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에서 결박된 바울 – 사도행전 21:17-40

지난 주에 사도 바울은 3차 전도여행을 다 마치고 밀레도에서 두로, 가이사랴을 거쳐 예루살렘에 드디어 도착하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통해 교훈을 받았습니다. 그가 밀레도에서 에베소 교회 장로들과 헤어질 때도 예루살렘에서 결박되고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을 상상하며 눈물을 흘렸고 무릎을 꿇고 기도했으며, 두로에 왔을 때도 두로 교인들이 성령이 충만하여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면 위험함으로 가지말도록 권면했으나 그대로 떠나가므로 처자들이 다와서 전송하고 무릎꿇고 기도했으며, 가이사랴에서도 아가보가 예언하기를 예루살렘에 들어가면 유대인들이 바울을 묶어 이방인들에게 넘길 것이라는 위험을 예언받았으나 바울은 주 예수를 전하기 위해서는 죽는 것까지도 각오가 되어 있음을 분명히 했던 그였습니다.

오늘은 본문 17-40절을 통해 예루살렘에서 결박된 사도 바울의 모습을 통해 교훈받게 됩니다. 주님의 뜻을 이루기위해 인간으로서는 피하고 싶은 길을 갔었고 결국 예루살렘에서 결박당하는 생생한 바울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의 뜻과 은혜를 깨닫는 성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을 크게 4부분으로 나누어 생각해보겠습니다.

[1] 환영받고 선교보고하는 바울의 모습(17-20전반)

[2] 오해를 풀기 위한 충고를 받아드리는 바울의 모습(20후반-26)

[3] 유대인들에게 붙잡혀 위험에 처한 바울의 모습(27-31)

[4] 하나님의 보호받아 위험에서 벗어나는 바울의 모습(32-40)

 

[1] 환영받고 선교보고하는 바울의 모습(17-20전반)

갈 2:10에 보면 바울이 개종되고 처음으로 예루살렘에 갔을 때 바울은 이방인 선교를 위한 사명받은 자로 인정이 되었고, 그 교회 지도자들로부터 가난한 자들을 생각하라는 부탁을 받았기에 기회되는 대로 이방교회들로부터 구제헌금을 모아 예루살렘 교회를 돕겠다는 노력을 계속해온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 예루살렘 교회는 말씀을 주고 이방교회는 감사하며 재물을 주므로 유대인과 이방인의 친교가 두터워지고, 주님 안에 하나라는 의식이 점점 강해질 것이므로 정말 잘한 일이었음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전도하는 곳마다 유대인들이 바울의 선교를 방해해왔고 바울을 모함하는 소문들이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의 귀에까지 들어갔을 것이므로 바울은 속으로 근심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과연 이 구호금을 그들이 기쁘게 받아줄 것인가? 또 본인이 이방 전도했던 일들을 잘했다고 철저히 인정해줄 것인가? 걱정을 했으리라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17절에 보니 형제들이 우리를 기꺼이 영접하였다고 기록되었고, 19,20절을 보니 바울이 자기의 봉사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을 낱낱이 고하니 저희가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애써서 모았고, 또 무거워 힘들게 가져왔던 구호금을 기쁘게 받아주었다는 것이며, 바울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방인 가운데 하신 일을 낱낱이 다 보고하니 저희가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니 그가 한 모든 선교사업에 대해서도 완전 인정을 해주었다는 말씀이겠지요. 유대인 지도자들과 이방인 지도자간의 온전히 일치한 모습은 우리들에게 좋은 모범을 보여주고 있으며, 선교하는 교회 지도자들이 자기 자랑을 하기 마련인데 사도 바울은 철저하게 성공했던 선교사역을 자기가 했다고 소개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하셨다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철저한 하나님 중심의 믿음을 증거해주고 잇습니다.

 

[2] 오해를 풀기 위한 충고를 받아드리는 바울의 모습(20후반-26)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를 대표하여 주님의 형제되는 야고보, 즉 야고보서의 기록자 야고보가 바울에게 제의를 하게되고 바울은 고집부리지 아니하고 그 사랑의 제의, 전도를 위한 제의를 순종하여 받아들이게 됩니다.

야고보가 말하기를 유대인 신자들이 수 만 명 있고 이들이 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율법에 열심히 있는 자들인데, 이들이 소문을 듣고 있기를 바울이 가르치기를 유대인들에게 모세를 배반하고 그의 자녀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말고, 규례를 지키지 말라고 했다고 오해를 하고 있던 차에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왔으니, 이 소문을 듣게되면 틀림없이 이를 문제삼을 가능성이 있으므로 선수를 써서 그들의 오해를 풀도록 하자고 제의하기를 서원한 자 4명이 있으므로 이들과 함께 결례를 행하고, 비용을 대어주고, 또 머리를 깍게하라고 합니다. 무슨 말이냐하면 서원이란 유대인들이 하나님 앞에 자기 몸을 정결케 지키기로 약속하는 것으로 보통 나실인이라는 말로 구별되는 것으로, 이들은 어떤 기간동안 죽은 것을 만지지 않고, 술을 입에 대지 아니하고, 죄를 용서받는 속죄재물로 양 같은 동물을 재물로 드리고, 그후 곧 머리를 깍는 것으로 이것은 민수기 6:3-7에 명시된 유대인들의 규례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만일 이것을 행하면 바울이 울법주의 규례를 몸소 지켰으므로 모든 오해가 다 풀릴 것이기 때문에 오해를 풀고 선교적인 차원으로 타협안을 냈으며 바울은 이 제의를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사실상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할례를 금하거나 유대인들의 지키는 규례를 금한 것이 아니고 유대인들의 이런 법에 속박당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전했고, 율법을 지켜야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게 됨을 가르쳤는데도 바울을 잡으려고 말을 만든 것입니다.

