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의 첫 열매 되신 그리스도 – 고린도전서 15:20-34

우리들이 오늘 주일을 맞아 각자가 하고 있는 사생활을 뒤로하고 예배당에 모여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답할 수 있을까요? 제가 답을 한다면 그 이유는 현세적인 구원과 미래적인 영생 때문입니다. 즉 그 이유는 우리가 예수를 믿고 순종하므로 우리가 지은 과거의 모든 죄를 용서받는 현세적인 구원을 받기 때문이며 결과적으로 우리가 죽어도 다시 부활하여 살게될 미래적인 영생의 구원을 받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속죄와 부활의 메시지는 곧 우리들에게 복된 소식이요 부활의 소망은 믿음의 핵심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 중에 더러는 부활이 없다는 잘못된 가르침에 빠져서 부활의 소망을 믿지 않고 교회에 나오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살리시어 부활의 첫 열매가 되게 하셨으므로 그를 믿는 자들도 또한 하나님께서 살리실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죽는 것으로 모든 것이 다 끝나버리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재림 후에는 더 이상 사망이 없는 하나님의 왕국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을 확신시켜주면서 그 미래적 부활의 소망이 있기 때문에 현세에서 믿음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며 모든 고통과 어려움을 다 극복하고 참고 견디어 나가고 있다고 자신의 믿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오늘의 본문을 통해 우리 교회 교인들도 부활의 소망을 더욱 견고히 하여 이 소망 때문에 현세의 모든 어려움도 참고 이겨나가시어 주님 오실 때에는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나라에서 영생의 복을 누리시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의 본문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본문의 뜻을 이해하고 본문이 주는 교훈을 찾으며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는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부활의 첫 열매되신 그리스도(20-24) [2]부활과 하나님의 통치(25-28) [3]부활의 신앙(29-34)입니다.

 

[1]맨 먼저 20절부터 23절까지의 부활의 첫 열매되신 그리스도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부활을 믿지 않은 자들에게 부활을 믿도록 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부활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고 했습니다. ‘첫 열매란’ 이스라엘 사람들이 추수한 것의 첫 단이나 첫 열매를 먼저 하나님께 드렸는데 그리스도의 부활을 이 ‘첫 열매’에 비유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추수한 것의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렸다고 한다면 앞으로 수확할 많은 열매가 농장에 있음을 증거 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즉 첫열매는 추수할 많은 열매의 보증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만일 그리스도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면 앞으로 하나님의 농장에서 추수되는 부활 할 성도들이 실지로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의심 없이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알고 있는 대로 예수님은 실지로 죽으셨고 묻히셨으며 예수님은 실지로 부활하셨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면 주님을 믿는 자들의 부활이란 너무나도 분명한 진리라는 것입니다.

 

또 사도 바울은 한 사람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이 들어온 사실을 예로 들어 이와 같이 부활도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게된다고 아담과 그리스도를 대조해주고 있습니다. 23절에서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세상 끝 주님께서 강림하실 때에 주님께 붙은 자를 살리시고 악한 마귀 권세를 완전히 멸하신 후에 모든 것을 하나님 아버지께 다 바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나는 부활의 시기는 세상 끝 즉 주님의 강림 때입니다. 그때까지는 모든 죽은 자들은 그대로 잠자는 상태로 기다리는 것입니다.

 

[2]두 번째로 25절부터 28절까지의 부활과 하나님의 통치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겠습니다. 25절부터 28절까지는 부활 후 하나님의 통치에 들어가기 직전의 과정에 대해 기록해주고 있습니다. 25절에 보면 ‘저가 모든 원수를 그 발아래 둘 때까지 불가불 왕노릇하시리니’라 하였습니다. 여기에서의 ‘저’는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이며 ‘그 발’이란 하나님의 발, 즉 하나님의 통치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25절의 뜻은 주님께서 재림하시어 죽은 자를 살리시고 모든 마귀의 권세를 멸하시고 마지막 원수인 사망의 권세를 멸망시키기까지는 그리스도께서 왕노릇 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원수인 사망의 권세를 멸망시키고 나면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을 통치하시도록 자기에게 맡기셨던 만물을 하나님께 바치게 되며 그리스도 자신도 통치자 하나님께 복종하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되므로 창조자 하나님께서 온전히 만물을 그의 뜻대로 통치하시도록 한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하나님께 복종한다고 하는 말은 주님께서 하나님의 존재로서 세상에 내려오시어 십자가를 지심 같은 복종과 조화와 질서 또는 역할 분담의 의미로 해석이 됩니다.

 

이 본문에서 우리가 확인한 것은 우리 생활 주변에서 늘 우리를 슬프게 하는 사망이 언젠가는 끝이 날 때가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언제 사망이 끝이 납니까? 주님의 재림시에입니다. 또 우리들 생활 주변에서 너무나도 끔찍한 사건들이 너무나도 쉽게 발생하고 있습니다. 아기를 임신한 여자가 어린 아기를 유괴하여 주긴 사건은 입에 담기도 끔찍한 사건입니다. 그런 사건의 뒤에는 누가 조종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사탄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탄의 권세도 온전히 멸망될 때가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언제입니까? 주님의 재림 시에 주님에 의해 온전히 멸망 받게 될 것입니다.

