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설교 제목은 하나님의 주권과 구원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구원 문제를 놓고 어떤 주권을 가지고 있는가를 강해하게 됩니다. 9장 앞부분에서 야곱과 에서에 대한 제목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 이미 밝힌 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과 에서가 태어나기도 전에 그들이 선을 행했거나 악을 행하기도 전에 형 에서가 동생 야곱을 섬기도록 하신 것은 하나님의 주권인 것입니다. 장차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구별하지 않고 누구든지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실 하나님께서 처음에는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시고 이방인과 구별하신 것은 이스라엘이 잘나고 또 무슨 공로가 있어서가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것이며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에 따른 것이었던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는 바로 이런 하나님의 주권과 구원의 섭리를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본문의 뜻을 이해하고 본문이 주는 교훈을 찾으며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는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하나님의 주권(14-21) [2]하나님의 구원의 섭리(22-26)입니다.
[1]먼저 14절부터 21절까지의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14절은 바로 앞에서 예로 들었던 야곱과 에서 또는 이스라엘과 이방인을 구별하신 하나님께 어떤 잘못이 있느냐는 질문으로 시작됩니다. 우리들이 오늘의 본문에서 전하려고 하는 사도 바울의 의중을 충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로마서 3장 23절인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의 뜻을 먼저 이해해야 할 줄 압니다. 이 말의 뜻은 이스라엘이나 이방인이나, 야곱이나 에서나 다 죄인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자기의 행위로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할 존재였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오늘의 본문을 이해해 나가야 합니다. 15절과 16절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신 말씀이 소개되었습니다.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의 근원은 출애굽기를 근거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고 우상을 숭배한 큰 죄악을 범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애굽 백성들은 버리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멸망시키지 않으시고 은혜를 베푸셨던 것입니다. 이 사실을 두고 모세가 하나님께 애굽을 버리신 하나님께서 왜 이스라엘에게는 은혜를 베푸셨는 지를 물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답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은혜를 원해서 그렇게 된 것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고 불쌍히 여기고 싶어서 그렇게 했다는 답인 것입니다. 에굽도 이스라엘도 다 죄인이지만 하나님께서 은혜와 긍휼을 베푸시고 싶은 자에게 하나님의 주권으로 은혜와 긍휼을 베푸신 것이라는 답인 것입니다.
17절에서는 애굽 왕 바로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종 노릇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하여 바로에게 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의 종사리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요청하도록 명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는 마음을 강팍하게 하여 한사코 모세의 요청을 거절했던 것입니다. 바로는 하나님께서 택하지 않고 버리신 대표적 인물이라고도 말 할 수 있겠습니다. 여기에서 버리셨다는 말의 뜻은 하나님께서 바로가 죄를 짓도록 했다는 뜻이 아니고 죄 속에서 회개하지 않고 목이 곧은 바로를 자기 고집대로 그대로 살도록 내버려두셨다는 뜻인 것입니다. 에서의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애서가 장자의 명분이 필요 없다고 팽개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염두에 두지 않은 그대로 내버려두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을 택하시고 이스라엘을 택하신 것은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신 것이요 불쌍히 여기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19절에서는 또 하나의 질문을 내 놓고 이에 대한 답을 주고 있습니다. 질문은 만일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하나님의 주권으로 다 하신 일이라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어떤 책임을 물을 수 없지 않겠느냐는 질문인 것입니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토기장이의 예를 들어 하나님의 주권을 분명히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토기장이는 그릇을 만드는 사람으로서 자기가 마음먹은 대로 귀히 쓸 그릇과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들어진 그릇이 그릇을 만든 토기장이에게 왜 내 그릇은 천히 쓸 그릇으로 만들었느냐고 불평을 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어찌 조물주의 하시는 일에 피조물이 불평할 수 있겠느냐는 답을 분명히 주고 있습니다. 이 말의 깊은 뜻은 인간의 얕은 지식 수준으로 감히 세상을 창조하시고 온 우주를 운영하시며 깊은 뜻을 가지신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불평하거나 왈가왈부 할 수 있겠느냐는 답인 것입니다.
