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를 용서하고 위로하라 – 고린도후서 2:1-11

교회 내에 문제가 전연 없을 수는 없겠지만 악으로 교역자를 헐뜯고 교회 성도들을 이간시키고 또 잘못된 교리를 교회 내에 침투시켜 주님의 교회를 어지럽히는 사람이 있다면

이런 사람을 교회에서 끝까지 바라만 보고 있어야 할까요? 아니면 엄하게 책망을 하고 듣지 않으면 내 쫓아야 할까요? 아마 어떤 분은 교회이기 때문에 끝까지 너그럽게 받아줘야 한다고 할 것이고 또 반대로 이곳은 교회이기 때문에 빨리 다스려 누룩이 온 덩어리에 번지지 않게 해야 한다고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교회내의 잘못을 시정하도록 고린도 전서를 보냈는데 그 편지를 받고 자기들의 잘못을 시정하기는커녕 오히려 사도 바울을 더욱 격렬하게 대적하여 교회를 사단의 회로 어지럽히고 있는 사실을 확인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눈물로 호소하는 편지를 통해 파괴되어지고 있는 고린도 교회가 회복되도록 처방을 보낸 것입니다. 처방이란 교회를 파괴하는 자를 징계하여 내어쫓음으로 교회가 회복되어 교회다워지게 하라고 명한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사도 바울의 처방을 받고 그대로 순종하여 소란을 피운 자들을 징계하므로 회복 국면에 들어가고 있다는 기쁜 소식을 전해 듣고 행여나 자기가 보낸 눈물의 편지를 통해 고린도 교회가 심한 상처나 받지 않았나 염려하면서 자기가 눈물의 편지를 보내게된 경위를 쓰고, 또 징계를 받은 자들이 자기들의 잘못을 뉘우쳤으므로 그들을 용서하고 위로하여 성도의 바른 관계를 갖도록 하라는 권면의 편지가 오늘의 본문 줄거리인 것입니다. 오늘 주신 본문을 통해 성도가 가져야할 바른 자세를 배워 주님 보시기에 훌륭한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기원하면서 본문을 소개 드립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본문의 뜻을 이해하고 본문이 주는 교훈을 찾으며 그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는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여정 변경의 이유(1-4) [2] 잘못한 자에 대한 용서(5-11)입니다.

 

[1] 먼저 1절부터 4절까지의 여정 변경의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개척한 전도자로서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여 고린도 교회 성도들과 사랑과 기쁨을 나누고 마땅한 대우를 받기를 간절히 원했기 때문에 마케도니아에 가기 전에 고린도에 먼저 들리겠다고 소식을 전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시기적으로 고린도 교회분위기가 사도 바울에 대한 적대 감정이 지나치게 악화되어 바로 그 때에 고린도 교회를 방문한다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사태가 악화될 가능성이 크므로 방문을 그 시기를 피하고 마케도니아에서 돌아오면서 방문하겠다고 고린도 전서에 써보냈는데 이를 트집잡아 고린도 교회 일부 교인들이 심하게 사도 바울을 헐뜯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바울의 눈물의 편지의 결과로 어느 정도 진정 국면에 들어선 것을 알고 왜? 고린도에 방문키로 했다가 이를 변경했는지? 그 진정한 이유를 고린도 교회에 해명하므로 오해를 완전히 씻으려고 해명의 글을 쓴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1절에서 다시 근심으로 고린도에 가고 싶지 않아서 변경한 것이라 했습니다. 이미 몇 번 되풀이했지만 사도 바울은 고린도 전서를 보낸 후에 잠시 고린도에 들렸다가 기쁨은커녕 망신을 당하고 왔기 때문에 그런 나쁜 경험은 사도 바울에게나 고린도 교인들 모두에게 다시 있어서는 아니될 피차 큰 피해를 가져오는 일임을 잘 알고 이를 잘 아는 사도 바울이 고심 끝에 화를 피하기 위해 변경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2절에서 변경한 것이 옳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고린도 교회 성도들로부터 존경과 모든 대우를 받아 그들로부터 사도 바울이 기쁨을 누리고 싶은 마음이 있는데 오히려 방문하므로 정 반대로 심한 푸대접을 받고 온다면 사도 바울이 누구에게 기쁨의 대접을 받을 수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그리고 사실상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로부터 기쁨을 얻게 된다면 그 기쁨은 사도 바울의 기쁨임과 동시에 또한 고린도 교회의 기쁨이리라고 믿는다는 것입니다. 피차에 기쁨을 주고받아야 마땅한 관계인데 그곳을 방문하므로 서로 불쾌하고 근심과 소란을 더해주는 것은 지도자로서 마땅한 태도가 아니기 때문에 피차의 관계를 위해 방문을 취소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상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 방문하는 목적은 위로하고 격려하고 기쁨을 나누어주는 것이 목적임같이 눈물의 편지를 써서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자를 징계하도록 심하게 책망한 것도 그 만큼 고린도 교회를 아끼고 사랑하기 때문이었지 미워서 감정적으로 그런 편지를 보낸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4절에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든지 방문을 취소하든지 또는 심한 편지를 쓰든지 부모로서 자녀를 사랑하는 그런 사랑에서 나온 것이므로 어떤 오해도 다 풀기를 바란다는 호소입니다.

