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사이 아프카니스탄에 억류된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독일에 본부를 둔 구호단체의 직원들로 아프칸인 직원 16명과 독일인 4명 그리고 미국인 2명 호주인 2명이 총 24명이 억류되어 바로 오늘 혹은 내일 재판을 받게 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들이 체포된 이유는 이스람교 이외의 종교를 전도했다는 명목이고 재판 결과로는 최고 사형까지도 받게 된다고 합니다. 아프카니스탄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 사실이 발각되면 사형까지 당할 것을 알지만 목숨을 걸고 구호 단체의 명목으로 구호를 하면서 눈치껏 복음을 전하다 체포된 자들로 보여집니다.
교회당을 가득 메우는 성도들 중에는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께서 어려운 고난도 시험도 다 면케 해주실 것으로 믿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 자들이 있을 텐데 아프카니스탄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구속된 사람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복음을 전했으니 두 믿음에 큰 격차가 있음을 보게 됩니다.
사도 베드로는 핍박을 받는 성도들을 격려하고 위로하기 위해 이 편지를 쓴 것이지만 오늘의 본문에서는 그 당시의 핍박의 도가 심해서 불 시험이라고 표현될 정도로 강도 높은 시험이 눈앞에 있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사도 베드로는 예수를 믿으면 이런 불 시험을 면할 수 있게될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불 시험을 만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그런 고난에 참예하는 것을 즐거워하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즉 베드로는 아프카니스탄에 억류되어 사형 선고를 받을지 모르는 자들에게 조금만 기다리라 하나님께서 곧 옥에서 나오게 해줄 것이라고 위로하지 않고 사형 당할 지경에 처한 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즐거워하라고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본문을 소개받는 우리 모두도 믿는 이유 때문에 불 시험을 당한다 하더라도 믿음을 지켜 주님 재림시에 영생을 다 얻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의 본문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본문의 뜻을 이해하고 본문이 주는 교훈을 찾으며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는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불 시험을 즐거워하라(12-16) [2]불 시험은 심판의 시작(17-18) [3]영혼을 조물주께 부탁하라(19)입니다.
[1]맨 먼저 12절부터 16절까지의 불 시험을 즐거워하라 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 편지가 쓰여진 시대 상황은 로마의 네로 황제 때의 기독교 핍박의 시기입니다. 그 당시에는 그리스도를 믿는 다는 이유만으로 몸에 부글부글 끓는 납을 붓거나, 몸을 인두로 지지거나, 피묻은 야생 동물가죽을 입혀서 개들로 물어 죽게 하였다고 합니다. 또 몸에 휘발성 기름을 발라 불태우거나, 기계나 동물들에 의해 사지가 찢겨지게도 했다고 합니다. 갖가지로 고문당하고 순교 당한 사연들이 기독교 순교사에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런 포학한 핍박을 두고 불 시험이라고 표현하면서 이런 불 시험을 당하거든 이상한 일을 당한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왜 이상히 여기지 말아야 할까요? 예수님께서도 죄가 전연 없으셨지만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주님의 제자들에게도 그런 고난이 따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예수를 믿으면 아무런 시험을 면하게 된다고 기록된 곳이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를 믿으면 고난을 받게 될 것을 성경 여러 곳에서 기록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딤후 3:12에는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고 했으며 빌 1:29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이라 했습니다. 또 요일서 3:13 에는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라”고 했습니다.
믿는 자가 작고 큰 고난 당하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는 일이며 오히려 당연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는 성도가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지 않고 똑같이 어울려서 산다면 미움을 받을 이유가 없겠지만 믿는 자들이 불신자들과 구별된 삶을 살기 때문에 미움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불신자들이 믿는 자들을 미워하고 갖가지의 핍박을 하는 것은 불신자들의 일이요 믿는 자들의 일은 그런 시험 당함을 당연한 것으로 알고 그런 시험을 당하는 것은 주님께서 당하신 고난에 참예 하는 길이 되는 줄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는 고난을 통해서 주님께서 받는 고난에 동참하는 길이 되므로 믿는 이유로 고난받는 것이 영광스러운 일임을 깨닫고 오히려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 재림시에 하나님께서 불 시험을 이겨낸 성도들을 즐겁게 해 주시고 기쁘게 해 주실 것이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14절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고난을 당하는 그 사람 위에 하나님의 영광의 영이 나타날 것이라고 했습니다. 순교 당한 스테반의 얼굴에 광체가 빛났던 그런 영광의 영이 함께 한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16절에서는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했습니다.
