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언약의 뛰어난 영광 – 고린도후서 3:1-6

몇 가지의 쉬운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성경이 크케 둘로 나누어져 있는데 무엇과 무엇으로 나뉘어져 있습니까? 예, 구약과 신약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구약과 신약으로 나뉘어져 있는 말씀은 누구의 말씀인가요? 예,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구약 성경은 율법서, 역사서, 시가서, 예언서 등이 포함되어 있는데 일반적으로 구약이라고 하면 어느 부분이 구약의 상징으로 이해되고 있습니까? 예, 율법, 즉 모세율법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인 이 율법을 우리들도 꼭 지켜야하는 것인가? 만일 지켜야 한다면 왜? 지켜야 하며 만일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것이라면 왜?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것일까요?

 

오늘 주신 본문에서는 위의 질문에 대한 정답을 주고 있는데 아주 명확하게 답을 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소개받는 우리들은 혹시 지금까지 좀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고 한다면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구약과 신약은 어떻게 다르며, 구약과 신약은 누가 지켜야 하며 어떻게 지킬 수 있는 것인지 명확하게 이해하므로 우리가 가진 믿음과 소망에 확신을 얻으시기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본문을 소개하고 본문이 주는 교훈을 찾으며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는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옛 언약과 새 언약의 영광(7-13) [2]새 언약에 들지 못하는 걸림 돌(14-15) [3]새 언약에 들어가는 길(16-18)

 

[1]맨 먼저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영광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고린도 후서를 통해 고린도 교회에 나타나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율법을 지켜야만 한다고 가르친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에 흔들린 고린도 교인들로서는 율법을 지켜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또 반면에 사도 바울의 가르침대로 복음을 받아드리므로 구원을 얻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이런 혼돈 속에 있는 고린도 교회에 구약과 신약의 차별화를 분명히 해줌으로 더 이상 어떤 유혹과 혼돈이 고린도 교회에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해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두 언약을 어떻게 구분해주고 있는지 보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 즉 옛 언약은 돌에 쓴 언약, 종이에 먹으로 쓴 문서적인 언약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즉 돌 판이나 종이에 써진 것은 생명이 없고 생명을 줄 수 없는 것임을 강조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구약 율법을 돌에 썼다는 말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모세가 시내 산에서 율법을 받았을 때에 돌 판에 써진 율법을 받은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새 언약 즉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주어진 새 언약은 영으로 마음에 기록된 것이라고 구분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또 모세가 이 돌 판에 기록된 율법을 받아 백성들에게 율법을 선포할 때에 그 얼굴에 광채가 있었음을 강조하면서 돌 판에 쓰여진 옛 언약을 받을 때에도 영광이 있어 그 광채가 대단했다면 마음바탕에 영으로 쓰여진 새 언약의 영광과 광채는 얼마나 더 하겠느냐고 옛 언약의 영광과 새 언약의 영광을 비교해 보이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또 옛 언약은 죽게 하는 법, 정죄의 법이라고 했으며 새 언약은 살리는 법, 의의 법이라고 했습니다. 왜? 모세의 율법은 죽게 하는 법이며 정죄의 법이며 새 언약은 살리는 법이요 의의 법이 될 수 있을까요? 모세의 율법은 다 지켜야만 의롭게 되는 법이나 사람이 하나님의 법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지키는 것은 전연 불가능하므로 법을 하나 하나 지켜 가는 동안에 결국 법을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생겨 법을 지키지 못하는 경우에는 범죄자가 되고 범죄자는 법에 따라 처단되어져서 죽게 되기 때문에 정죄의 법이요 죽게 하는 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새 언약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믿음에 따라 구원되므로 새 언약은 은혜로 살려주는 법이 된다는 구별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내리시고 십자가를 지시게 했나요? 인간의 노력과 행위로는 구원될 수 없기 때문에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구출하기 위해서 였던 것입니다.

