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인 잔치의 비유 – 마태복음 22:1-14

오늘 소개되는 본문은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가라사대’ 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이 말은 이미 지난 두 주간에 소개한 두 비유에 이어서 또 비유로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두 비유란 무엇이었던가요? ‘두 아들의 비유’ 또 ‘포도원 주인과 악한 농부의 비유’였습니다. 예수님 앞에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서 있고 예수님은 이들을 향해서 연속 비유로서 그들의 불신과 불순종을 책망하고 계신 것입니다.

오늘 소개되는 혼인 잔치의 비유에서도 임금님이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에 음식을 많이 장만하고 손님을 초대했으나 초청 받은 귀빈들이 오기를 거절하므로 종들을 시켜 길거리에 나가 만나는 대로 손님을 초청하여 혼인집 잔치 자리를 가득 채웠다는 비유로 이 비유 역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초청을 거절하므로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을 초청하시어 구원의 자리에 들게 했다는 비유이며 또 손님 중 예복을 입지 않은 자를 수족을 결박하고 바깥 어두운 데에 내 던진 내용을 소개해 주시므로 스스로 교만하여 하나님의 초청에 응하지 않은 이스라엘 사람도 구원에서 제외됐을 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하나님 말씀에 온전히 순종치 아니하고 제 고집대로 행한 자도 구원에서 제외된다는 교훈을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소개받는 우리 모두는 본문이 주고자 하는 하나님의 구원의 비밀을 바로 이해하고 하나님의 넓으신 은혜를 새롭게 깨달아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겸손히 순종해 나가므로 하나님이 예비하신 아들의 혼인 잔치에 모두 참예하실 수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주신 본문 말씀을 3 부분으로 나누어 본문의 뜻을 이해하고 본문이 주는 교훈을 찾으며 그 교훈을 우리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는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이스라엘의 초청(1-7)

[2]이방인의 초청(8-10)

[3]혼인 잔치(11-14) 입니다.

 

[1]맨 먼저 이스라엘의 초청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2절에 보니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주님께서 혼인집 잔치를 비유해서 천국을 소개해 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과 구원의 단계를 전연 깨닫지 못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인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 그들의 죄를 깨닫도록 지적해 주실 뿐 아니라 앞으로 진행되어질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예언적으로 말씀해 주시는 비유인 것입니다. 본문 스토리는 임금이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위해 귀빈들을 초청했으나 초청을 받은 자들이 이 초청에 응하지 않은 내용을 중심 하여 엮어져 있습니다. 임금님이 자신의 아들의 혼인 잔치에 신하들이나 귀족들을 초청했는데도 초청장을 받은 자들이 오지 않았다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그 당시의 풍속은 혼인 잔치에 참석하도록 미리 알려 주었다가 결혼 당일에 종들을 보내어 손님들을 잔치에 오도록 하였다고 합니다. 임금님께서 베푸신 혼인 잔치에 종들을 보내어 초청 받은 귀빈들을 오라 하였으나 오지 않으므로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면서 이르기를 오찬을 준비하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으나 그런 기쁜 소식을 받고도 돌아보지도 않고, 하나는 자기 밭으로, 하나는 자기 상업 차로 떠나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종들을 잡아 행패를 부리고 또 죽였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서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살랐다는 비유인 것입니다.

