무런 불평이나 욕을 하시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고난을 당하셨으나 상대방을 공격하거나 위협하지 않으셨으며 오직 공의로 심판하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셨다고 했습니다. 또 오히려 주님께서 애매히 당하신 고난을 통해 죄인 된 모든 인간들은 죄 속함을 받아 구원되었다고 했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애매히 당하는 고난도 인간인 우리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지만 하나님 안에서는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첫째 자신에게는 고난을 참아내는 인내요 남에게는 주 예수를 따르는 작은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남에게 보여주는 의미가 있음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25절에서 그리스도 인들의 믿기 전의 모습과 현재의 모습을 상기시키며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답게 고난을 잘 감당하기를 권하고 있습니다. 전에는 길을 잃은 양과 같이 우왕좌왕 했으나 이제는 영원한 목자요 감독자 되시는 주 예수님께 돌아왔으므로 확신을 가지고 모든 앙갚음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늘나라에서 받을 상을 소망하면서 고난을 넉넉히 이겨나가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오늘 주신 본문 말씀을 통해 어떤 교훈을 받았으며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의 교훈은 직장의 주인이나 직장 상사로부터 애매한 고난을 당하더라도 주안에서 순복하라는 교훈입니다. 주안에서라는 뜻은 주를 믿는 믿음을 거역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란 뜻입니다. 좁은 의미로서는 자기 윗사람으로부터 당하는 고난이요 더 넓은 의미로는 직장의 자기 아래에 있는 사람으로부터 당하는 고난이 되겠습니다. 직장의 주인이나 직장 상사가 자기가 거느리고 있는 아래 사람에게 친절하게 대우해주면 본인과 남이 모두 화평한 마음을 갖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윗사람으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든지 아랫사람으로부터 불경스런 대우를 받을 경우에는 피차에 속이 상하고 직장 생활이 불쾌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피차 행복하고 기쁘기 위해 위 아랫사람 모두가 서로 존경하고 높이며 친절하다면 일에 능률도 오르고 일도 재미있는 직장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삶은 모든 성도들이 살아야 할 삶인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속해 있는 직장이 이런 분위기가 되지 못하고 주인이나 직장 상사가 부당한 대우를 하고 고난을 준다할지라도 주님을 생각하며 참아내고 순복하라는 권면인 것입니다. 사실상 주님은 한 점의 죄도 없으셨으나 십자가를 지셔야 하는 고난을 받았으며 불경한 대우를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묵묵히 모든 고난을 참으신 것은 모든 뒷일을 하나님께 다 맡기고 고난 후에 있을 하늘 나라에서의 영광을 생각하며 참아내신 것입니다. 이 세상은 우리들이 받을만한 마땅한 대우를 해주지 않을 수 있습니다. 때로는 억울한 일도 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천국이 아니오 글자 그대로 우리가 나그네 생활을 하고 있는 세상일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런 고난을 당한다할 지라도 우리들의 참 세계는 하늘나라이므로 이 세상이 다 지나면 하늘나라에서 받게될 대우를 소망하며 모든 고난을 참아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할 수 있는 대로 참고 부당하게 대우하는 주인과 직장 상사에게 순복하는 태도를 보여야 합니다. 그들이 회개하기를 하나님께 기도하는 마음으로 순복해야 합니다. 지금은 사람에게 이런 부당한 대우를 받지만 하늘나라에서는 하나님으로부터 좋은 대접을 받을 것을 소망하면서 참아내도록 힘써야 합니다. 혹시 내가 하나님을 생각하며 잘 참아내는 것을 보고 그 부당한 대우를 하는 자들이 반성하고 태도를 바꿀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참을 수 있는데 까지 참아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는 힘들고 피곤해도 일을 뿌리칠 수 없고 일을 해나가야 하며 때로는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참고 일을 해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주님께서는 대우를 받지 못하셨으나 억울해 하시거나 못마땅하다고 사람들에게 위협적으로 공격하시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세계는 이 세상이 아니오 하늘 나라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세계도 주인과 종업원,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의 계충의 구별이 없고 세상의 갖가지의 구별로 차별대우하는 그런 것들이 결코 없는 하늘 나라인 것입니다. 고난을 당하실 당시의 예수님은 얼마나 견디기 힘드셨겠습니까? 그러나 참고 참아 그 어려운 때를 다 넘기신 것입니다. 지금은 그 고난들이 옛날 일이 다 된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이 받고 있는 모든 고난도 참고 참아내면 언젠가는 다 옛날일 이었다고 말할 때가 올 것입니다.

 

어려울 때마다 한 점의 죄도 없으신 주님께서 큰 고난을 당하셨으나 묵묵히 잘 참아내셨음을 기억하며 모든 고난을 잘 참아내는 우리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고난을 잘 참아내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좋은 결과를 주실 것을 믿고 참아가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