 

또 사도 바울은 옛 언약의 영광은 임시로 있는 영광이요, 새 언약의 영광은 영원한 영광이라고 구별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법을 받은 모세가 영광되어 얼굴에 광채가 있었지만 모세가 죽어 장사되듯 사람 모세에게 나타난 광채는 어느 시기에 사라질 수밖에 없는 시한적 영광이지만 새 언약의 영광 즉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은 세세 무궁토록 영원히 존재할 영원한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두 언약을 구별하여 논리를 전개하고 있는 것은 옛 언약도 하나님이 주신 법으로 좋은 법이요 그 법이 어느 시기까지 감당해야할 사명이 있긴 하지만 이제는 그 법보다 훨씬 좋은 새 언약이 있으므로 옛 언약은 그 이상 우리들에게는 필요 없는 법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옛 언약을 지켜야한다고 믿고 있어도 아니되고 또 그렇게 가르쳐도 안된다는 점을 강조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가르친 자가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거짓 선지자요 시대에 너무 뒤떨어진 선지자라는 말이 되겠습니다.

 

성경 중에서 히브리서는 구약과 신약의 구별을 잘 해주고 있는데 히브리서에 보면 구약은 나타날 신약의 그림자에 불과하며 임시 법이요 옛 언약은 연약하고 무익하며 낡아져서 폐했다고 했고 또 십자가에 못박았다고 한 것을 보게 됩니다. 즉 옛 언약은 주님의 십자가까지의 시한부적인 임시 법이요, 법 자체만 가지고는 인류를 구원하게 하기에는 연약하여 별 의미가 없고 새로운 법이 왔을 때에는 폐해야하는 법임을 강조하여 그에 대조되는 더 좋은 법인 새 언약의 필연성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2] 두 번째로 14절로 15절의 새 언약에 들지 못하는 결림 돌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겠습니다. 이 좋은 새 법인 새 언약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주어졌지만 이 좋은 언약을 받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이 있을 수 있음을 지적해주고 있습니다. 그 걸림돌이란 완고한 마음과 보지 못하는 눈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더 좋은 언약인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해도 그리스도를 받지 아니하고 자꾸만 모세에게만 초점을 맞추고 옛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을려고 하는 고집스런 보수성이 걸림돌이라는 것이며 그런 자들은 그 눈에 모세가 얼굴을 가렸던 수건이 자신의 눈을 가려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는 눈이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 중심의 믿음이 아니라 내 경험 중심과 내 지식 중심의 인본주의 적 믿음이 바로 그런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새 시대의 복음을 전하고 있는데 구약으로 돌아야한다고 주장한 선지자가 고린도 교회에 있었으니 그 시대에나 지금에도 똑같은 두 종류의 사람이 존재하리라고 봅니다. 보수성이 강했던 사도 바울도 한때는 완고한 고집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옥에 가눈 일이 있으며 예수님 당시에 고집스런 보수 세력은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는 예수님을 법을 어긴 자로 정죄를 하거나 안식일에 밀 이삭을 비벼 먹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범죄자로 단정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는 보수라는 단어가 좋은 말이 못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옛 것으로는 인류를 구원할 수 없음을 아시고 인류의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 새 언약을 주셨음에도 자꾸만 죽는 길이 좋다고 만 한다면 그 완고한 마음, 그런 보수는 멸망 받아 마땅한 고집임에 틀림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구출해주셨음에도 일시적인 고난을 참지 못하고 자꾸만 옛 애굽에서의 생활을 동경하고 옛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이스라엘의 완고한 고집이 바로 같은 맥락의 고집이 되겠습니다. 더 좋은 것을 받지 아니하고 자꾸만 옛 것이나 옛 상태만을 고집 하는 완고한 마음이 새 언약에 들어가는 걸림돌이 된다는 것입니다.