이 비유가 천국의 비유라고 했으므로 우리가 대략 짐작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 임금은 누구일까요? 하나님이시고, 그 아들은 예수님이시며, 종들은 세례 요한을 비롯하여 선지자들이며 청함을 받은 손님들은 좁게 말해서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며 넓게 말한다면 유대인들, 즉 이스라엘 사람들입니다. 아들의 혼인 잔치에 초청을 받은 것은 천국에의 초청을 말하는 것으로 천국에의 초청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와 심판자로 믿고 영접하는 일인 것입니다. 그리고 혼인 잔치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시작되는 새 예루살렘에의 성도들의 입성과 반대로 불신자들의 심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을 선택하시고 그들을 통해 이방에까지 하나님을 알리어 그의 구원의 계획을 이룩하시려고 유대인들을 여러모로 사랑하시고 보살피셨지만 유대인들은 조상 적부터 한사코 하나님을 떠나 사단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여러모로 벌을 내리셨음을 역사적으로 보게 됩니다. 430 년간 애굽에서의 노예 생활이며, 출애굽 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오는 길이 40일간에 정탐을 끝내고 다녀올 수 있었던 짧은 길이었는데도 하나님께서 40년이나 걸려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도록 하셨으며 40년 동안에 애굽을 출발한 모든 사람이 다 죽고 여호수아와 갈렙만 남았던 사실이며, 유대 나라는 지속적으로 다른 나라의 침략을 받아 잡혀가고 빼앗기는 생활이 연속되며 다른 나라의 통치 받는 나라가 되도록 버리신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가운데도 택한 백성인 이스라엘을 생각하시고 그 땅에 메시아가 나게 하시고 그를 통해 이스라엘이 우선적으로 구원받게 하시고 차차 이방인까지 구원받게 하시려 하였으나 유대인들은 오히려 메시아 되신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씻을 수 없는 세기적인 큰 범죄를 저지르므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주후 70년에 로마 군대에 의해 완전 지배하게 하시므로 그때부터 이스라엘은 나라 없는 백성으로 전 세계에 흩어진 버림받은 민족이 되어 버렸으며 그때부터 시작하여 1948년까지 무국가 무정부의 불쌍한 민족으로 남의 천대를 받다가 1948년 이후에야 나라를 회복하게 되지만 이스라엘이 건국을 선포한지 하루만에 아랍 국가들이 이스라엘을 침공하여 중동 제 1전쟁이 시작되었고 그 후 제 2차 중동 전쟁 등 지속적으로 이스라엘과 아랍의 전쟁으로 이스라엘은 오늘까지 평화의 날은 없고 전쟁만이 그들 곁에 늘 도사리고 있는 결과를 맞고 있는 것입니다.

7절에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살인자들을 진멸하고 마을은 불태웠다”는 기록을 두고 주후 70년에 이스라엘이 로마 군에 의해 멸망된 이스라엘을 말하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본문에서 볼 때 임금이 자기 아들의 혼인 예식에 초청을 했으니 초청을 받은 자들은 고맙고 황공하여 그날을 기억하였다가 선물들을 준비해 결혼식에 참석을 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다고 까지 말을 전하면서 종들을 다시 보냈는데도 농사 때문에, 장사 때문에라는 변명을 하고 미참한다거나, 또는 그 종들을 때리고 죽였다니 그런 은혜를 모르는 불법의 사람들을 군대가 와서 다 죽이고 그들이 사는 마을을 불살랐다는 것이 당연한 일로 생각되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주시고 모세를 주셨으며 그 외에 많은 선지자들을 통해 메시아가 다윗의 후손 중에 나타나리라는 예언을 너무나도 잘 아는 유대인들이 오시기로 한 그 메시아가 오셨고 또 그를 증거 하는 많은 선지자들이 왔는데 왜 선지자들을 죽이고 심지어 메시아 되신 예수님까지 십자가에 못박아 흉악한 죄인에게 하듯 십자가에 매달았던 것입니다. 성경을 모르고 예언을 모르고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이 그렇게 했다면 모르려니와 성경을 알고 택한 백성이라고 뽐내며 이방인들을 개 취급하는 그런 선민들이 그런 못된 짓들을 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 짓을 한 유대인들이 2천년간이나 나라 없이 설음을 당하는 것이 하나님의 교훈이요 하나님의 큰 뜻이 있는 줄 압니다. 은혜를 저버린 자가 받는 보상을 암시해 주고 있는 비유이며 교훈이 되겠습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순교 당하기 직전 유대 지도자들을 향해 그들의 조상과 그들 자신의 죄를 신랄하게 비판한 스데반의 설교의 일부를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목이 곧고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슬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 도다.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 하였도다”하였던 것입니다. 선지자들을 죽이고 예수님을 죽인 죄, 율법을 받고도 율법을 지키지 않은 죄가 그들의 죄라고 지적하신 것입니다.

 

[2]두 번째로 죄인들의 초청입니다.

