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실천 – 요한1서 3:10-24

사람의 육적인 몸이 뼈와 살로 되어 있다고 한다면 영적인 몸은 믿음과 행함으로 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약 성경 책중에서 로마서 같은 책은 믿음의 뼈대에 해당하는 교리적인 책이요 야고보서나 지금 강해하고 있는 요한서신 같은 것은 마음으로 믿고 있는 것을 생활로 실천해야 함을 강조하는 뼈대에 붙어야 할 살에 해당되는 책입니다. 야고보서에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단호하게 잘라 말한바 있거니와 오늘의 본문에서도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자요 사망에 거한 자라고 잘라 말하고 있습니다. 뼈와 살이 함께 붙어 있어야 한 몸을 이루듯 믿음과 행함은 늘 함께 붙어 있어야 산 믿음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한다면, 아니 하나님의 자녀라고 한다면 마땅히 형제를 사랑하는 자가 되어야 하며 만일 형제를 사랑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말과 혀로만 사랑한다고 하지 말고 행함으로 사랑을 실천하라고 실천적 믿음을 분명하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믿음이면 다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믿음이라야 하는데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믿음은 형제를 사랑하는 믿음인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소개받는 우리 모두는 본문의 교훈을 잘 받아 실천하므로 하나님께 인정받는 믿음들을 소유하시기 원합니다.

 

오늘의 본문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본문의 뜻을 이해하고 본문이 주는 교훈을 찾으며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는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하나님께 속한 자와 마귀에게 속한 자(10-15) [2]주님의 본을 따르는 사랑의 실천(16-19) [3]사랑하는 자의 복(20-24)입니다.

 

[1]맨 먼저 10절부터 15절까지의 하나님께 속한 자와 마귀에게 속한 자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10절에서 이 세상 사람을 둘로 나누어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로 나누고 있는데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않는다고 하여 마귀에게 속한 것으로 규정짓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귀에게 속한 자의 대표 모델로 아벨을 죽인 가인을 들고 있습니다. 즉 가인은 동생 아벨이 의로우므로 동생의 의로운 것을 시기하여 아벨을 죽였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본성은 의와 사랑이시나 마귀의 본성은 악이기 때문에 악은 선과 의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세상이 신자들을 싫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가인도 마귀에게 속하여 마귀의 본성을 닮아 의로운 동생을 미워하고 시기하여 동생 아벨을 죽인 것입니다. 미워하는 자는 살인하는 자요 살인하는 자는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않고 사망이 그 속에 거한다고 했습니다. 반대로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 사는 삶을 살기 위해 형제를 사랑하라고 한 것입니다. 서로 사랑해야 함은 복음을 처음 들을 때부터 듣고 아는 복을 받는 소식이라 했습니다.

 

