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역하는 삶과 순종의 삶 – 마태복음 21:23-32

주님 주변에는 늘 두 종류의 무리들이 존재했습니다. 어떤 무리들일까요? 주님을 따르는 자들과 주님을 시기하고 반대하는 자들이었습니다. 40일 금식후 광야에서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한 일로 시작하여 마귀는 공격을 늦추지 아니하고 잘 믿는다는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까지 동원하여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끈질기게 물고 늘어진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주님께서 메시아의 대접을 받으면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신 일,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채찍으로 몰아내신 일, 눈먼 자와 다리 저는 자들을 고치시며,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라고 외치는 아이들, 이 모든 일들이 종교 지도자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였고 시기심을 낳게 하였던 것입니다. 심지어 대제사장들의 돈벌이하는 길까지 막아 놓기까지 했으니 그들이 살아남는 길은 오직 인기 절정에 계신 예수님을 어떻게든지 곤궁에 빠뜨리고 책을 잡아 처단하여 그가 그 이상 활동을 못하게 하는 것이라고 믿었을 것입니다. 그런 의도에서 주님으로부터 결정적인 말의 실수를 유도해 내기 위해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께 질문을 던지게 되며 주님께서는 그들의 위선을 책망하시게 됩니다. 스스로 의롭게 여기고 자기들은 잘 믿고 있다고 뽐내면서도 그리스도를 배척한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주님께서는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고 책망을 하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소개받는 우리 모두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시고자 하는 본문의 의도를 온전히 파악하고 천국에 못 들어가는 잘 믿는 척하는 종교 지도자들이 되지 아니하고 천국에 들어가는 세리들과 창기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말씀을 3부분으로 나누어 본문의 뜻과 본문이 주는 교훈을 찾아보고 이 교훈을 우리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는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종교 지도자들의 질문(23)

[2]예수님의 질문(24-27)

[3]두 아들의 비유(28-32) 입니다.

 

[1]먼저 종교 지도자들의 질문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23절에 보니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님께 질문을 했다는 기록을 보게 됩니다. 마가와 누가는 서기관들도 함께 있었음을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대제사장, 장로, 서기관들이란 그 당시 어떤 자들입니까? 산헤드린 즉 공회 회원들입니다. 이들은 정치, 경제, 종교 등 전반에 걸쳐 심의하고 결정하는 유대 최고 회의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갈릴리에서 사역하실 때에도 주님의 전도 사역을 조사하기 위해서 이 공회에서 대표단을 파송했던 예가 있었는데 이번에는 이 종교 지도자들이 스스로 위기감을 느껴서 예수님께 찾아온 사실입니다. 어떤 위기감인가요?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이들은 종교적으로도 최고 지도자들로서 누구보다 많이 알고 누구보다 능력이 있으며 누구보다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자라고 자처하고 있는 자들인데, 예수라는 자가 혜성같이 나타나서 왕 같은 절대적 존경을 받으면서 예루살렘에 입성을 하였고 또 성전에서 장사꾼들을 몰아내었고 또 성전에서 병자를 고치고 말씀을 가르치는 모든 일이 권세 있게 집행되므로 여러 면에서 위기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더군다나 모든 종교 문제에 대해서는 진짜, 가짜를 가려내는 일이 바로 자기들의 책임 하에 있는 일이요 성전에서의 모든 일은 자기들의 허락 없이는 되지 않은 일인데도 산헤드린의 허락 없이 당당하고 엄연하게 종교 행위가 성전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고 백성들은 줄기차게 그를 따르고 있으므로 주님께 찾아와 자기들의 직권을 이용하여 화풀이도 좀 하고 또한 예수님으로부터 결정적인 말의 실수를 유도하기 위해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그들이 내 던진 질문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며 ‘누가’ 이 권세를 주었느냐는 것입니다. 종교 행위에 대해 면허를 내 주는 산헤드린 회원들도 모르는데 누가 내준 면허를 가지고 종교 행위를 하느냐는 질문이 되겠지만, 실은 그들의 속셈은 주님께서 ‘하나님의 권세’로 한다고 대답이 틀림없이 나올 것을 예측하고 그런 대답이 나온다면 하나님을 모독한 신성 모독 죄로 잡아죽이겠다는 계략이었을 것입니다.

 

[2]두 번째는 예수님의 질문입니다.