[2]다음은 22절부터 26절까지의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앞부분에서 토기장이가 귀히 쓸 그릇을 만들든 천히 쓸 그릇을 만들든 토기장이의 주권인 것을 밝혔는데 22절부터 26절까지에서는 이 주권을 하나님께서 가지셨던 구원의 섭리에 연계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회개하지 않아 심판 받기로 예정된 죄인들을 향해 당장 심판하시지 않으시고 회개의 기회를 주시기 위해 심판의 시기를 오래 참으심으로 늦추시는 것도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반면에 회개하여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영광을 얻기로 예비 된 자들에게 그 영광이 얼마나 부요한 것인지를 알게 하기 위해 그들이 믿음을 더욱 지켜나가도록 인도하시는 것도 하나님의 주권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영광을 얻기로 예비 된 자들이란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중에서도 하나님의 부르심에 임한 자들임을 밝히므로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는 유대인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 아니라 이방인도 포함된 만민에게 개방된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은 또한 심판 받기로 준비된 자들이란 이방인 중에서 뿐 아니라 선택받은 유대인 도 이에 포함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하나님을 찾는 자들에게 구원의 문을 열어 주신 하나님의 주권과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는 자들에게는 심판이 정해져 있는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구약의 호세아서를 인용하여 이방인들에게도 구원의 문이 열려 있다는 진리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인용한 호세아서는 2:23 로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않는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저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으리라’ 라고 표현했습니다. ‘내 백성 아닌 자’ 나 ‘사랑치 않는 자’란 이방인들을 두고 한 말입니다. 본래는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으며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한 자들이었던 것입니다. 또 가나안 땅 이외의 곳은 택함 받지 못한 땅이었으나 그러나 그런 것들은 임시적인 것이요 단계적인 것이었으며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는 인종과 지역에 상관없이 하나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개방된 것임을 밝히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인들이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를 잘못 이해하여 이스라엘 자신들만이 택한 백성이요 하나님은 오직 자기들만의 하나님이신 것으로 오해하고 있었는데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 그리고 많은 선지자들을 통해 하나님은 유대인의 하나님도 되시며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심을 만방에 선포하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오늘 주신 말씀을 통해 어떤 교훈을 받았으며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의 교훈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인 하나님의 주권에 무조건 승복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주권을 행사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덴 동산을 지으시되 아담과 하와를 위해 지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몫은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이 지으신 동산에서 하나님의 질서를 지키며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시는 것이었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하시어 자기의 백성을 삼으신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어 이스라엘에 복을 내리시는 하나님을 이방인들이 보고 체험하게 하여 이방인들도 하나님께 돌아와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깊고 깊은 구원의 섭리였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주권은 공로가 없는 인간을 사랑하시어 인간에게 구원을 주시기 이한 주권인 것입니다.
이 세상의 일은 절대주권이란 것이 없어서 순전히 여론에 의해 좌우되기 마련입니다. 대다수의 의견이라면 진리도 버리고 악도 택해야 하는 모순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는 우리들로서는 인간을 사랑하기 위해 행사하시는 하나님의 모든 주권에 무조건 순종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일들은 함정이 있을 수 있어서 무조건 믿고 행하기에는 위험부담이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순전히 인간들을 위해서 모든 주권을 행사하시기 때문에 온전히 믿고 순종하기만 하면 그 결과는 인간에게 행복만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물론 어떤 말씀은 인간들의 지능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인간들의 경험과 어긋나는 것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위해 세상을 창조하셨으며 인간들을 위해 새 하늘과 새 땅을 예비해 두셨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하나님의 주권인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 순종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의 순종은 인간들에게 지대한 행복과 생기 있는 삶을 가져다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그 이유는 세상 여론이 어떻든지 그 세상 여론에 따라 변경될 수 없는 절대적인 하나님의 주권인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신학은 여론 몰이에 의해 다수의 사람 의견에 따라 하나님의 절대 주권인 하나님의 말씀을 손질해 나가며 사람들의 입맛대로 고쳐나가고 있는 현실입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의 주권을 무너뜨리고 사람의 주권을 세워 나가므로 사람들이 살맛이 나고 있는지 모르지만 주님 재림시에는 하나님의 주권을 무너뜨리고 사람의 주권을 행사한 대표 인물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듯 하나님의 주권을 무너뜨린 모두에게 심판을 내리실 것입니다.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하나님의 주권에 순종하는 자들에게 구원을 하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방인의 숫자가 어떻든 유대인의 숫자가 어떻든 그 숫자와 상관없이 사람의 눈치 보지 않으시고 오직 하나님께서 가지신 주권인 성경에 의해 선악간에 심판하실 하나님께 감사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가나안 땅에 살든지 이방 땅에 살든지 전혀 차별하시지 않고 오직 말씀 하나로 심판하실 하나님께 감사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세상 법은 변하고 제도는 변해도 하늘 나라 가는 길을 안내한 하나님의 주권인 말씀은 일점 일획이라도 변하지 않고 그 말씀만 믿고 순종한 자들에게 구원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오직 사랑이요, 긍휼이며, 변함없는 진리인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주권을 더욱 경외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