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 앉아 계신 우리 교회 성도님들, 지금까지 사시면서 남에게 자신의 잘못을 용서해 달라고 빌어 본 일이 있으십니까? 또 반대로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해 주신 경험이 있으십니까? 이럴 때마다 남에게 잘못을 용서해 달라고 빌 때는 상대방이 너그럽게 용서해 주기를 바라게 되지만, 남의 죄를 용서해 줄 때에는 너그럽지 못한 인간의 한 모습을 경험하셨으리라 봅니다.
만일 잘못을 용서해 달라고 애원을 하여 용서해 주었는데 얼마 안되어 다시 잘못을 저지르고 용서를 해 달라고 사정을 한다면 몇 번까지 용서해 주는 것이 가장 타당한 것일까요? 저 개인의 경우라면 최고로 2번까지 가능할 것 같습니다. 내 잘못은 열 번이라도 용서를 받고 싶겠지만 남의 잘못에 대해서는 그렇게 옹졸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베드로가 주님께 ‘형제가 내게 잘못을 저지르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까?’라고 질문을 하였습니다. 여러분 중 형제의 잘못을 일곱 번까지 용서해 줄 수 있는 분 손을 들어보세요? 베드로는 7번까지 하면 가장 너그러운 용서라고 생각했나 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뭐라고 대답하셨지요?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라고 답하셨음을 보게 됩니다. 우리 성도들의 신앙 생활에 가장 어려운 일이 내게 잘못한 남의 죄를 용서해 주는 일이라 믿어 질 때 “용서”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성도란 믿음 생활에 성공한 자라 생각되어집니다. 오늘 본문을 소개받는 우리 모두는 주님의 명령대로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 줄 수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본문의 뜻을 이해하고 본문이 주는 교훈을 찾으며 그 교훈을 우리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는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베드로의 질문(21)
[2]주님의 답변(22)
[3]천국의 비유(23-35)입니다.
[1]첫 번째로 베드로의 질문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형제가 우리에게 죄를 범했을 때에 어떻게 하라고 주님께서 가르치셨지요? 그 형제에게 찾아가서 권면하고 말을 듣지 않으면 두세 사람의 증인을 데리고 가서 권면하고, 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면 교회에 세우고 권면을 하되 듣지 않으면 이방인과 같이 여기라고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이 가르침을 받은 베드로에게 의문이 생겼습니다. 형제가 내게 계속 범죄를 할 경우에 몇 번까지 용서를 해줘야 할까 였습니다. 유대의 랍비들은 형제가 범죄 했을 경우에 3번까지만 용서를 해 주라고 가르쳤으므로 유대인들에게는 3번까지 용서해 주는 것이 그들의 관행이었다고 봅니다. 유대인들의 습관은 신앙적인 행위나 해야 할 책임을 어떤 수치로 정하는 습관이 있어서 기도를 하루에 3번 한다든지 금식을 이레에 두 번 한다든지 하여 몇 번이라는 수치로 어떤 기준을 삼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유대인들은 숫자에 민감한 사람들이란 말이 되며 참고로 유대인들과 거래를 하실 기회가 있다면 계산하실 것이 있으면 정확히 하셔야 함을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야곱이 아내를 데려오기 위해 7년 또 7년을 채웠음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이라면 한 3년만 채웠어도 이제 됐다고 허락할 가능성이 있지만 유대인들에게는 어림없다는 증거를 우리가 배운 것입니다. 이렇게 숫자 놀음에 예민한 피를 받은 베드로지만 3번의 곱절에 1번을 더한 7번까지 용서해 줄까요? 라고 질문하는 것을 보면 베드로의 생각에 예수님은 이 정도는 용서해 줘야 한다고 대답하실 것 같아 미리 최고치를 말씀드린 것으로 봅니다. 7이 완전 수이니 7번용서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 치라 생각했던지 모르겠습니다. 말이 쉽지 7번이나 똑 같은 사람의 실수나 죄를 용서한다는 것은 우리 인간으로서는 전연 불가능한 숫자라고 말해도 될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자문 자답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교인이 내게 잘못한다면 몇 번까지는 참아 주고 용서해 줄 수 있겠는가? 대표로 누가 대답해 보세요. 앞에서도 말씀 드렸지만 아마 최고로 3번까지 가능할 지 모르겠습니다. 보통 사람은 한번도 용서를 못하고 ‘죽여 버리겠다’는 말이 입에서 먼저 튀어나오던가 아니면 그가 벌을 받아야 한다고 저주를 하게 되는 것이 믿음 없는 자들의 처신이라 생각되어집니다.