종교 지도자들의 질문은 무엇을 알고자 하는 질문이라기 보다는 예수님을 잡고자 하는 함정 질문인 것을 아시는 주님께서는 오히려 그들에게 질문을 던짐으로 그 질문을 통해서 스스로 자기들의 질문에 대한 답을 얻을 뿐 아니라 종교 지도자들의 위선적인 신앙을 공격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을 아는 그런 지도자들이라면 주님께서 성경에 예언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충분히 믿을 만한 많은 증거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전연 믿으려 하지 않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불신하는 그들의 태도를 뻔히 알고 계시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의 질문을 받으신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도 한 말을 물으리니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하시며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서 왔느냐 하늘로 서냐 사람에게로 서냐”라고 질문을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이런 질문을 하신 의미가 무엇일까요? 주님께서는 세례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으셨고 이 세례를 통해 성령이 주님의 머리 위에 임하는 것을 보고 세례 요한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내려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라고 증언을 한바 있기 때문에 만일 종교 지도자들이 세례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 서라고 대답을 하게 된다면 그들 입으로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주님이 하신 모든 일은 하나님의 권세로 하심을 고백하는 결과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세례 요한의 세례가 사람에게 서라고 감히 말할 수 없었던 것은 그 당시 백성들은 세례 요한을 하나님께로서 온 참된 선지자로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하늘로 서라고도 답을 못하고 또 사람에게 서라고도 답을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간단한 대답을 하지 못하고 ‘서로 의논을 했다’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예, 아니오 로 간단히 대답할 수 있는 분명한 사실을 갖고 의논을 했다는 것은 진리를 굽게 하고자 범죄를 공모하고 있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공모하고 머리를 짜낸 결과 어떤 현명한 답이라도 나왔는 가요?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는 대답이었습니다. 산헤드린 회원들은 종교 문제를 가지고 가짜 진짜를 분간해 주는 직무를 감당하는 기관 인대도 자기들의 전문 분야를 놓고 모른다는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던 그들은 분명코 직무 유기이며 거짓이며 심판의 뜨거운 불을 쌓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모른다고 대답하자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고 답을 하셨습니다. 어느 시대이건 지도층은 자기들의 직분, 위치, 명예, 돈벌이 때문에 그것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개혁도 허용치 아니하고 지속적으로 그대로 변화 없이 살기를 바라기 마련인데 그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의 위선적이요 진리를 왜곡시키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3]세 번째로 두 아들의 비유입니다.