 

[3] 유대인들에게 붙잡혀 위험에 처한 바울의 모습(27-31)

문제가 일어나지 않도록 좋은 제의를 받아들여 지금 결례를 거의 마치는 때에 에베소에서 온 유대인들이 무리들을 충동하여 바울을 붙들고 외치기를 율법과 성전을 훼방하는 자인데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므로 거룩한 곳을 더럽게 하였다고 하니 사람들이 몰려와 그를 죽이려 했던 것입니다.

본래 모세의 법에는 이방인은 성전에 들어가지 못하고 만일 이방인이 성전에 들어갔다면 죽여도 로마법에서도 인정을 할 정도였는데, 바울이 구제금을 가지고 온 에베소 교회 대표 드로비모가 성내에 있는 것을 보고 함께 성전에 들어간 것으로 짐작하고 그렇게 한 것이며, 성전을 더럽혔다는 죄목이라야 죽일 수 있으므로 음모를 꾸민 것 같습니다. 정말 억울하지요. 재판의 기회도 주지 아니하고 죽이기 위해 돌로 침을 당하니 말입니다.

 

[4] 하나님의 보호받아 위험에서 벗어나는 바울의 모습(32-40)

군중들이 떠들썩한 소리를 듣고 예루살렘의 치안을 맡고있는 보병대장 천부장이 군사들을 데리고 현장에 가니 치는 것을 그치므로, 천부장이 가까이 가서 두 쇠사슬로 바울을 일단 묶도록 명령하고, 이는 누구며 무슨 죄를 지었느냐고 군중들에게 물으니 이 사람들은 이 말을, 어떤 사람들은 저 말을 하니, 천부장이 왜 이러는지 알수가 없어 그를 군부대로 데리고 가도록 명하고 계속 따라오며 죽이라고 외치는 군중들로부터 보호하며 가는데, 군부대에 도착할 때쯤 되어서 바울이 천부장에게 “내가 당신에게 말할 수 있느냐”고 말하니, 천부장이 묻기를 “혹 바울 당신은 이전에 예루살렘을 정복하려고 소란을 피웠던 애굽인이 아니냐”고 물으니, 바울이 “나는 큰 도시 다소성의 시민이니 나로 백성에게 말하기를 허락하라”고 청하니, 천부장이 허락하게 되고 바울은 층계 위에 서서 백성에게 히브리 방언으로 말할 기회를 얻게 됩니다. 이미 돌로 많이 얻어맞아 피투성이가 되었을 그가 그대로 포기하지 아니하고 그 통에도 군중들을 향해 그들의 죄를 알게하고 복음을 전하려는 그를 하나님께서 천부장의 손을 통해 응답하신 모습을 보게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본문을 통해 얻는 결론은 무엇입니까? 우리 생활에 적용할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바울의 철저한 겸손입니다.

자기가 목숨을 내걸고 선교함으로 나타난 결과가 있는데, 이것을 자기가 했다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서 자기를 통해 일하셨다고 철저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배워 실천해야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했고 내 영광 드러내지 말고 크고 적은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고, 내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역사하셨다고 고백하는 신앙 본받아야 합니다. 우리를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일들을 증거하는 우리들 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는 바울의 확신과 선교를 위해 여러 모양이 된 것을 본받아야 합니다.

갈 2:11-14에 보면 바울이 베드로를 모든 자 앞에서 책망한 기록이 있습니다. 이유는 베드로는 이미 고넬료의 집에서 이방인도 이젠 주 안에서 구별이 없음을 체험했음에도 그가 안디옥에 이르러 이방인들과 함께 먹다가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오니 그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앉았는데, 이것을 본 바나바도 역시 시험에 들어 그렇게 했기 때문에 강하게 면박을 주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율법과 복음, 구약과 신약에 대해 누구보다도 철저한 신앙을 가진 것 같아요. 로마서, 갈라디아서 또 히브리서에 보면 이방인과 유대인의 구분이 없고, 제사장이 따로 없고 만인 제사장이요, 구원은 은혜로 받는 것이요 행함으로가 아님을 명확하게 확신가지고 있는 분 같아요. 이런 확신있는 그 확신 자체가 복음을 전하기 위함이요, 또 그 확신을 전제하여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유대인이게는 유대인같이, 이방인에게는 이방인같이 처세를 하는데, 이는 그들을 다 얻기 위함이라는 고백입니다. 그는 디도에게 할례를 베풀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이방인들이 할례를 받을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디모데에게는 전도여행을 떠나면서 할례를 베풀었는데, 이것은 유대인들을 접촉하고 그들에게 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어떻게 적용해야 하겠습니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모든 이들에게 친구가 되어야겠다는 것입니다. 돈 없는 자, 돈 있는 자, 유식한 자, 무식한 자 모두 접촉하여 복음전하고, 복음 전하기 위해 자기의 모습, 모양 바꾸고 결실 맺어야, 우는 자와 함께 울고 웃는 자와 함께 웃으며 마음을 주고받아 전도의 열매 맺게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복음 위해 생명의 위험을 예고 받고도 그대로 복음 위해 달려갔고, 돌에 맞아 만신창이가 되었어도 천부장 통해 말할 기회 얻어 어떻게든 복음 전하려는 눈물나는 하나님 사랑의 열정을 우리가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전도 위해 이젠 희생을 치뤄야 합니다. 재정적으로, 시간적으로, 명예적으로, 지식적으로 좀 희생을 치루고라도 복음 전해야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 바울이 죽음을 눈앞에 두고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다”고 고백했는데, 우리 모두가 선한 싸움을 싸우시기 바랍니다. 달려갈 길을 다 달리시고 믿음을 지키시기 바랍니다. 우리모두가 하나님 예비하신 의의 면류관을 다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