8절에 보니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예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치 아니하니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너라 한대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자리에 손이 가득한지라”라 되어 있습니다. 임금님께서 나라 안에 있는 높고 귀한 손님들을 초청했으나 그들이 한결같이 불참했으므로 혼인 잔치는 준비 완료되어 있으나 잔치에 참예할 자들이 합당치 않으므로 이젠 본래 초청자 명단에는 전연 낄 수 없는 낮은 자리의 사람들을 초청하라는 것입니다. ‘사거리 길’이란 만나는 대로 초청하라는 만민 초청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귀인을 만나면 귀인도 초청하고 천한 자를 만나면 천한 자도 초청하고 부한 자나 가난한 자나,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도덕적인 사람이나 비도덕적인 사람이나, 자유 자나 종이나, 몸이 불편한 자나 몸이 성한 자나 그들의 신분이나 형편에 상관없이 다 초청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본래 이들은 임금님의 아들 결혼 잔치에 초대되리라고 전연 기대하지 못했던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 은혜를 입혀 주시어 그들을 택한 백성으로서 대우를 해주고 무엇이든 좋은 것에는 우선 적으로 특혜를 주었으나 그들이 교만하여져서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로 알지 아니하고 이런 특혜를 고마워하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아들까지 십자가에 못박은 이스라엘 사람들로부터 특혜나 우선권을 그 이상 인정치 아니하시고 이젠 천국의 문을 이방인에게까지 개방한 것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은 누구든지 와서 쉬도록 초청의 문을 ‘누구든지’로 넓힌 것이며 목마른 자들은 물로 나아 와서 돈 없이 값없이 와서 마시도록 ‘목마른 자들’을 초청하신 것입니다. 이런 주님의 초청은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도록 하시려는’ 영생에의 만민 초청인 것입니다.

임금님의 지시를 받은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자리에 손님이 가득했다는 기록입니다. 눅 14:21이하에 보면 본문과 비슷한 예화인데, 본래 초청된 손님들이 오지 않으므로 길거리에 나가 ‘가난한 자들, 소경들, 저는 자들’을 초청했다는 기록을 보게 되는데 그 당시 풍속으로는 바리새인들이 가난한 자나 소경들이나 발을 저는 자들을 혐오하며 그들을 죄인들로 취급하였던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기준에 의한다면 세리, 창녀, 병자들, 가난한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악인들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문에서 ‘악인이나 선인이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악의 기준을 바리새인들이 세운 기준을 중심 하시지 않으시고 하나님께서 본래 가지고 계신 기준으로 ‘누구든지’ 사람을 외모로 취급치 않으시고 차별하시지 않으시고 초청을 하신 사실을 명백히 해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차별 없이 평등하게 교인이 되도록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3]세 번째로 혼인 잔치입니다.

본문 11-14에서 혼인 잔치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데 혼인 잔치에서 어떻게 즐겁게 손님을 대접했다는 기록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누구든지’ 초청된 손님들 중에서 손님으로서 합당치 않은 자를 골라 밖으로 내 쫓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면서 말씀을 소개받는 자들에게 합당한 손님들이 다 되도록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유대 결혼 풍습에는 결혼 잔치 자리에 주인은 처음부터 나와 있는 것이 아니고 음식을 먹게 되는 때에 나온다고 합니다. 본문에서 보니 임금님이 손님들을 만나 보고 환영하기 위해 잔치 자리에 들어오면서 보니 손님 중에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 임금님이 사환들에게 지시하기를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임금님의 초청을 받은 손님들은 궁중에서 그들에게 입고 들어오도록 예복을 나눠주었다고 보아야 맞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예복을 입지 아니하고 자기가 평소에 입었던 옷을 그대로 입고 혼인 잔치에 나왔으니 임금님의 눈에 금방 띌 수밖에 없겠지요. 그래서 그를 잔치 자리에서 내 쫓았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것은 염소와 양을 가르는 심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복을 입지 않아 혼인 잔치에서 쫓겨난 자는 염소이며, 가라지들이며,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한자들이며 불법을 행한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 때까지는 선과 악이, 알곡과 쭉정이가 섞여 살도록 놔두었다가 심판 때에 완전히 구분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수족을 묵고 바깥 어두움에 내 던진다’는 말은 심판 시에 즉각적이요 철저한 형벌이며 영원한 형벌을 내리신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또 예복을 입지 않고 왔다는 뜻은 천국에 들어가는 기준을 하나님의 기준으로 해야함에도 자신의 지식과 행위로 구원받기에 충분하다고 믿고 교만한 점을 지적한 것이 되겠습니다. 율법만 지키면 의롭게 되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믿거나, 착한 일만 많이 하고 남에게 손해를 끼치지만 않으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믿는 자들을 지적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리스도로 옷을 입도록 하시고 새 사람을 입어라”고 하시는데 자기의 옷을 벗지 아니하고 예복이 아닌 사복 즉 자기가 좋아하는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을 지적한 것입니다.

