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다운 헌금 – 사도행전 4:32-5:11

지난 주에는 교회에 일어난 첫 번째 핍박이 소개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전한 베드로와 요한을 옥에 가두었으나, 베드로와 요한은 담대하게 재판관 앞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재판관들이 더 이상 예수의 도를 전하지 말라고 경고했으나 너희들 말 듣는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 듣겠다고 당당하게 답변하므로 재판관들이 오히려 쩔쩔매고, 옥에 갇혔던 사도들이 당당하게 옥에서 나오므로 첫 번째 승리를 이끈 두 사도와 함께 성령께서 하신 역사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방금 읽은 본문 말씀을 통해 교회에 나타난 첫 번째 범죄를 소개받게 됩니다. 첫 범죄가 물질 관리를 잘못한 죄로 죽게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경우를 소개해주므로 우리가 가진 물질에 대한 바른 인식을 갖고 바른 헌금관을 갖고 실천하여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청지기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을 중심해서 3부분으로 나누어 생각해 보겠습니다.

 

[1] 연합과 일치(4:32)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초대교회가 불과 두 세 달만에 3천, 5천, 1만, 1만5천 그렇게 성장한 것 아닙니까? 이렇게 부흥되는 첫째 요소는 단합이었습니다. 그들은 각 나라에서 각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고 각자의 경험이 다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었습니다. 할렐루야입니다. 오로지 그들의 마음은 나같은 죄인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살려주셨다는 사실과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를 하나님께서 살리시듯 자신들도 언제가는 죽어도 다시 살게 될거라는 부활의 신앙을 가졌으며, 자기들에게 주어진 사명은 자기들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바쳐 주 예수 믿는 도를 전하는 마음뿐이었고, 가난한 자들을 자기 재산을 팔아서 구제하는 일을 했습니다.

 

[2] 희생입니다(32-37)

재산을 팔아 판 값을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돈을 가지고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누어준 돈으로 모자란 사람이 없었다고 기록이 됩니다. 그리고 자기 것을 자기 것이라고 하는 자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것이 가능했을까요? 현대 교회와 많은 차이가 있지 않습니까?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그들은 예수님이 자신들을 구원해주시는 구세주이시요, 자기들의 재산과 생명의 주인되심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재산이 있다해도 죽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앞으로 죽어가는 사람이 있는데, 집 2채 중 1채를 팔아서 병원비를 하여 나을 수 있다면 누구라도 그렇게 했을 거예요. 주님께서 영원히 죽게될 자신을 살리셨는데, 그 은혜를 생각하면 재산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였기 때문에 아깝다는 생각이 전연 들지 아니했기 때문입니다. 주신 이도 하나님이심으로 내가 필요한 것은 언제나 주실 것을 믿는 믿음이요, 주님께서 살아계실 때 교훈하신 것들이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눅 12:33 “너희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를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고 한 말씀을 비롯 눅 9:23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 오하”하셨으므로, 주님의 교훈대로 가난한 자를 돕고, 자기의 대명사처럼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재물의 욕심에서 해방되고, 주님께 속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영적으로 구원얻는 일이 어찌나 큰 일이던지 그것 얻은 그들은 재산 이상의 것도 바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재산이 문제가 아니고 결과적으로 예수 믿는 일로 생명의 위험까지고 두려움없이 감수할 수 있었지 않습니까?

 

[3] 위선(5:1-11)입니다.

4:36, 37을 보면 요셉이라 하는 바나바가 그의 밭을 팔아 사도들에게 바친 기록이 아옵니다. 이 바나바는 사도행전의 기록을 통해 바울과 전도를 함께 했던 바로 그 바나바입니다. 이 바나바는 아예 재산을 교회에 바쳐버리고 전도하는 일에 여생을 바친 것 같습니다. 이렇게 바나바가 재산을 바치니 혹시 교회에서 바나바가 칭찬을 들었는지 모릅니다. 교인 중 아나니아와 삽비라라는 부부가 있었는데 이들도 바나바와 또 재산을 교회에 바친 자들과 같이 자기의 희생과 믿음이 크다고 칭찬을 받고 싶은 생각이 있어서 땅을 팔기로 작정을 하였는데, 부부가 공모하기를 판 것 중 일부는 좀 감쳐두고 나머지만 사도들 앞에 내놓되 재산의 전부라고 하자고 했던 것입니다. 재산을 다 바쳤다고 해야 칭찬이 클테니까요. 이 일로 베드로는 성령이 알게 하심으로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속이고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아무말도 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을 훤히 알아보시듯 다 알고 있었습니다.

아나니아가 판 값의 일부를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베드로가 책망합니다.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하니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죽어버렸어요. 한 3시간쯤 있다가 그의 아내 삽비라가 들어오니, 베드로가 묻기를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하니 “예, 이것뿐입니다.”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니 베드로가 “너희가 어찌하여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이 너를 메어 나가리라”하니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리어 죽게된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죄는 무엇입니까? 왜 죽었습니까?

1)철저하지 못한 신앙고백입니다. 주는 나의 구원자이시며 내 모든 것의 구원이심을 바로 고백하고 실천했다면 그런 일이 없었을 텐데, 주 안에서 구원도 얻고 싶고 또 세상도 섬기면서 즐거움도 누려보겠다는 양다리 걸치는 작전 때문입니다. 온존한 신앙고백이 아니라 부분적인 고백이었습니다.