15절에서는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남을 살인했거나, 도적질했거나 악한 행동을 했거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일로 고난을 받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아야지 그리스도인이 범죄하여 고난을 받는다면 마땅히 받아야 할 고난이므로 죄 값으로 고난 당하는 부끄러운 일이 없도록 하라는 권면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2]두 번째로 17절로 18절까지의 불 시험은 심판의 시작 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믿는 자가 받는 핍박을 두고 심판의 시작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즉 언젠가는 신자와 불신자가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게 될 것인데 신자들은 핍박이라는 과정을 통과하는 심판을 미리 받는 것으로 비유한 것입니다. 과연 성도가 이 고난을 잘 이겨내는지 아니면 고난이 무서워 믿음을 포기하는지를 하나님께서 시험하신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그런 비유를 하면서 베드로는 의인들이 미리 받는 이런 고난의 심판과정도 견디기 힘든데 앞으로 불신자들이 받을 정식 심판은 얼마나 뜨겁고 견디기 어렵겠느냐고 대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는 자인 의인들도 이런 불 시험을 통과해야 하므로 고통스러운데 구원받지 못한 불신자들이 당할 불과 유황불이 얼마나 뜨겁겠느냐는 비유가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어렵지만 의인이 받는 불 시험을 강한 믿음으로 이겨내라는 권면입니다.
[3] 마지막으로 19절의 영혼을 조물주께 부탁하라 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에서 하나님께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라고 말씀하신 후 운명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스테반은 돌에 맞아 순교 당할 때에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운명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19절에서 불 시험을 앞에 둔 성도들에게 권하기를 선을 행하는 가운데 그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께 부탁하라 고 권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하셨는데 핍박자들이 불 시험을 통해 성도들에게 고통을 주거나 죽게할지라도 영혼은 죽일 수 없을 것이므로 영혼을 조물주 하나님께 부탁하라는 권면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아무리 무서운 핍박을 당한다해도 이 세상의 그 핍박은 일시적이므로 영원한 하늘 나라를 소망하면서 불 시험을 잘 이겨내라는 것이며 현재의 고난은 장차 하늘 나라에서 누리게 될 영광과는 족히 비교가 되지 않으므로 목숨을 잃은다 해도 영혼만은 꼭 지키라는 권면이 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오늘 주신 본문을 통해서 어떤 교훈을 받았으며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믿음이 좋으면 하나님께서 시험을 면케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 시험 같은 시험을 주셔서 더 연단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합당한 자로 만들어 주신다는 교훈입니다. 예수 믿는 자들에게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있는데 열심히 믿는 가정에 닥치는 시험입니다. 구약 사상에서는 우리들에게 닥치는 모든 환난은 죄 값으로 풀었던 것입니다. 즉 욥에게 닥친 모든 환난을 욥이 하나님께 범죄했기 때문이라고 풀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욥의 죄 값 때문이 아니라 사단이 욥의 믿음을 시험해보라는 제안 때문이었습니다. 욥이 하나님을 전심으로 섬기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복만을 주셨기 때문이요 만일 하나님께서 적은 재앙이라도 욥에게 내리면 하나님을 잘 섬기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단에게 욥을 시험해 보라고 허락함으로 욥은 엄청난 재앙을 받았지만 욥은 믿음을 버리지 않고 오히려 그의 큰 믿음이 하나님과 사단 앞에 더 높게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되었던 것입니다.
사단은 믿는 자를 싫어하기 때문에 사단의 세력은 언제 어디서나 믿는 자들을 크고 작은 시험으로 시험하는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믿음이 좋은 사람일수록 여러 가지의 시험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내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고 있는데 우리 집안에 왜 자꾸 어려움이 닥치는지 모르겠다고 말을 한다면 오늘의 본문의 말씀을 모르는 자의 말이 되겠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믿음이 좋은 사람도 어려운 고난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며 그런 어려운 고난을 통해 내 믿음이 연단을 받아 하나님 앞에 인정을 받는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라는 시험을 통과함으로 아브라함의 믿음이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게 되는 기회가 된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영육 간에 복을 주시고 영육 간에 보호해 주시는 것이 사실이나 주님을 세상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시게 하신 것은 우리들의 육의 번영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주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육으로는 죽으셨으나 영으로는 사시어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심 같이 그를 따르는 성도들도 육으로는 죽되 영으로는 살아서 영원히 주님과 함께 영광을 누리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성도들이 믿음을 지켜 나갈 때에 사단의 강한 도전으로 육적으로는 여러모로 깨지고 상처 나고 심지어는 죽게까지도 된다하더라도 성도의 소망은 이 세상에서의 번영이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누릴 영광임을 확신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육적으로 받는 어떤 고난과 상처라도 미래의 소망을 생각하며 잘 참아내서 믿음을 지켜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는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 어떤 육적인 고난이라도 미래에 받을 영광을 생각하며 참아내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고난이 닥쳐도 나 같은 부족한 사람이 주님의 고난에 함께 동참토록 해주심을 영광으로 알고 감사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시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