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들과 이단에 대한 교훈 – 디모데전서 6:1-5

오늘 주일이 금세기의 마지막 주일이 되며 다음 주일은 세계가 대망하고 있는 새 천년의 첫 주가 되겠습니다. 새 천년을 맞는 세계의 표정은 엄청난 돈을 들여서까지 새 천년의 첫날을 맞으려고 하는 축제의 분위기 속에 휩싸여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12월 31일과 1월 1일은 하루 차이임에도 그 하루가 바뀌면 인생의 운명이 온전히 바뀌게 될 것을 기대하며 새 천년을 맞으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사람이 바뀌어 새롭게 되지 못한다면 새 천년과 새 세상은 아무런 의미도 가져다주지 못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에 새 천년에 대한 세상 변화에 대한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오직 교회 지도자들이나 성도들의 마음에 변화를 가져오기를 기대하면서 글을 써서 우리들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변화된 사람은 12월 31일도 새 천년 초하루와 똑같은 감격으로 맞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들인 우리에게는 새 천년을 맞는 대망보다는 주님 재림시에 맞을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영원한 삶을 대망하고 있기 때문에 세상의 변화에 민감하기보다는 우리 자신의 심령의 변화에 더욱 초점을 맞추어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새 천년은 왔지만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은 종들과 이단에 대한 교훈으로 우리들에게 심령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이 주는 교훈을 통해 우리들의 생활에 변화를 가져와 새 천년도 맞고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시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의 본문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본문의 뜻을 이해하고 본문이 주는 교훈을 찾으며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는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종들에 대한 교훈(1-2) [2]이단에 대한 교훈(3-5)입니다.

 

[1]먼저 종들에 대한 교훈을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인류 역사에 노예 제도라는 것이 있어서 사람은 사람인데 인격적 대우를 전연 받지 못하고 그저 짐승이나 물건 정도의 취급을 받았던 신분이 있었습니다. 노예는 주로 전쟁 포로였지만 남에게 진 빚을 갚지 못해서 남의 노예가 되기도 하고 또 노예의 자손으로 태어난 이유만으로 노예로서의 삶을 살아가야 했던 것입니다. 이 편지를 쓸 당시에 로마 제국은 인구의 절반 가량이 노예였는데 그 중 로마시에는 노예의 수가 자유인의 약 4배에 달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노예들이 많았기 때문에 노예 제도는 그 사회에서 큰 이슈가 되었던 것입니다. 금세기에는 기업인과 종업원들간의 노사 갈등으로 인한 노동 파업이 심각한 사회 문제로 부각되고 있는데 요사이 한국은 이 노사 갈등이 국가의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는 현실이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은 노예 제도에 대해 찬성한다는 말도 없고 그렇다고 노예 제도에 대해 반대한다는 말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물론 기독교에서는 만민 평등이요 형제 주의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노예제도를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 시대에 현실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노예 제도아래서의 노예들이 어떻게 처신해야 하여야 할 것인가에 대해 교훈하고 있는 것입니다.

 

1절에서는 불신자 주인에게의 종의 처신에 대해 교훈하고 있습니다. 믿는 종들은 믿지 않은 상전에게 항상 공경할 자로 알라고 했습니다. 불평 불만이 어찌 없겠습니까마는 할 수 있는 일거리를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여 상전에게 공손하고 예의 바르게 높여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할 이유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만일 믿는 다고 하는 종이 불성실하게 일을 하거나 또는 종이 자기의 위치도 모르고 주인에게 불손한 태도를 보인다면 그 종이 믿는 하나님은 그 종의 마음에 변화를 줄 수 없는 무능한 하나님으로 불신자 상전에게 오해가 되어 하나님께 욕을 돌리게 되거니와 만일 믿는 종이 불신자 상전에게 충성할 때에 상전은 그 종이 믿는 하나님에 대해 호의적인 관심을 갖게 만들어 결과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즉 종이 성실하게 일하는 것은 종과 상전만의 관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까지 연관되는 것입니다.

 

2절에서는 믿는 상전에게 대하는 믿는 종의 처신에 대해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만일 믿는 종이 믿는 상전을 섬기게 될 경우에는 그 상전이 형제라고 가볍게 대하지 말고 오히려 더 잘 섬기라고 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노예들이 그렇게 많았기 때문에 노예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어 교회마다 많은 수의 노예들이 있었을 것이며 노예 중에도 지역 교회의 집사나 장로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골로새서나 에베소서에 노예들에게 상전을 잘 섬기라는 권면이 있고 또 빌레몬서는 노예 한 사람에 대해 쓴 것임을 볼 때에 노예가 교회마다 상당수가 있었음이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 내에서 상전이 노예에게 형제로 친밀하게 대우해주고 또 노예도 자기 상전을 형제로 편하게 대하다 보니 건방진 노예들은 형제인 상전을 가볍게 대하고 깔볼 수 있는 여지가 얼마든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실수를 막고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믿는 상전을 더욱 잘 섬기라고 교훈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는 노예가 믿는 상전을 잘 섬기므로 피차에 사랑이 깊어지고 서로 이익을 가져다주고 하나님께 또한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므로 믿는 노예들에게 이것을 가르치고 권하라고 부탁하고 있는 것입니다.