주님께서 그들의 위선적인 신앙에 대해 직선적으로 책망하시지 아니하고 하나의 비유를 들어 높은 차원에서 그들을 크게 책망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두 아들의 비유입니다. 포도원 주인이 두 아들을 불러 놓고 첫째 아들에게 말하기를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아버지여 가겠소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였고,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이같이 말하니 대답하기를 “싫소이다” 하더니 그 후에 뉘우치고 갔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비유를 그들에게 들려주시고 묻습니다. 너희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냐? 하니 그들이 대답하기를 둘째 아들이라고 대답을 하게 됩니다. 첫째 아들은 아버지를 존경하는 것 같고 순종하는 것 같고 예의 바른 것 같으나 입으로만 모두 예, 예 할뿐이었고 그의 마음에는 일할 생각이 전연 없는 부정직한 아들임을 보게 되며. 또 둘째는 정직한 것 같으나 아버지의 명령을 완전히 면전에서 거절하는 무례한 아들임을 보게 됩니다. 즉 두 아들 모두 불순종의 자식들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다만 둘째 아들은 처음에는 불순종했으나 후에 뉘우치고 포도원으로 갔기 때문에 늦게나마 아버지의 뜻을 따른 아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비유를 주시고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란 말로 시작하여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 왔던 종교 지도자들을 향해 책망의 포문을 여십니다. 세리와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고 충격적인 선포를 하신 것입니다. 그 당시 세리란 죄인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 착취자 또는 강도 같은 자인데 세리나 또 더러운 창녀들이 유대 최고 지위에 있는 공회 회원들인 대제사장, 장로들, 서기관들보다 먼저 하늘나라에 들어간다니 이런 폭탄 공격을 주님이 아니시고는 누가 퍼부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이유를 분명히 밝히십니다. ‘너희’는 성경을 알고 남을 가르치고 참과 거짓 선지자를 구분한다고 하면서도 세례 요한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고 왔으나 ‘너희’는 너희 말대로 그를 알지 못하고 그를 믿지 아니하였으나, 세리와 창기들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는 세례 요한의 경고를 듣고 경고를 받아들여 회개하였기 때문이라 하십니다. 그리고 ‘너희는 세리와 창기들이 회개하고 돌아서는 것을 보고도 끝까지 뉘우치지 아니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 서인지 사람에게 서인지 모른다고 위선적인 대답을 했던 종교 지도자들은 자기들의 비겁하고 부정직한 대답으로 인해 꼼짝 못하고 가장 모욕적인 책망을 받았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세상 사람들을 크게 두 아들로 비유한 것입니다. 첫째 아들은 종교적으로 또 도덕적으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열심히 예배드리고, 성경을 열심히 읽고 외우고, 헌금을 많이 하며 아름다운 찬송을 하고, 금식을 중심 해서 기도도 남보다 열심히 잘하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도덕적으로는 남에게 욕도 안하고 거짓말을 하지 않으며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며 조금이라도 불미스런 일을 전연 하지 않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이런 사람을 보고는 세상 사람들이나 교인들이 말하기를 천국 아랫목을 맡아 놓은 사람이라고 할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자기들의 의로운 모든 행동에 스스로 만족을 하고 그런 것들 때문에 자기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에 충분할 것으로 믿고 있는 자들을 말합니다. 주님이 지적하시고자 하시는 포인트는 풍성한 종교 의식도 물론 중요하고 깨끗한 도덕적 삶도 중요하겠지만 그 마음에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로 받아 드리고 그의 명령에 절대 순종하는 삶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주님이 빠진 성경 지식도 말씀에 불순종한 풍성한 예배와 예물도 그들을 하나님의 나라에 들여보내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입으로 예 했으면 포도원으로 들어가야지 입으로만 예 하고 행동이 따르지 못하는 위선적 신앙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즉 교회에서는 말씀에 아멘을 하면서도 그 말씀에 자기를 맡기고 말씀에 따라 살지 아니하고 세상에 나가서는 세상의 흐름대로 사는 생활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아니 성경을 자기 목적으로 해석하고 적용하여 교파를 나누고 예배와 교회 조직을 변형시키는 불순종의 무리들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둘째 아들은 비종교적이요, 비도덕적이요, 세상을 사랑하는, 육체적 쾌락을 즐기는 세상에 소망을 두고 사는 무리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늦게나마 세상 끝날 에는 심판이 있어 선인과 악인을 갈라 세우고 의인은 생명의 부활로 악인은 사망의 부활로 나타나게 되는 진리를 듣고 자기의 죄악을 깨닫고 회개하여 교화 안에 들어온 늦게 된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첫째 아들은 자기의 독선과 불신 때문에 죄인임에도 죄인인지 모르는 의로운척하는 죄인을 말하며, 둘째 아들은 흉악한 자기의 죄를 빤히 다 알고 부끄러워 주님의 품속에 자기를 감춘 더러운 의인을 말하는 것입니다.