[2]두 번째로 16절부터 19절까지의 주님의 본을 따르는 사랑의 실천 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16 절에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했습니다. 그리고 형제를 사랑해야하는 한계는 주님이 죄인이었던 우리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셨던 그대로 우리들도 형제들을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사랑을 나타내 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자기 목숨을 버리시면서 까지 사랑해주신 사랑의 은혜를 입은 자들로서 궁핍한 형제를 도울 마음이 없다면 그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이 거하겠느냐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사랑을 입은 자들은 말로나 혀로만 형제를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라 고 실천적 신앙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사랑을 실천하므로 우리가 진리 안에 거하고 있다는 산 증거가 되며 주님 앞에서 우리 마음이 떳떳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3]마지막으로 20절부터 24절까지의 사랑하는 자의 복 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20절부터 24절까지에서는 형제를 사랑하는 자가 누리는 복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셨는데 그 계명대로 순종한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책망 받을 일이 없으므로 하나님 앞에 언제나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 또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렸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받는다고 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뜻대로 구해야 할 것입니다. 기도에의 응답을 보장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은 주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한다고 했습니다. 즉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는 자 안에 하나님과 주님께서 함께 거하신다고 보장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주님이 거하시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마귀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 속하든 마귀에게 속하든 그 하나에 속하게 될 것인데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키고 순종한자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가 그 안에 거하시게 되므로 하나님께 속한 자가 될 것이며 사랑하라는 계명을 거역하고 형제와 갈등을 유지한 자는 마귀에게 속한 자가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오늘 주신 본문을 통해 어떤 교훈을 받았으며 그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의 교훈은 사랑을 실천하는 성도가 되라는 교훈입니다. 우리들은 오늘의 본문을 통해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받았지만 만일 그 계명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는 마귀에게 속한 자라는 혹독한 선언도 받았습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인지 마귀를 따르는 사람인지 자신을 분명하게 들어내고 그가 원하는 대로 행하라는 권면을 주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영생의 약속을 보장받든지 아니면 영원히 사망 안에 거하든지 하나를 택하라는 권면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는 자가 되며 또 영생이 그 안에 없고 오직 사망이 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형재와의 미움과 갈등을 해결하지 않고 그대로 신앙 생활을 하다가 세상을 떠나든지 아니면 그런 미음과 갈등을 지금 당장 해결하고 사랑의 관계로 회복하여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설 것인지 선택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 일서 1장을 시작하면서 하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빛 가운데 있지 아니한 자는 거짓말하는 자라는 논조로 성도들을 권면해오고 있습니다. 즉 믿는다고 하면서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거짓말하는 자라는 논조입니다. 우리들은 사도 요한의 이런 논리를 통해 신앙인의 삶이 보다 분명해야 함을 경고 받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마귀에게 속하든지 하나님께 속하든지 분명해야 하며, 영생을 얻기를 원하는지 영벌을 받기를 원하는지 분명히 하나를 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미지근한 신앙은 그 아무 것도 아님을 배우게 됩니다. 뜨겁든지 차든지 해야지 그렇지 못하면 토하게 된다는 주님의 논리와 같은 논리입니다. 주님께서도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고 하신 것은 선에 속하든지 악에 속하든지 하나에 속하도록 분명히 가르치신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아주 분명하게 성도들이 가야할 길을 안내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주님께서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신 것을 강조하면서 주님께서 무가치한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셨는데 우리도 마땅히 형제를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자들이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선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형제를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다는 뜻은 어려움을 당한 형제를 보면 최선을 다해 형제를 사랑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먹을 것이 필요하면 먹을 것을 주고 입을 것이 필요하면 입을 것을 주라는 것이며 이렇게 필요한 자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대접한자는 그가 받을 상을 잃지 않을 것이라고 주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또 이렇게 필요한 자에게 필요한 것을 준 자는 바로 주님께 드린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주님께서 가르치셨습니다.

 

이런 사랑을 하도록 하나님으로부터 계명을 받은 자가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고 형제를 미워하고, 시기하고, 비방하고, 수군거리며 깎아 내린다면 이런 일들은 마귀가 시킨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영생의 복을 받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형제를 사랑하든지 형제를 미워하든지 하나를 택하도록 자유 의지를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게 하든지 마귀가 내 안에 거하게 하든지 우리들 자신이 스스로 선택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모여 주님께서 주실 복을 받든지 마귀에게 속해 주님이 주실 복을 버리든지 자신들이 선택하도록 하셨습니다. 중간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를 미워하든지 형제를 사랑하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영생의 약속을 보장받는 길을 택한다면 그는 마땅히 형제를 마음으로 사랑하고 몸으로 실천하는 사랑을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마음으로는 미워하면서도 겉으로만 사랑하는척해도 안되며 입이나 혀로만 사랑하고 몸으로는 실천하지 못하는 사랑도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없는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참 사랑을 조건 없이 나눌 수 있어야 하며 이것도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를 마음에 두고 빚진 마음으로 나누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남을 돕는다고 내 것을 가지고 돕는다는 교만한 마음으로 도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마귀로부터 벗어 나와 하나님께 속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모두는 사망으로부터 벗어 나와 영생에 머물러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 형제를 미워하고 시기하고 비방하는 마귀의 일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그런 것을 벗고 형제들끼리 보다 따뜻한 말로, 부드러운 음성으로, 웃는 낯으로, 내 것을 아까워하지 않고 필요한 자들을 위해 나눌 수 있는 사랑을 실천해나가야 하겠습니다. 낯을 붉히고 매서운 말로 형제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은 마귀가 속에 들어있기 때문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마귀에 의해 움직이는 자는 하나님의 품을 떠난 자들입니다.

 

장례식에서 주례자가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고 선포하는 그 선포로 죽은 자가 하나님의 품에 안기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계명을 살아 있는 동안에 행동으로 실천하므로 결정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하나님 앞에 서기전에도 자기가 하나님의 품에 안길 것인지 아니면 마귀의 품에 안길 것인지를 본인이 먼저 판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신이 사랑을 실천하여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품에 안길 것이고 마귀에게 속하여 형제를 사랑하지 못한다면 마귀의 푼에 안길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사랑을 실천하여 하나님 앞에 떳떳하게 설 수 있는 자들이 되며, 모든 구한 것을 응답 받고 주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복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