[2]두 번째로는 주님의 답변입니다.
베드로로서는 주님으로부터 ‘사단아 물러가라’는 충격적인 책망을 받았기 때문에 이 충격을 만회할 만한 칭찬 받을 일을 주님 앞에 내놓고 싶었으리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7번이나 용서를 해 주면 되겠느냐는 답은 어찌 보면 대단한 답변을 드린 것으로 생각도 되나 그 기준은 인간의 기준으로 산출한 것이지 주님의 기준에는 그것도 전연 미치지 못한 것을 알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70번씩 7번이라도 용서해 주라는 답변이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답에 10배까지라도 용서를 해 주라는 답변이었음을 보게 됩니다. 유대인들이 들었을 때는 70×7=490번만으로 들었을 지 모르나 주님은 490+ 인 것입니다. 490 번 그 이상도 용서해 주라는 것입니다. 창세기 4:24에 보면 잘못한 자에게 벌을 내리되 7배의 벌과 77배의 벌을 내릴 것에 대한 기록이 있어서 유대인들의 머리에서 가장 최고 치의 벌이 77배의 벌인데 주님의 머리에는 벌이 아니라 77의 10배 이상이라도 용서하고 축복을 해야 할 것으로 답변을 주신 것을 보게 됩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은 눅 17:3,4에 보면 형제가 회개하면 용서하여라 는 조건부 용서가 기록되었고 마태복음에는 그런 조건이 제시되지 안했음을 봅니다. 형제가 회개했을 경우는 우리가 형제로서 친교가 이어지는 것이고 형제가 권면해도 듣지 않으면 형제로서 관계가 두절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나 회개하던 안하던 그건 그 사람의 문제이고 나로서는 수에 제한 없이 용서해 주라는 교훈인 줄 압니다. 벌은 하나님이 내리실 것이고 나로서는 너그럽게 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3]세 번째로 천국의 비유입니다.
주님께서는 형제가 수천 번의 죄를 짓더러도 우리로서는 용서를 해줘야 하는 의미를 깨우쳐 주시려고 하나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어떤 임금에게 1만 달란트를 빚진 종이 있어서 불러 왔으나 그가 갚을 것이 없으므로 그에게 그의 몸과 그의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고 명령을 내렸더니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말하기를 다 갚아 드릴 터이니 참아 달라고 사정을 하므로 임금이 불쌍히 여겨 그 종을 풀어 주고 또 그가 진 1만 달란트의 빚을 한푼도 안 받겠다고 면제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 종이 풀려나서 자기에게 100 데나리온 빚진 친구 종을 하나를 붙들어 목을 잡고 말하기를 빚을 갚아라 하니 역시 그 빚진 종도 엎드려 사정하기를 내가 갚겠습니다 참아 주십시오 했으나 허락하지 아니하고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었다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본 종의 친구들이 임금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니 임금이 그 종을 불러 책망하기를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친구 종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임금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옥졸에게 맡겼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는 임금과 한 악한 종의 이야기로 꾸며져 있습니다. 임금은 하나님을 비유한 것이고 악한 종은 심판 때에 벌을 받을 악한 자를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 비유의 내용 중 이 악한 종이 임금에게 1만 달란트 빚진 사실이 나오고 또 이 악한 종은 친구 종으로부터 100 데나리온 빚을 받을 것이 있었음을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갚아야 할 돈 1만 달란트란 받아야 할 돈100 데나리온의 60만 배나 되는 큰 돈인 것입니다. 그 당시 유대 나라에서 거두어 드린 세금의 총 액수가 800 달란트였다고 합니다. 그러니 1만 달란트는 12-13년간 거두어 드린 세금의 합계와 같은 돈이니 개인으로서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돈의 크기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그 당시 노동자나 군인의 하루 일당이 1 데나리온 이었으니 100 데나리온이란 100일간 일을 해 주면 되는 것이나 1만 달란트란 6천만 데나리온으로 6천만 날 동안 수고를 해 주어야 하니 결국 무슨 이야기가 됩니까? 