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 교훈과 다른 교훈 – 디모데전서 1:1-11

오늘부터 디모데 전서 강해가 시작됩니다. 방금 봉독한 본문에 들어가기 전에 디모데 전서에 대해 간단히 소개해 드리고 본문으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디모데 전서는 사도 바울이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디모데 전후서와 디도서를 보통 목회 서신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그 이유는 교회의 조직과 교리 등 목회적인 내용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디모데는 사도 바울이 믿음 안에서 참 아들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제자요 동역자로서 사도 바울에게 사랑 받는 신실한 일꾼이었던 것입니다. 디모데의 아버지는 헬라인이요, 어머니는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데모데가 사도 바울을 만났을 때까지 그는 할례도 받지 않았으므로 그는 아버지의 혈통을 따른 것으로 보아집니다. 그러나 유대인 그리스도인인 어머니 유니게, 외 할머니 로이스의 영향으로 이미 그에게는 신앙을 받아드릴 바탕이 되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어집니다. 그러다가 사도 바울을 만나 사도 바울과 함께 전도 여행을 따라다니며 전도자로서 양육을 받고 사도 바울의 보냄을 받아 교회들을 방문하여 교회들을 가르친 신실한 주의 종이요 사도 바울의 동역자가 된 것입니다.

 

이 디모데 전서는,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풀려난 후 선교 여행 중에 쓰여진 것으로 이해하고 있으며 디모데 후서는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 다시 갇히게 되고 그의 임종 직전에 쓰여진 것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 디모데 전서는 에베소 교회에 머물고 있는 디모데에게 에베소 교회를 외부의 이단 사상으로부터 순수하게 보호하고 또 내적으로 성숙한 신앙 생활을 하도록 지도하게 하기 위해 보내진 편지인 것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방금 봉독한 본문은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에베소 교회를 이단 사상으로부터 보호하고 순수한 복음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이뤄지도록 하라는 부탁의 글인 것입니다. 요사이의 기독교계 신문은 ‘이단’에 대한 글을 많이 소개하고 있는데 사도 바울 당시에도 이미 순수 신앙에 도전하는 이단 세력들이 존재했던 것입니다. 우리들은 오늘 소개되는 본문을 통해 순수한 복음이 무엇이고 이단 사상이 무엇인지를 잘 소개받아 보다 순수한 복음을 통한 믿음을 가지시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의 본문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본문의 뜻을 이해하고 본문이 주는 교훈을 찾고 그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는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디모데를 위한 축복(1-2) [2]바른 교훈과 다른 교훈(3-6) [3]복음과 율법(7-11)입니다.

 

[1]먼저 1절부터 2절까지의 디모데를 위한 축복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1절에서 자신은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되었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강권으로 사도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자신의 사도직은 땅에서 조작된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내려진 신성한 것임을 강조하는 말이 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아직 20여세밖에 되지 않은 믿음으로 낳은 참 아들 디모데 전도자를 격려하여 에베소 교회를 잘 양육하도록 권면의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편지 서두에 디모데를 위해 하나님께 복을 빌어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편지에서 늘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을 빌어주는데 오늘 본문에서는 은혜와 평강에 긍휼 즉 자비를 더 빌어주고 있습니다. 은혜와 긍휼이란 죄인 된 우리가 죄 사함 얻어 구원된 것을 말하는 것이므로 은혜나 긍휼은 같은 의미이겠으나 긍휼이라는 단어를 추가했습니다. 물론 평강이란 은혜와 자비의 결과로 얻은 마음의 평화를 뜻하는 것입니다. 모든 성도는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를 바로 알고 늘 마음에 평화가 자리잡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른 복인 것입니다.

 

[2]두 번째는 3절부터 6절까지의 바른 교훈과 다른 교훈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2년 정도 옥살이를 하다 석방되어 디모데와 함께 아시아에 있는 에베소에 왔다가 사도 바울은 다시 유럽지역인 마케도냐로 떠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가 떠나면서 디모데는 에베소에 머물게 하고 그에게 부탁한바 있었는데 다시 마게도니아에 도착하여 마게도니아로 부터 편지를 보내 디모데에게 다시 부탁하고 있는 것은 어떤 사람들이 바른 교훈이 아닌 다른 교훈을 가르치고 있는데 그들이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못하게 막으라는 것입니다.

 

바른 교훈이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에 따라 복음을 듣고 믿어 죄 사함 받아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며 또 죄 사함 받은 깨끗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 없는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교훈이란 믿음을 낳게 하거나 구원을 낳게 하지 못하고 오히려 말다툼만 낳게 하는 신화와 끝없는 족보이야기라 했습니다. 그 당시의 신화란 어떤 사상이나 철학, 또는 세상 지식을 말하는 것으로 자기 자랑이나 자기 과시 용이라 하겠습니다. 남보다 더 많이 알고 더 깊이 알며 자기가 이해하고 있는 것을 떠벌림으로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을 부끄럽게 하고 스스로 높이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 족보란 자기가 누구의 후손이라는 자랑으로 자기 선조가 위대했기 때문에 자신도 자동적으로 위대해지는 것 같이 족보를 자랑하는 것으로 자신을 높이려하는 풍조를 지적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에베소 교회에서 믿음을 낳게 하여 구원을 이루게 하는 복음에 자신들의 의견을 더하거나 빼는 다른 교훈을 가르치는 자나 또는 세상 철학이나 신학 이야기 또는 족보이야기로 재미보는 자들을 교회에서 중지시키라는 권면인 것입니다.