의로운척하는 죄인인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죄를 빨리 깨닫지 못하고 의로운 줄만 믿고 있고 세리와 창기들은 자기들의 죄를 빨리 깨닫고 빨리 회개하므로 세리와 창기들이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세리들과 창기들까지도 다 천국에 입성하게 되기를 바라시는 주님의 따뜻한 마음을 읽게 되며 또한 종교 지도자들도 늦게나마 자기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오게 되기를 바라시는 간절한 마음 때문에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라는 표현을 하시므로 종교 지도자들도 늦게나마 천국에 들어올 수 있는 여백을 남겨 두신 주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리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본문을 통해 우리는 무슨 교훈을 얻게 되며 그 교훈을 우리 일상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본문을 통해 우리가 받게 되는 교훈은 순종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소개한 두 아들의 비유에서 우리는 두 종류의 불순종을 소개받았습니다. 하나는 첫째 아들의 불순종으로 포도원으로 가라는 명령에 가겠다는 대답만 하고 가지 않은 불순종과 둘째 아들과 같이 처음부터 거절한 불순종입니다. 첫째 아들의 불순종은 믿는다는 신자들의 불순종이며 둘째 아들의 불순종은 불신자들의 불순종을 비유하는 것입니다. 신자의 불순종이건 불신자의 불순종이건 불순종은 불신에서 오는 것으로 그 결과는 무서운 심판만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버지의 포도원에 가서 일하기를 명령하지만 첫째 아들도, 둘째 아들도 아버지의 포도원에 가지 아니하고 자기 포도원에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첫째 아들의 포도원은 안정된 자기의 삶이 이미 정착되어 있으므로 그 안정된 삶을 안일하게 지켜 나가기 위해서 아버지의 포도원으로 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고향을 떠나 내가 지시한 땅으로 가라고 명령했을 때에 떠날 수 있었던 그 순종과 대조를 이루는 불순종의 삶이 되겠습니다. 둘째 아들의 포도원은 육적 쾌락을 맛보며 세상 연락으로 재미를 보고 있기 때문에 그 곳을 떠나 아버지의 포도원에 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둘째 아들은 세상에서 세상 재미를 보고 있고 첫째 아들은 교회 내에서 세상 재미를 보고 있어서 둘 다 그 재미 보고 있는 세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소망보다는 세상이 주는 소망, 진리보다는 현실적인 안전, 진실보다는 적당히 살아 나가기 위해서 불순종하게 된 것입니다. 자기들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 분명한 사실까지도 대답이 난처하면 모르겠다고 잡아떼고, 때로는 진리를 발견하고도 비진리의 길을 택하고 무수한 변명을 늘어놓는 삶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 모두에게 ‘아버지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명령을 하십니다. 우리 각자가 첫째 아들에 속하던 둘째 아들에 속하던 우리는 내 자신의 포도원에서 빠져 나와 아버지의 포도원으로 가서 일을 해야 합니다. 아무리 내 포도원이 지금 내 눈에는 좋게 보여도 아버지의 포도원에 비교가 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시편 95:7-8에 ‘너희가 오늘날 그 음성을 듣기를 원하노라, 너희 마음을 강팍하게 말지니라’고 하였는데 주님의 명령을 들은 이 순간 내 포도원에서 빠져 나와 주님의 포도원으로 들어가는 순종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의 포도원은 내 욕심을 포기해야하는 포도원이기 때문에 자기를 부정하지 않고는 들어올 수 없는 곳인 것입니다. 예수를 아예 믿지 아니하고 살든지, 예수를 입으로만 믿던지, 예수 핑계 대고 돈벌이를 하던지 하나님께서는 철저히 각자의 판단과 자유 의지에 맡기십니다. 또 캐토릭 교회를 다니던지 장로 교회를 다니던지, 아니 통일 교회를 다니던지 크게 간섭하시지도 않습니다. 또한 교회 내에서 피아노를 치던지 오케스트라를 동원하던지 각자의 양심에 따라 행하도록 맡기시는 것입니다. 매주 만찬을 하던지 일년에 두 번하던지도 마찬가지이고 여자 집사를 세우던 여자 천사를 세우던 온전히 인간들이 자유 의지에 따라 결정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열심히 다니던지, 오고싶으면 오고 오기 싫으면 오지 않던지, 또 이웃을 사랑하던지 자기 며느리나 시어머니를 사랑하던지 완전히 자유 의사에 맡기실 뿐입니다. 그들마다 자기 주장이 있고 자기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겠지만 그런 의견도 들으려 하시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성경을 주시고 그 성경의 규칙대로 아버지의 포도원에 들어와 일하라고 명령을 하실 뿐입니다. 철저히 인간의 자유를 존중하신 하나님께서는 세상 끝 날에 하나님이 주신 성경 말씀에 따라 인간들의 자유 의지를 심판하실 뿐인 것입니다.

롬 10:3에 보면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하였는데 모든 인간은 자기 포도원, 즉 자기의 의를 강조하면서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포도원, 즉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아버지의 포도원, 즉 믿음과 순종의 포도원으로 ‘가서 일하라’고 명령을 하십니다. 각자의 스케과 각자의 주장을 모두 제쳐 버리고 아버지의 스케듈에 따라 아버지의 의견에 따라 ‘오늘’ 포도원에 들어가기를 명령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포도원은 인간들이 개량하고 가꾼 포도원에 비교가 되지 않을 큰 수확을 가져다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가서 일하라’는 명령에, 진리의 말씀에 철저히 순종하여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복에 참예 하시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