몇 평생 갚아야 하냐 하면 한 평생에 100년씩 산다고 하고 하루도 쉬지 않고 일을 해도 1643 번이나 죽었다가 다시 살아서 갚아야 하는 돈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큰 돈은 어떤 인간도 갚을 수 없는 천문학적 숫자의 빚으로 인간이 하나님께 진 빚 즉 헤아릴 수 없는 큰 빚을 짐작해 보도록 한 상징적 숫자인 것이며 또 반면에 100 데나리온은 1만 달란트에 비해 60만 분의 일에 해당하는 아주 작은 액수로 형제가 형제에게 질 수 있는 아주 작은 빚을 상징하는 숫자인 것입니다. 1만 달란트란 인간이 갚을 수 없는 큰 액수이므로 결국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으로만 해결이 가능한 액수를 말하는 것이며 100 데나리온 이란 우리가 쉽게 갚을 수 있는 작은 액수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비유는 한 인간이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큰 빚, 즉 큰 죄를 지었으나 이를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시어 깨끗하게 용서를 해 주었더니 그 한 인간은 어떤 형제가 자기에게 지은 작은 죄를 용서해 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심판을 받게 된다는 가르침을 주시기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자기가 지은 엄청난 큰 죄를 용서받고자 하여 온 몸을 꾸푸리고 용서를 빌어 용서를 받았던 자가 그 용서 받은 감격의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자기에게 죄 지은 자의 작 은 죄를 용서해 주지 않고 거절했으니 그는 심판 날에 하나님의 엄한 벌을 받아 마땅하다는 말씀이 되겠습니다. 이 비유는 자기는 자비의 은총을 입기를 바라면서도 남에게는 무자비하게 대접하는 인간의 한 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며 또 강한 자에게는 약하고 약한 자에게는 강하게 하는 비겁한 인간의 한 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인간이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 모든 죄를 사함 받아 큰 빚을 다 청산했지만 우리가 내 형제에게 베풀어야 할 자비에 인색한 이유로 심판 시에 엄한 심판을 받게 되리란 교훈을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본문을 통해 어떤 교훈을 얻게 되며 그 교훈을 우리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첫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새롭게 인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보통 우리 인간들은 생활 습성 때문에 무엇의 가치를 지불한 돈에 따라 인식하게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달리 말을 한다면 돈이 지불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덜 귀하게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어떤 종이 1만 달란트의 빚을 임금에게 졌다고 비유하셨는데 실지로 우리가 하나님께 진 빚을 돈으로 환산한다면 그 이상도 되지 않겠어요. 우리가 하나님께 지은 죄의 크기를 양으로 표시한다면 얼마나 클까요? 또 우리의 잘못에 대한 벌금을 문다면 도대체 얼마를 내야 할까요? 주님께서는 우리가 진 빚을 1만 달란트에 비유하셨습니다. 우리가 진 빚을 다 갚으라고 하신 다면 우리로서는 도저히 갚을 수도 없는 엄청난 액수가 되는 것임을 우리는 새롭게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누구에게 1만불 빚을 졌는데 채권자가 안 받겠다고 하면 고개를 몇 번이나 숙였고 감사하다는 말을 몇 번이나 했을 것 같습니까? 그렇다면 몇천 만불, 몇 억불의 빚을 탕감 받았다면 그 분에게 얼마나 감사해야 하겠습니까? 우리의 죄 빚 때문에 영원히 감옥 생활을 해야 하겠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자유케 되었으니 그런 은혜를 새롭게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은혜가 지극히 감사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므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이지만 그 결과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의 생활을 하는 우리 모두에게 너무 행복한 삶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 받았다는 감격을 늘 머리에 기억하고 그 크신 하나님의 은혜를 가슴에 담고 감사하는 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로는, 하나님께서 1만 달란트나 내 빚을 탕감해 주신 것을 늘 생각하며 내게 죄를 지은 형제들의 잘못을 용서해 주라는 것입니다.