[2]두 번째로 3절부터 5절까지의 이단에 대한 교훈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3절부터 5절까지는 진리와 이단을 다른 교훈과 바른 말로 비교해주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바른 말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이르게 하는 교훈이라 했습니다. 즉 바른 말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하신 말씀과 그의 사도들에 의해서 주어진 교훈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는 성도들이 바른 교훈에 착념하도록 즉 바른 말인 예수님의 말씀을 늘 가까이 하고 실천하라는 교훈입니다.

 

이 세상에는 다른 교훈을 말하는 이단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단이란 오늘 본문이 말하는 대로 다른 말을 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정면 부정하거나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자기의 의견을 더하여 손질한 말이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말이란 아예 다른 말이거나 아니면 사람에 의해 일부를 뺐거나 더한 손질된 말이 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다른 교훈을 하는 자들은 교만한 자요 아무 것도 모르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정면 부인한 자이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손질한 자는 하나님을 무시한 자요 자신을 높이는 자이므로 교만한 자가 되는 것이며 자기가 무엇을 아는 척 하지만 실은 아무 것도 모르는 자라고 했습니다. 또 바른 말에 순응하지 않고 다른 말의 교훈을 가르치는 자는 오직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요 결과적으로 다른 사람을 두고 시기하고 분쟁하며 남을 비방하고 진리에 대해 악한 의심을 하며 마음이 부패하여져서 진리나 경건을 이익의 수단으로 삼는 자가 된다고 했습니다.

 

성경 최초의 이단 즉 성경 최초로 말씀을 손질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부정한 사건은 뱀과 하와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셨는데 뱀은 하나님의 말씀을 정면 부정하기를 ‘너희가 죽지 아니하리라’고 거짓말을 했고 하와는 하나님께서는 먹지 말라고만 하셨는데 하와는 하나님께서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했다고 고쳐 말한 것입니다. 뱀도 하나님을 무시하고 거짓말을 했으며 하와도 하나님을 무시하고 명령을 어긴 것입니다. 뱀도 하와도 자기들로서는 이 세상에 그 누구보다 더 똑똑하고 앞선 사람같이 자신했겠지만 실은 바로 뒷일도 알지 못한 아무 것도 모른 자가 되어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받고 영원히 죽게 되고 마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오늘 주신 본문을 통해 어떤 교훈을 받았으며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첫 번째의 교훈은 믿는 성도들은 주인이 믿는 자이건 불신자이건 충성스럽게 일을 하라는 교훈입니다. 주인이 보든지 보지 않든지 자기가 해야할 일을 부지런히 일해서 주인에게 이익이 돌아오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자기가 받는 월급이 자기가 하는 일에 비해 적더라도 계약대로 열심히 해야하는 것입니다. 일하는 시간에 믿지 않은 옆 친구에게 전도하느라 시간을 허비한다해도 주인에게도 불충실한 자요 하나님께도 불충실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주인은 혹 개으른 것을 보지 못할 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내려다보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의 소망은 이 세상이 아니기 때문에 때로는 억울하고 불공평을 당하는 일이 있더라도 자기 주인에게 최대의 성실로 보답해야 하는 것이 성도의 자세인 것입니다. 혹 주인이 믿는자이거나 또는 친척이므로 좀 일할 때에 개으름을 피워도 이해할 것이라는 기대를 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더 잘해야 한다는 것이 본문의 교훈입니다. 물론 주인도 종업원에게 최선의 대우를 해야 하겠지요. 상전이나 종이나 모두 심판 날에 삼판대 앞에 서야하는 존재들이므로 그 때까지 각자가 최선을 다해 주인과 종에게 피차 유익을 주고 또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해야 한다는 교훈인 것입니다.

 

둘째로, 바른 말을 늘 가까이 하고 다른 교훈 멀리하라는 교훈입니다. 이 세상에서 성경을 가지고 인기를 끌려고 한다면 성경을 그대로 전하면 인기를 끌 수 없을 것입니다. 성경을 정면 부정하거나 성경을 좀 고쳐서 가르치면 많이 유식해 보이고 많이 현대적인 학자로 박수를 받을지 모릅니다. 하와의 귀가 솔깃해서 유혹을 당하듯 말입니다. 그러나 성도나 성경을 가르치는 전도자나 우리 모두의 관심은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고 우리들 자신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먹으면 죽는다고 했으면 먹으면 죽는 다고 가르치고 그렇게 믿어야 바른 교훈에 착념하는 것이지 먹어도 죽지 않는다고 거짓말을 하거나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했다고 자기 말을 더하는 것은 다른 교훈을 말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검다고 했으면 우리 모두는 다 검다고 할뿐이지 검지 안아도 된다고 하거나 절반만 검어도 된다고 한다면 이것은 다른 교훈이 되는 것입니다. 나아만 장군은 문둥병을 낳기 위해서는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들어갔다 나와야 하는데 그 누가 요단강 말고 더 깨끗한 물에 들어가는 것이 더 병 치료에 좋다고 하거나 여섯 번만 들어가도 된다거나 더 완전히 낫기 위해 열 번 들어가라고 했다면 역시 다 다른 교훈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바른 교훈을 가르치고 따르는 길은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길이요 다른 교훈을 좋아하는 자는 새 예루살렘을 등지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귀한 교훈에 접한 우리 모두는 자기가 일하는 주인을 위해 충성스럽게 일도 하고 또 우리 모두는 바른 교훈에 착념하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