 

[3]세 번째로 29절부터 34절까지의 부활의 신앙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부활이 없다고 믿는 무리들에게 사도 바울이 확신하고 있는 부활의 신앙을 소개해 주므로 그들이 다시 부활의 소망을 갖도록 하고 있습니다. 29절에서는 만일 부활이 없다면 왜?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느냐는 것입니다. 이 구절은 아주 해석이 어려운 말씀으로 어떤 자들은 세례를 받지 않고 죽은 자들을 위해 대신 세례를 받아주어 주님 오실 때에 다시 살아날 수 있도록 한다는 의미로 해석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해석은 세례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과 어긋나는 것이 됩니다. 저는 이 구절은 예수를 믿기로 하고 받는 본인들의 세례를 말하는 것으로 풀고 있습니다. 세례의 의는 롬 6장 3,4절과 같이 ‘장사와 부활’인데 우리들이 세례를 받는 것은 우리들의 옛 몸을 물 속에 장사지내는 것이요 또 새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이므로 셰례는 죽는 것이요 세례는 다시 사는 것이며 옛 몸은 죽고 새 사람으로 태어나도록 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세례란 죽은 자가 다시 살도록 받는 것이므로 이 사실을 의인화하여 죽은 자를 위해 세례 받는다고 표현한 것으로 풀어야 할 것입니다. 즉 세례란 우리들이 언젠가는 옛 몸은 죽고 새 몸으로 부활할 것을 상징하는 예식이므로 만일 부활이란 실체가 없다면 그림자에 해당하는 세례를 받을 필요가 어디 있겠느냐는 논리라 봅니다.

 

또 사도 바울은 만일 부활이 없고 이 세상이 전부라고 한다면 생명의 위태로운 위험을 무릅쓰고 전도하는 일을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말을 한다면 사도 바울이나 다른 사도들은 전도하다 죽는다해도 주님 오실 때에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시고 그 때에는 영원히 살 것이므로 이 부활의 신앙 때문에 죽을 각오를 하고 전도한다는 것입니다. 돌에 맞아 죽은 스테반이 바로 이 부활의 신앙의 힘으로 순교 당할 수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돌에 맞아 죽거나 십자가에 못 박히거나 화형을 당한다하더라도 부활의 신앙 때문에 그 길을 계속 가고 있다는 것이며 만일 이 세상이 전부라고 믿는다면 이 세상이 끝이므로 먹고 마시며 이 세상을 즐기는 것으로 일삼았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부활의 신앙을 불신하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결론적으로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고 했습니다’ 무엇이 의입니까?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죄입니까? 불신과 불순종입니다. 주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 것이라‘고 했으며 이를 믿는 자는 의인이요 이를 불신하는 자는 죄인입니다. 깨어 있어라 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세상에 속한 일에만 빠져 있지 말고 주님이 준비해주신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소망에 빠져 있어라 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오늘 주신 본문을 통해 어떤 교훈을 받았으며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부활에 관한 말씀을 온전히 믿고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사는 자들이 되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살아계실때에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죽으셨다가 3일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을 직접 또는 비유로 말씀하셨며, 주님을 믿는 자는 죽어도 다시 살아 영생할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우리들은 성경을 통해서 주님의 부활과 성도의 부활에 대해 많이 듣고 보고 알고 있습니다. 일반 교파에서는 부활절 행사도 거창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나 지신이 얼마나 부활에 대한 큰 소망 가운데 살고 있는가가 문제인 것입니다.

 

오늘 주신 본문을 전해들은 우리들은 주님 오실 때에 우리들에게 펼쳐질 부활의 세계에 대한 소망을 더욱 뜨겁게 해야 하겠습니다.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고 부활이 있기 때문에 그 소망을 가지고 예배에 임해야 하겠습니다.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밥을 먹고 일을 하며 잠을 자야 하겠습니다. 부활의 소망이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는 불쌍하게 산다할지라도 실망치 않고 살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부활의 소망 때문에 어떤 때는 억울하고 눈물나는 일이 있어도 참고 이겨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오직 부활의 소망 때문에 무엇이든지 할 수 있으며 이 소망 때문에 모든 것을 참고 이길 수 있어야 한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일시적인 것이나 부활의 세계는 영원한 것이므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희생하더라도 이 부활의 소망은 키워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헌금도 봉사도 구제도 부활의 소망 때문에 나타난 행위여야 합니다. 부활의 소망을 가진 자는 어떤 위험과 어려움을 당해도 크게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부활의 소망을 가진 자는 이웃을 사랑하며 이웃에 관용하고 이웃에 덕이 되는 아름다운 생활을 살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닌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활의 소망이 크면 클수록 비례해서 행복과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가끔 열심히 봉사하고 열심히 헌금하므로 믿음이 성장하고 천국에 대한 소망이 커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말씀을 듣고 봄으로 오는 것입니다. 부활의 소망을 더욱 키우기 위해서는 날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여 이 세상의 생활을 부활의 소망에 초점을 맞추어 살아나가야 합니다. 부활의 소망을 크게 하여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도 하나님이 주시는 큰복을 다 누리시고 주님 재림시에 더 큰 복을 누리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