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구원 – 로마서 1:16-17

방금 봉독한 짧은 두 절에는 기독교의 핵심적인 네 단어가 포함되어 있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이 두 절에 포함된 네 단어란 복음, 구원, 믿음, 의인입니다. 즉 오늘 소개되는 이 두 절은 기독교의 핵심을 명확하게 소개해주는 중요한 말씀인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기독교의 신앙에 대해 전연 지식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오늘 듣게 되는 한 번의 강해로 기독교의 기본을 배울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가 될 것이며 이미 신앙 생활을 해 오고 있는 분들에게는 믿기 시작할 때에 기독교에 대해 혹 잘 못 이해한 부분이 있다면 기독교의 기본을 바로 이해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우리들은 종교 개혁이라는 단어를 많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16세기에 여러 명의 종교 개혁을 주도한 인물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이름이 잘 알려진 독일의 마르틴 루터는 바로 오늘 봉독한 로마서 1장 17절의 말씀 때문에 종교 개혁을 단행하였던 능력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는 로마서 1장 17절의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는 말씀을 깨닫고 오직 믿음만이 사람을 의롭게 할 수 있다는 확고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는데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각 교회에 파견 된 신부들이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는 속죄권을 사야 한다고 속죄권을 교회에서 파는 것을 보고 이런 교회의 부패에 항거하여 종교 개혁을 단행했던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을 통해 우리들은 기독교의 핵심적인 단어인 복음이나 구원은 무엇이며 그리고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말의 뜻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아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본문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본문의 뜻을 이해하고 본문이 주는 교훈을 찾으며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는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은 바울(16) [2]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복음(16) [3]믿음으로 의롭게 됨(17) 입니다.

 

[1]맨 먼저 16 절 앞부분의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은 바울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아는 사도 바울은 예수를 믿기 전에 예수 믿는 기독교인들을 잡아 가두고 많이 핍박하는데 앞장섰던 장본인이었습니다. 왜 그렇게 기독교인들을 핍박했을까요. 예수님의 고향은 유대 땅 나사렛이었고 그의 아버지는 목수 요셉이었는데 결국은 자기의 동족인 유대인들에게 잡혀 강도들과 함께 십자가에서 죄인으로 처형을 당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었던 기독교인들은 십자가상에서 처형당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야라고 전했으며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이 사흘만에 부활하셨다고 전했으므로 전통적인 유대교로서는 용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전통적인 유대교에서 대망했던 메시야는 다윗과 같이 세계를 정복할 수 있는 용맹을 떨치는 왕으로 나타나서 유대 나라를 회복하고 잘 먹고 잘사는 나라가 되게 할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시골뜨기, 그리고 못 배우고, 더군다나 사람들에게 잡혀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만 심히 나약한 자를 두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거니 또는 메시야라고 전했으므로 사도 바울이 전도를 할 당시의 유대인들의 지식이나 상식으로 볼 때에나 그들의 유대교의 신앙을 기준으로서는 나사렛 예수가 메시야라든가 죽은 예수가 부활했다는 사실은 너무나도 허무 맹랑하게 생각되었기 때문에 핍박을 했던 것입니다.

 

그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하는 말의 배경은 시대적으로 로마시대이며 유대 나라는 로마의 식민지에 속하였던 것입니다. 즉 유대나라나 유대인들은 속국으로서 천대를 받았었고 로마는 모든 정치, 경제, 지식과 철학등 모든 면에서 앞서가는 나라였습니다. 그런 시대 생황에서 피 지배국인 유대의 조그마한 시골 마을 나사렛에서 태어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고 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버린 예수가 죄를 용서해 줄 수 있는 메시야라고 전하는 것은 비상식적이었으며 세상 지혜로는 해석이 안 되는 것이었으므로 부끄러운 일이었으며 기독교는 무시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사도 바울은 진리에 대한 확신을 가졌으므로 복음을 전할 때에 전연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는 신앙 고백인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두고 사도 바울은 고린도 전서 1장 23 절과 24절에서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한 것입니다.

 

[2]두 번째는 16절 뒷부분의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복음 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은 이유를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은 죄인들을 구원해주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에 부끄러워하지 않고 복음을 전한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복음이며 무엇이 구원입니까? 이미 말씀 드린 대로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죄를 용서하시고 천국에서 영원히 살게 하기 위한 방법으로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사람의 몸으로 태어나게 하시고 인류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게 하셨으며 3일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그 사실이 바로 복음인 것입니다. 복음이란 복된 소식인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방법을 통해 주님께서 온 인류의 죄를 짊어지시게 한 그 사실이 복된 소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이란 죄로부터 용서받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망은 죄인이 죄를 용서받아 구원되는 것인데 바로 이 복음을 통해 사람을 구원해 낼 수 있게 되므로 이 복음은 인류를 구원해 내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것도 능력이려니와 죄 가운데 있는 자를 구원해 내시는 능력은 능력 중 능력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돌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으신 창조자 하나님이시지만 복음이라는 수단을 통해 인류를 구원하시는 능력을 행하신 것입니다. 이 구원의 문은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열려져 있는 문인 것입니다. 모든 인종, 빈부 귀천과 상관없이 복음을 받아드리는 모든 인류에게 열려 있는 공평한 문인 것입니다.