 

[2] 두 번째로 5절부터 11절까지의 잘못한 자에 대한 용서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마태 복음 18:15-17에서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어떻게 하라는 예수님의 교훈을 잘 알고 있습니다. 첫째는 범죄한 형제를 개인적으로 권면하고, 개인적인 권면을 듣지 안거든 두 세 사람이 함께 가서 권하고 이것도 듣지 안거든 교회 앞에 세우고 교회 앞에서도 듣지 않으면 세리나 이방인같이 버리라고 한 것입니다. 세리나 이방인같이 버리라는 말의 뜻은 교인으로의 교제를 완전히 끊고 푸대접을 하므로 스스로 외로움을 느끼고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자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그러나 회개치 않으면 영구적으로 이방인이 되게 하는 것을 의미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차원에서 고전 5:13에서 교회내의 악한 사람은 교회에서 내어쫓으라고 권고한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권고를 이미 했음에도 불구하고 고린도 교회가 거짓 사도의 유혹을 받아 사도 바울을 헐뜯고 상면했을 때에는 정면 도전을 하고 있음에도 고린도 교회가 이들을 징계하지 않으므로 눈물의 편지를 통해 심하게 책망하여 빨리 문제의 사람들을 교회에서 징계하고 내어쫓도록 명한 것입니다. 이 눈물의 편지를 읽고 고린도 교회가 그대로 시행하여 범죄자들을 징계를 하였고 징계를 받은 자들이 결과적으로 자기들의 잘못을 뉘우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사도 바울이 징계 받고 뉘우친 자들을 용서하고 격려하라는 내용이 이 본문 말씀인 것입니다.

 