60만 달라를 탕감 받은 사람이 내게 1불 빚진 사람의 죄를 용서해 주지 못한다면 하나님께서 내가 탕감 받은 60만 불을 다시 계산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용서를 해 주되 몇 번까지 용서해 주시기를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인 가요? 70번씩 7번이라도 용서해 주라는 것입니다. 70번씩 7번을 용서해 주어도 총 490불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장사 속으로도 손해가 되는 일이 결코 아닙니다. 60만불 이익을 보고 490불 손해를 보시겠습니까? 490불 손해 나는 것이 속상해서 60만불을 포기하시겠습니까? 우리 교회 교인들은 60만불을 포기하실 분이 한 분도 안 계시기 바랍니다. 사실상 내가 아무리 큰 죄를 용서받았다 할지라도 내게 지은 형제의 적은 잘못을 한번 용서하기란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더군다나 2번 3번 똑같은 사람이 연속적으로 죄를 지을 경우 너무 화가 나서 용서를 못하게 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일은 화를 낼 일이 전연 못되며 무조건 용서를 해 줘야만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심판 날에 하나님 앞에 다 서야 하고 그 심판에서 모두 긍휼을 입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교훈은 내게 죄지은 자에게 긍휼히 여기라는 것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긍휼을 행하지 아니한 자에게는 긍휼이 없는 심판이 있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언제나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용서는 해줄 수도 있고 해주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니고 용서를 해 주었는지 해 주지 못했는지에 따라 우리의 운명이 바뀌게 되는 중대한 일인 것을 새롭게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남을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은 쉽게 죄를 짓고 쉽게 거슬리는 인간의 본성을 충분히 이해하는 사람만이 가능합니다. 남이 내게 실수한 만큼 나도 그런 실수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남의 죄를 용서해 주고 대단한 것을 행한 것 같이 뽐낼 것도 없는 것은 우리도 내 잘못 때문에 남으로부터 그런 용서를 받아야 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용서 없이 좋은 인간 관계가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 누구도 완전하게 길을 걸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남을 용서할 수 없는 정신은 기본적으로 병든 탓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며 순전히 자기 중심이요 영적으로 덜 성숙한 자로 기독교의 기본인 정신인 사랑과 용서를 전연 이해하지 못한 자라 할 수 있겠습니다. 달리 말한다면 교만하고 악한 자라 할 수 있겠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하나님으로부터 큰 자비를 받고도 자기에게 자비를 구하는 형제의 간청을 거절하고 옥에 잡아 가두는 악한 종과 같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법대로 빚진 자를 옥에 가둔 자는 역시 법대로 하나님의 엄한 심판을 받아 자기가 하나님께 지은 모든 죄를 계산해야 할 것이며 법대로 하지 않고 내게 빚진 자에게 긍휼을 베풀고 관용을 베푼 자에게는 하나님께서도 법대로 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의 자비와 관용으로 우리를 선히 대해 주실 것입니다.
490번이란 용서의 숫자는 우리 생각에 3번 이상 용서해 주면 그 사람을 오히려 나쁜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인간적인 걱정을 지워 버리고 있으며 또 가장 너그럽다고 생각했던 베드로의 7번까지의 용서의 숫자까지도 지워 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490번이라는 끝없는 용서의 숫자는 내 가정과 내 직장과 내 교회가 끝없이 평화스럽고 유지될 수 있는 건강 숫자인 것입니다. 이 건강 숫자를 무시할 때에 우리 사회는 갈등과 싸움과 높은 혈압을 가져다주게 되어 평화가 깨지고 말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내가 용서해 주어야 할 형제의 죄목에 대해서 전연 언급이 없습니다. 그 말은 그 죄가 나를 죽이려고 음모를 했던지 내 총 재산을 가져가 버렸던지 내 명예를 완전히 짓밟았던지 간에 상관없이 모든 죄를 용서해 주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창세기 강해를 통해 요셉이 형들을 용서해 준 사실을 실감나게 들었습니다. 형들이 자기를 죽이려고 구렁텅이에 넣었던 일, 또 애굽에 팔았던 일, 이런 죄를 지은 형들에게 복수를 하려 했다면 복수할 기회가 드디어 왔지만 오히려 형들을 위로하기를 형들이 나를 팔아 이곳 애굽에 오게 했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족을 구하시려고 자기를 애굽까지 보낸 것이라고 오히려 형들을 위로한 모습은 우리들에게 용서의 참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용서의 능력은 하나님을 중심 하여 사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주실 것입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을 사시므로 인간으로서는 전연 불가능한 용서의 기적들을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이 있다 하셨는데 내가 용서를 받은 복보다도 내가 남을 용서해 줄 수 있는 자가 더 복된 자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물론 용서란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전연 기억치 않으시듯 남의 죄를 완전히 용서해 준 것을 의미한 것입니다. 남의 죄를 완전히 용서해 준 사람의 마음은 평화가 있을 것이며 남의 죄를 기억하고 또 용서치 못한 자의 마음에는 분노와 갈등이 그를 계속 괴롭힐 것입니다. 평화를 택하시겠습니까? 분노와 갈등을 택하시겠습니까? 혈압이 오른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사시겠습니까?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주신 하나님께 겸손히 무릎을 꿇고 감사하는 생활을 하시겠습니까? 현세의 삶에서도 평화와 기도와 감사를 택하시고 심판 때에도 긍휼이 있는 심판을 차지하시는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