 

[3]마지막으로 17절의 믿음으로 의롭게 됨 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로우신 분이시므로 사람이 의롭지 않으면 하나님과 하나 될 수 없으므로 의롭지 못한 죄인들이 의롭도록 하는 방편으로 복음을 믿는 조건을 주신 것입니다. 앞에서 말한 대로 복음이란 하나님의 아들이 인류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으며 돌아가신 그리스도가 다시 사셨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의심하지 않고 그대로 믿는 것이 믿음이며 그렇게 믿는 자는 의롭게 된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이 바울만의 사상이 아닙니다. 하박국 선지자도 합 2:4절에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였으며 오히려 사도 바울이 이 말씀을 인용한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또 창세기 15:6 에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라 했습니다. 즉 아브라함의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아질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아브람이 믿었는데 하나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죄를 용서받고 구원받는 방법으로 사람들에게 큰 일을 행해야 한다고 요구하시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행해야 하는 어떤 공로를 요구하시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리실 구원은 사람이 행한 큰 공로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인데 오직 하나의 조건은 복음을 믿고 받아드리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사실을 믿고 그 예수가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돌아가셨기 때문에 이 사실을 믿는 자는 의로워져서 죄에서 구원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의로워진다는 말은 갑자가 죄가 하나도 없이 깨끗해진다는 뜻보다는 죄는 있지만 죄가 없는 것으로 보아주신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빚을 졌지만 빚을 지지 않은 것 같이 탕감해주는 의미이거나 죄 값으로 형벌을 받아야 마땅하나 형을 받지 않아도 되도록 사면해주는 의미가 되겠습니다. 복된 소식을 믿고 순종하므로 구원에 이르게 되고 구원에 이른 의인들은 계속 믿어 나가므로 현재도 살고 주님 재림시에 영원히 사는 영생의 삶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오늘의 17절의 말씀을 통해 요한 복음 3:16 의 말씀인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의 말씀을 더 확실하게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오늘 주신 본문을 통해 어떤 교훈을 받았으며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생활에 어떻게 적용해 나가야 하겠습니까? 오늘의 본문이 주는 교훈은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교훈입니다. 믿음이란 구원을 주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된 소식을 포함한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이 귀한 복음의 말씀을 진실로 믿고 받아드리며 생활에서 실천해 나가므로 의로운 생활이 연속되어지는 것입니다. 복음을 믿고 순종하는 기본을 떠나 행동으로 아니면 다른 외적인 공로로 구원을 받아보려는 노력은 다른 종교에서 오염된 사상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얼굴 색이 어떻든, 어느 지역에 왔던 상관없이 구원의 문을 열어두신 것입니다. 많이 배운 자도 가능하고 못 배운 자도 가능한 것입니다. 모든 인류에게 은혜를 베푸시어 복음을 마음으로 받아 믿는 모든 자를 의인으로 인정하시고 구원의 문에 들게 하신 것입니다.

 

물론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말의 뜻을 마음으로 믿기만 하면 되는 것으로 좁게 해석하려는 것은 의롭게 되는 믿음의 본래의 뜻은 아닙니다. 믿음이란 믿는 자가 마땅히 행해야 하는 행함이 포함된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유월절 양의 피를 자기 집 문지방에 발랐던 가정은 장자가 죽는 것을 면했지만 이 사실만 믿기만 하고 문지방에 양의 피를 바르지 않았다면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피를 발랐다 하더라도 장자가 죽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일 뿐이요 피를 바른 공로로 구원된 것은 아닌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도들도 믿을 뿐 아니라 성도가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하므로 구원이 완성되어지는 것이지 믿기만 하면 된다는 것은 부족한 신앙인 것입니다.

 

물론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강조하지 않고 자기가 행했던 자랑스런 행함이나 행위에 무게를 두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가리는 일이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은 우리들이 믿고 행했기 때문인데 자기가 낸 큰 헌금이라든지 아니면 큰 봉사 때문에 하나님께서 구원을 보장해주실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오래 믿었던 이제 믿기 시작하든 어떤 차별도 없이 누구든지 복음을 믿고 순종하는 자에게 구원의 문이 열려져 있습니다. 모든 과거의 죄가 용서받는 길이 열려 있습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이 우리 앞에 열려 있는 것입니다. 복음을 믿고 순종하므로 의롭게 인정되어 구원받는 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아직 이 구원의 복된 문에 들어서지 않은 자는 지체치 말고 이 복된 문에 들어서야 하겠습니다. 이 복된 소식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된다는 진리를 확신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