5절에서는 범죄자들이 사도 바울을 헐뜯는 것은 사도 바울에게도 피해가 될 뿐 아니라 고린도 교회에도 피해가 됐다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그리고 6절에서는 그런 범죄를 인식하고 교회에서 일부는 징계하는 것을 반대했겠지만 대다수의 교인들의 찬성을 얻어 징계한 사실은 마땅한 일이었다고 징계의 타당성을 확인을 하므로 사랑하기 때문에 징계를 해야한다고 징계에 찬성했던 자들의 정당성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7절로 11절까지에서는 징계를 받고 회개한 형제를 어떻게 다루어야할지를 권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징계에는 몇 가지로 시행했는데 중한 범죄는 교회에서 추방하는 일과 경범은 성례전의 참례하는 것을 잠정적으로 금하거나 또 교인의 권리를 잠정적으로 금하였던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에서는 아마 중징계를 하여 추방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교회에서 내 쫓았다면 교회에 오지도 못하고 교인들은 그들과 인사도 안하고 멀리하는 것입니다. 유엔이 이락에 경제 제제조치를 취한 것과 같은 취지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함으로 잘못을 온전히 뉘우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과정을 통해서 추방당하는 자들이 잘못을 뉘우쳤을 경우에는 융통성 있게 어느 정도의 시기가 지난 다음에는 그들을 불러 징계를 풀어주어 다시 형제로서의 관계를 회복하도록 조치를 취해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너무 오래 지나도록 징계해제를 해주지 않아 절망 상태가 오면 아예 탈락자가 되고 말수도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탄은 이런 기회를 이용하여 회개한 자가 토라져서 아예 교회와의 인연을 끊게 하므로 사탄의 세력을 확장하는 그런 계획을 사도 바울은 잘 알기 때문에 사탄이 힘쓰기 전에 그들을 불러 용서하고 격려하여 다시는 범죄치 않게 해 야 한다는 권면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용서를 해주되 그 용서가 마치 성도들로부터 온 것같은 고자세로가 아니라 주님의 용서를 이미 받은 자의 겸손한 자의 자세로 용서하고 권면하라는 용서자의 태도에 대해서도 충고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오늘 주신 본문 말씀을 통해 어떤 교훈을 받았으며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첫째, 교회를 시끄럽게 하는 일에 앞장서거나 합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교회에는 성도라는 이름은 가졌지만 아직 덜 된 성도들이 있어서 교회의 목적보다는 자기 개인의 목적을 위해 교역자를 물고 늘어지거나 교회 내에서 문제를 일으켜 자기의 위치를 과시하려는 무리들이 가끔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어떤 개인의 단체가 아니요 주님의 교회이므로 문제를 일으키면 물론 당사자들에게도 피해가 가지만 치명적으로는 주님께 피해가 가게 하는 결과가 오는 심각한 문제인 것입니다. 주님이 살아 계시지 않는다면 상관이 없겠지만 살아 계신 주님께서 교회에 피해를 주는 사람의 책임을 어떤 형태로든지 물으실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자기가 살려고 교회를 어지럽히는 실수를 해서는 안됩니다.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닌데도 이를 물고 늘어져 교회를 어지럽게 하면 큰 것으로 하나님께서 물으실 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문제를 일으킨 자의 결과는 좋을 수가 없습니다. 이는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그 값을 물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로, 범죄자는 징계해야 합니다. 징계의 목적은 마땅히 그를 멀리하므로 회개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회복되도록 하게 하기 위함이어야 할 것이며 징계의 정도는 죄에 따라 정할 것이나 교회는 어떤 개인의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이므로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교회라면 교회를 어지럽히는 이단자나 또는 다른 범죄자를 교회의 결정에 따라 징계를 내려 교회를 어지러움에서, 불결한 데서 지켜나가야 합니다. 이런 징계를 하지 못할 때에 교회는 그리스도의 권위를 무시하는 결과가 되고 그 교회는 사람들의 목적을 위한 모임체로 전락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부가 순결하고 주님께서 거룩하시듯 교회를 성결하게 유지해야할 책임이 각 교회에 있습니다. 이 책임을 다하지 못할 때에 교회 지도자나 성도들에게 그 책임을 하나님께서 물으실 것입니다.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이 아무리 재정을 다 댄다고 해도 아니 아무리 가난한 불쌍한 자라 할지라도 정상은 참작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징계하시기를 원하시는데 우리들의 관용으로 용서한다면 잘못된 일이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징계를 당한 자가 회개한다면 탕자가 아버지 집에 돌아올 때에 아버지가 반가워 맞듯이 교회는 용서하고 격려하며 선입견 없이 그를 성도의 생활을 잘 하도록 최선을 다해 도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잘못한 것은 권면하고 잘 한 것은 격려하여 성도의 자세를 흩트리지 않도록 우리 모두가 도와야 하는 것입니다.

 

추수 감사절에 많은 헌금을 드리므로 감사할 수 도 있겠지만 참다운 감사 예물은 올바른 성도의 생활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을 듣는 모두는 이 교훈을 지키시는 훌륭한 교인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