2)오히려 재산을 팔지 아니했다면, 일부라도 바치지 아니했다면 거짓말한 죄가 없었을 텐데, 사도들과 교인들을 속여보려는 거짓말이 통하겠지 하는 인간생각으로 했는데 결국 이것은 사람을 속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속인 것이요 성령을 속인 죄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3)성령이 그들 마음자리에 자리 차지하고 있어야 함에도 성령대신 사단이 그들 마음 속에 차지하도록 허락한 죄 때문입니다.

이런 거짓과 위선을 하나님께서는 자적하시고 죽게까지 벌을 내리셨습니다. 물론 이 일은 우리 인간 동정심으로 좀 지나쳤다 할 수 있겠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사형 선고를 하셨습니다. 이것은 교인들에게 아니 교회에 위선과 거짓이 있어서는 아니 된다고 하는 본 때를 보여준 것 같습니다.

그 결과로 어찌 되었습니까? 11절에 보면 이 일로 온 교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했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본문의 교훈을 우리는 신앙생활에 어떻게 적용해야 하겠습니까?

 

첫 번째는 연합과 희생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초대교회 같이 성장하려면 연합과 희생이 절대로 요구됩니다. 수가 많든지 적든지 간에 신앙의 목적과 목표가 같아야 합니다. 같은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교회와 우리의 사명은 전도와 구제입니다. 교회 안에 많은 목적과 수단이 존재하지만, 오늘 교회에 온 것은 나를 구원해주신, 나를 살려주신 그 분께 예배드리고, 그 은혜에 감사해서 내 시간과 물질 드려 복음을 전하고 가난한 이웃에게 구제하는 일입니다.

우리 교회는 아니 우리 성도들은 우리의 목표와 방향을 새롭게 가다듬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고 예배하지 않는 것이 죄요, 우리의 사명인 전도와 구제의 사명감당하지 못하면 우린 책망받을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영광 받으러 교회 오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우리의 시간과 물질 아껴서 이웃들에게 사랑을 전하는 교회와 교인 되어야 합니다. 전도와 구제 없는 교회와 교인은 죽은 교회요, 죽은 교인임을 우리 스스로 시인하여야 합니다. 연합과 희생이 있는 우리 교회는 날마다 구원 얻는 자를 하나님께서 더해 주실 것입니다.

두 번째는 진실된 헌금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에서는 어떤 헌금을 실시해야 할까요? 아니 교인들은 어떻게 헌금해야 하나님 앞에 합당한 헌금을 드릴 수 있을까요? 물론 헌금에 대한 각자의 이론이 많겠지만 우리의 방향은 하나님께 합당한 헌금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합당한 헌금은 은밀한 헌금이어야 합니다. 그럴러면 누구에게만 드려지는 헌금이어야 합니까? 하나님께만 입니다. 왼손이 모르게 오른손이 헌금하도록 하라는 교훈은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진 헌금되도록 하신 것입니다. 인간에게 공개하므로 위선적인 헌금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누가 알 필요 없습니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하나님께만 해야 합니다. 헌금하고 나면 자랑하고 싶겠지만, 자랑하면 상이 없습니다. 영광이 없습니다. 철저히 은밀하게 해야 합니다.

또 감사하며 자원하여 드려야 합니다. 억지로 해서는 안됩니다. 자기 죄를 용서해주신 은혜, 자기를 살려주신 은혜에 감사해서, 먹고살도록 도와주신 은혜에 감사하여 기쁨으로 헌금해야 합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범사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헌금해야 합니다. 혹시라도 1만불 헌금하면 그만큼 주시겠지 하고 하나님 마음 사려 드리지 마십시오. 주시는 이는 일서 주실 것이요, 내 쪽에서 복 받으려는 투자가 아니라 지금 받은 복에 감사해서 드려져야 합니다. 또 복권 당첨되면 주님께 절반 드리겠습니다고 서원하며 하나님께서 복권을 당첨시켜 주시라고 하지 마십시오. 어떤 사업을 놓고 성공 거두면 바치겠다는 서원을 해가며 내가 이익을 얻어보겠다는 헌금 서원하지 마십시오. 지금 받은 은혜에 감사하며 지금 바치는 헌금이어야 합니다. 솔직한 헌금이어야 합니다. 하나님 내가 더 바쳐야 하는데 백화점 돌아다니다 보니 이것 남았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더 드려야 하는데, 오늘 이것밖에 못가져 왔습니다. 겸손한 마음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합당한 헌금은 또 이익을 얻은 대로 헌금하여야 합니다. 전도자는 교인들이 잘못 바쳐서 죽게 만들어도 안되고, 또 바치치 않게 해서 죽게 해도 안됩니다. 어린 학생들도, 어른도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먹고 입고 쓸 수 있도록 물질 주셨음에 감사하여 하나님의 양심이 전해준 액수를 바쳐야 합니다. 하나님의 양심이 전해준 것이란 내 생명을 구원해주신 분에게 드릴 마땅한 양을 말합니다. 생명의 가치에 대한 인식을 바로 하고, 물질을 주신 하나님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양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모두가 생각이 다르고, 얼굴 모양이 다르고, 경험이 달라도, 모든 마음과 뜻을 하나로 합하여 하나님께 예배하고, 우리의 사명인 전도와 봉사, 구제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물질은 우리 삶의 목적이 아니고 수단이므로 물질에 대한 인식을 바로 하고, 물질을 위해 우리 인생을 소비해서는 안되고, 우리가 해야할 예배와 전도와 구제봉사를 목적으로 하고, 주신 물질에 감사하고 그 물질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잘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우리에게 주신 귀한 물질을 잘 관리하는 성실한 청지기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