 

[3]세 번째로 16절부터 18절까지의 새 언약에 들어가는 길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불신자들은 일상 생활에서 미신을 지켜야하는 큰 부담 때문에 생활이 자유스럽지 못함을 우리들은 잘 압니다. 어떤 날에는 움직여서는 아니되고 어떤 사람과는 접촉해서는 아니되고등 얽매이는 것이 많습니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분명히 어떤 불길한 일이 생기고 말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아무것도 자유스럽게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믿음과 그런 것이 미신이라는 확신을 갖는 자들은 그런 것으로부터는 자유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들이 모세의 율법을 읽어보면 거기에는 지켜야할 많은 법규들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런 것을 지켜야하는 부담을 갖게 될 수 있을지 모르나 이런 부담도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드림으로 이런 모든 속박에서 자유를 얻게 된다는 결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를 자유스럽게 할 것이며 그런 자들은 그리스도와 같은 형상이 되어 그리스도의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영으로 말미암는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에게는 성령이 함께 거하시므로 이 성령은 구약의 속박에서 온전히 자유스럽게 해주며 영광에 이르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오늘 주신 본문을 통해 어떤 교훈을 받았습니까? 그리고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첫째로 율법에서는 온전히 해방된 자들이 다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미신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받아드리고 또 율법으로부터 온전히 해방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드렸음에도 기독교 안에 미신적인 믿음이 우리들도 모르는 중에 존재하고 있고 또한 율법적인 믿음이 있을 수 있는데 우리들은 이런 속박에서 온전히 해방되어야 합니다. 특히 율법의 일부를 교회에서들 시행하고 있는데 분명한 것은 율법의 어느 부분 하나를 시행해야 한다는 부담을 갖게 된다면 그 사람은 모든 율법을 같은 비중으로 지켜야하는 속박에 메어야 하는 것입니다. 행여나 관념적으로 율법의 어떤 것은 지키지 않아도 되나 어떤 것은 지켜야한다고 믿어서는 아니됩니다. 우리들이 지켜야 하는 것은 율법에 있는 어떤 법이 아니라 신약 성경에 있는 그것을 지키는 것입니다.

 

십계명은 율법의 요약입니다. 일반 교회에서 십계명을 외우게 하고 그 것을 지켜야 한다고 강조한다면 이 것은 오늘 본문 말씀에 도전하는 말이 되겠습니다. 십계명에 있는 그 사상이 신약 성경에도 있기 때문에 우리들은 신약 성경의 교훈에 따라 십계명의 사상을 지켜나가는 것이지 십계명을 지키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한 예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면 당연히 토요일에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일반 교회들이 구약의 율법 중에서 십일조를 시행하고 있는 것도 엄밀히 말해서 고쳐야 합니다. 십일조를 바치면 잘못된다는 말이 아니고 십일조를 강조하는 것은 구약의 율법을 이용하는 것이며 그 것을 지킨다고 해도 하나님께는 만족한 것이 못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구약시대에는 돈의 10의 1만 드리면 필요하고 만족한 것이나 신약의 연보는 자신의 모든 것을 드리는 산 제사를 드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는 우리들의 생활에서 율법적인 의무감에서 해방되어야 합니다. 이미 앞에서 강조했지만 우리들의 구원은 어떤 법을 지키는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도는 것이기 때문에 헌금을 하든 주일에 교회에 오건 억지로 즉 율법적으로 끌려 다니는 것은 별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10의1을 하던 10의 2를 하던 헌금을 할 때에는 정말 감사하여 자원하여 드려야 합니다. 집회에 참석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감사하여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자들이 되어야 하며, 내게 베푸신 하나님의 사랑이 감사하여 자원하여 이웃을 사랑하는 자들이 다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새 언약이 우리들에게 주는 풍성한 삶이 되는 것입니다.

 

율법을 폐하고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들에게 자비의 법, 은혜의 법, 더 좋은 법을 주셨는데 우리 모두가 이 좋은 법을 마음껏 누리면서 행복한 삶을 이 세상에서 누리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더욱 풍성한 삶을 누리시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