본문 14절에 보면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받은 자는 적다”고 기록이 되어 있는데 하나님 중심이 아니고 그리스도 중심이 아닌 주관적인 신앙은 아무리 의로운 척하여도 택함을 받지 못한다는 진리를 가르쳐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본문을 통해 어떤 교훈을 받았으며 그 교훈을 우리 일상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첫째, 하나님의 초청에 무조건 응하는 자들이 다 되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최근 라디오를 들으신 분은 들으셨을 줄 압니다. 한국에서 대통령 실세라고 하는 어떤 분의 아들 결혼식에 3500명의 하객이 참석을 했고 방명록에 싸인을 하기 위해 100 미터나 줄을 섰으며 이 날 결혼식 때문에 그 주변에 교통이 매우 혼잡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왜 이렇게 많이 모여들었습니까? 이 결혼식에 초청된 자들은 아마 모르긴 몰라도 퍽 영광스러웠을 것이고 부조금도 두둑이 가지고 갔으리라고 봅니다. 세상 권력자이니 그를 통해 정치 좀 하겠다는 기대 때문에 그런 많은 하객이 몰렸을 것입니다.

세상 정치하는 데는 교통이 아무리 혼잡하고 아무리 돈이 없어도 찾아가고 큰 부조금을 내면서도 왜 하나님의 초청에는 그렇게도 변명도 많고 인색할까요? 눅 14:15 이하에 보면 초청에 못 오는 자들이 변명을 하기를 ‘나는 밭을 샀고, 나는 소를 샀고, 나는 장가들었기 때문’이라고 변명을 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본문에서 이미 우리가 보았듯이 하나님께서는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고 손님을 초청했지만 손님들은 이 정성스런 초청에 냉담함을 보았습니다. 여기 계신 분들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 초청에는 모두 응하신 분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교회 안에 있는 자들을 또 계속 초청하고 계십니다. 전도자들을 통해 소와 살진 짐승들을 잡고 그 잔치에 참예하기를 초청하고 계십니다. 이 잔치에 윤 전도자나 임 전도자가 초청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이 집회에 모두 나오시도록 초청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매 집회 때마다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초청의 음성들을 마음의 귀로 들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초청을 모른 채 하는 것도 자유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초청을 가볍게 알고 초청에 등한 자들을 역시 하나님께서도 버리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하나님이 초청하시는 모든 집회에 감동을 가지고 감사한 마음으로 응하셔야 하며 또 개인적으로 날마다 말씀을 묵상하시고 또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초청에 응하시는 성도님들이 다 되셔야 합니다.

 

둘째는 하나님이 바라시는 예복을 입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많은 교파가 있어서 교파마다 교파의 옷이 있습니다. 또 개인마다 자기가 좋아하는 기질과 습성이 있어서 개인 옷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회에서는 자기가 좋아하는 취미에 따라 옷을 다양하게 입어도 되지만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옷은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유니폼을 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 적으로 성례 예식인 세례부터 말씀에 합한 바른 옷을 입어야 하고 예배 의식에서도 성경에 합한 옷을 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 적으로도 그렇고 사 생활에서도 그리스도께서 바라시는 옷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교파가 주는 옷이 있다 하더라도 벗어 던지고 주님이 주신 옷을 입어야 합니다. 또 내가 아무리 좋아하는 사복이 있다 하더라도 그 옷은 벗고 주님이 입혀 주시는 옷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늘 벗지 못하고 입어 왔던 교파 주의나 전통의 옷, 미움의 옷, 시기 질투의 옷, 비방과 시비의 옷, 근심과 염려의 옷, 나를 높이고 남은 낮추는 옷, 교만과 이기심의 옷들을 다 벗어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새해에 입도록 주신 새 옷, 감사와 기쁨의 옷, 사랑과 온유의 옷, 평강과 인내의 옷들을 입고 뽐내 보아야 하겠습니다. 내 옷을 다 벗어버리고 우리 모두 주님이 주신 똑같은 유니폼으로 갈아입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언제나 응하시고 또한 하나님께서 주시는 예복들을 다 입으시어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모두 참예 하시는 복 있는 자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