 

[3]마지막은 7절부터 11절까지의 복음과 율법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에베소 교회에는 또 율법을 강조하면서 율법을 잘 아는 것 같이 남에게 율법을 가르치려는 자들이 있는데 실상은 그들이 말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무엇을 주장하고 있는지도 스스로 모르는 자들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율법이란 율법을 거스리는 모든 자는 하나님 앞에 다 죄인임을 깨닫게 하는 것임으로 죄를 깨닫게 해주는 율법 자체는 선하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이란 율법을 통해 죄를 깨닫고 죄인인 인간들이 그 죄에서 사함 받기 위해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고 복음을 받아드리도록 하는 몽학 선생의 역할을 해주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의 역할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 같이 가르치는 자들이 있는데 그들은 자기들이 가르치고 있는 율법의 기능이나 능력도 모르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법을 어긴 자와, 불순종하는 자며, 경건치 아니하는 자와 죄인들이며, 거룩하지 아니하는 자가 죄인임을 들어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며 또 망령된 자와 아비와 어미를 치는 자며 살인자와 음행자와 동성연애자며, 또 도적질하는 자와 거짓말하는 자며, 거짓 맹세하는 자와 바른 교훈을 거슬리는 자들이 다 죄인임을 깨닫게 하는 것이 바로 율법이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율법은 인간들이 모두 죄인임을 판정해 주는 도구이지 율법을 통해서 구원받는 도구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든 죄인들은 복음을 통해 구원받도록 하나님께서 구원의 경륜을 마련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지신 예수를 믿는 믿음에 따라 구원받는 복된 소식에 맞는 것은 바른 교훈이려니와 이 복음에 어긋나는 어떤 가르침도 다른 교훈이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변론이나 일으키게 하는 신화나 족보 이야기를 위해 보냄을 받은 자도 아니요 또한 죄만 깨닫게 해주고 죄를 해결해 주지 못하는 율법을 가르치도록 보냄을 받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구원받게 하는 복음을 전파할 사명을 받았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오늘 본문을 통해 어떤 교훈을 받았으며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의 교훈은 바른 교훈과 다른 교훈을 분별할 줄 알고 바른 교훈 안에 뿌리를 내린 믿음을 가지라는 교훈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바른 진리에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보장하시는 진리에 뿌리를 내린 믿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큰 교단이라든가 많은 교인수라든가가 진리의 교회라는 보장이 없으며 또 유명한 신학자라든가 유명한 부흥사나 목사의 유명세가 진리라는 원칙도 없습니다. 더군다나 듣기 좋은 설교, 철학과 문학과 도덕을 논하는 유식한 설교가 진리일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뿌리를 내릴 진리란 교회가 세워진 이후 초대 교회들이 실천한 모범을 따라 실천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구약은 성도들이 참고는 하되 성도들이 지키고 따라야할 모범은 아니며 신약이 성도들이 지키고 따라야 할 진리인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예배시에 악기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하면 아니 구약에서도 다 사용했는데 왜? 사용하면 안 되느냐고 모두가 그렇게 나오니 교회들이 구약이 무엇인지 신약이 무엇인지도 구분 못하고 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매주 만찬을 하는 것이 성경적임에도 매주 만찬을 시행하는 교회를 이상한 교회로 판단을 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예수 믿자 마자 세례를 받는 것이며 세례는 죄 사함을 목적으로 받는 것임에도 교회들은 자기네 교파의 전통에 따라 세례는 믿은지 1년이 지나야 받게 한다든가 세례를 약식을 베푼다던가 세례를 받는 목적이 죄사함을 위해 받지 않고 있으니 간판만 기독교이지 내용은 복음과 거리가 먼 현실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가 자란 신앙의 배경을 초월하여 우리의 모든 실행을 하나씩 신약 성경에 따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초대 교회들이 지켰던 모범에 비교해 보아야 합니다. 만일 내 신앙이 그것과 일치하지 안는다면 성경의 모범에 따라 내 실천을 수정해야 합니다. 내가 옳은 것인지 아닌지를 신약 성경 말고 다른 것에 맞추어 보아서는 아니 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는 가짜 패턴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가짜가 진짜를 뺨을 칠 정도로 큰 소리를 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어떤 교파도, 또 어떤 교회도 하나님 앞에 우리를 보장해주지 못합니다. 오직 말씀에 순종한 그 자신의 믿음만이 각자를 보장해 줄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세례가 성경적 세례입니까? 우리의 직분은 성경적입니까? 우리의 예배는 어떻습니까? 각자가 자기의 믿음을 하나 하나 성경 원본에 대보고 원본과 어긋나는 것을 다 고쳐나가 하나님 앞에 보장된 믿음을 가지시기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