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금요일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는데 오늘 소개되는 사건은 화요일에 되어진 일이므로 주님께서 돌아가시기 3 일 전에 행하신 일을 소개받게 됩니다. 오늘 설교 내용은 주님께서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신 것인데 주님께서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셨다는 제목만 가지고는 주님께 어울리지 않은 사건같이 느껴지지만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커다란 교훈을 주시기 위해서 이를 행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줄거리를 소개해 드린다면 주님께서 시장하셔서 길가에 있는 무화과 열매를 따 잡수시고자 하여 무화과 나무 가까이 가서 보니 잎은 무성한데도 열매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열매 없는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시므로 무화과 나무가 당장 말라 버렸습니다. 이 광경을 직접 눈으로 목격한 제자들이 너무나도 놀라 와서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느냐고 주님께 연유를 묻게 되며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만일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않으면 누구든지 이런 능력뿐 아니라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는 교훈을 주십니다. 주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무언가 더 가르쳐 주시기 위해 무화과 나무의 저주를 통해 실물 설교를 하신 것입니다. 이 교훈을 통해 열매 없는 위선적인 신앙은 심판을 받게 될 것을 예고하신 것이며, 또한 주님께서 무화과 나무를 마르게 함과 같이 예수님만이 아니고 누구든지 믿고 의심치 않으면 이런 능력을 행할 수 있다고 가르치심으로 주님께서 세상을 떠나시더라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무엇이든지 믿고 의심치 말고 꾸준히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구하고 능력을 구하도록 교훈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소개받는 우리 모두는 우리의 열매에 의해 심판을 받아야 하는 존재들입니다. 모두 성령의 좋은 열매를 맺기를 기원하며 또한 일상 생활에서 하나님께 기도한 것을 하나님께서 주실 것을 믿고 조금도 의심치 않을 뿐 아니라 얻을 때까지 꾸준히 하나님께 간구하여 우리 각자를 통해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모두 증거하시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을 3부분으로 나누어 본문의 뜻을 이해하고 본문이 주는 교훈을 찾으며 그 교훈을 우리의 실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는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심(18-19)
[2]제자들의 질문(20)
[3]주님의 답변(21-22) 입니다.
[1]맨 먼저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심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하루 전에는 성전에서 장사꾼들을 쫓아내므로 성전을 깨끗케 하신 일을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성전을 깨끗이 하시고는 베다니로 돌아오셨는데 낮에는 예루살렘에 들어오시어 일하시고 저녁은 베다니로 나와서 주무시곤 하셨던 것입니다.
18절에 보니 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시장하셨다고 했습니다. 베다니에서 주무시고 예루살렘에 오시어 일하시려고 아침 일찍 나오시면서 아침 식사를 하시지 않고 떠나신 것 같습니다. 베다니에서 예루살렘까지는 약 2마일 거리였다고 하는데 많은 무리가 모이는 절호의 기회를 잘 이용하시기 위해 아침 일찍 나오신 모양입니다. 주님께서 시장하셨다고 하는 말이 좀 어울리지 않지만 우리는 그가 시장하셨다는 사실에 관심을 두어도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인간과 똑같은 육을 지니고 계신 것을 증거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인간의 몸을 지니신 분이 3 일 후면 십자가에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도 그 길을 피하지 않으시고 예루살렘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셨던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배가 고프면 먹을 것을 채우는 것으로 먹는 일이 끝나고 말게 될 터이나 주님께서는 잡수시는 아주 사소한 일을 통해서도 큰 진리를 가르쳐 주시고 계심을 우리가 배우게 됩니다. 먹는 것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진리를 가르치시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는 모습을 눈여겨보시기 바랍니다. 시장하시므로 주님께서는 무화과 나무 가까이 가시게 되며 잎은 무성하나 열매가 없는 것을 보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 나무가 곧 말랐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화과 나무는 가난한 자의 양식이라 할 정도로 팔레스틴 전 지역에 아주 흔한 나무로 신명기 8:8에 보면 언약의 땅인 이 팔레스틴을 무화과 나무의 땅이라 하여 무화과 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나무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보는 적은 나무가 아니고 그 곳의 무화과 나무는 밑 둘레가 1미터에 높이가 5-6미터요, 가지들은 8-10 미터까지 넓게 뻗어 있는 큰 나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나무 그늘 아래는 휴식의 장소도 되고 또한 기도와 명상의 장소로 사용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신명기 23:24,25에 보면 길가의 무화과 나무는 나그네들도 열매를 따먹을 수 있도록 허용되었으며 이 무화과 나무는 잎이 나기 전에 열매가 먼저 있는 것으로 잎이 무성하다는 말은 열매가 먹을 수 있도록 익었을 시기라는 말이 되겠으며 보통 그 지방에서는 2-3번 열매를 따게 되는데 6,8,12월에 딴다고 합니다.
3 일 후면 십자가를 지시게 되시는 주님께서 시장하신 기회를 이용하시고 무화과 나무를 시청각 자료로 커다란 교훈을 주시기 위해 무화과 나무를 마르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 의도적인 뜻이 없으셨다면 구태여 무화과 나무를 저주까지 해야 할 필요가 없으셨을 것입니다. 21-22절에 주님께서 가르쳐 주시고자 하시는 교훈이 드러나 있지만 드러나지 아니한 숨은 뜻도 또한 찾아볼 수 있겠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기 전에 각 지파에서 한 사람씩 정탐꾼을 뽑아서 보냈는데 그들이 돌아오면서 그 땅이 젖과 꿀이 흐르는 기름진 땅임을 증명하기 위해 무슨 과일을 가져 왔습니까? 포도송이, 석류, 그리고 무화과였습니다. 앞에서 언급했던 대로 무화과가 이스라엘의 상징이라 할 수 있듯이 포도도 또한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열매였던 것입니다. 시편 105:33에 보면 진노의 날에 ‘포도나무와 무화과 나무를 치시며’라는 기록이 있는데 포도나무와 무화과 나무를 치신다는 말은 심판 날에 이스라엘을 치신다는 상징적인 표현인 것입니다. 왜? 이스라엘을 치실까요? 잎은 무성하나 열매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는 척 경건의 모양만 있고 속은 썩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잘 지킨다고 의식은 엄숙하나 마음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고 갖가지 범죄로 얼룩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종교 지도자들도 부패했고 백성들도 또한 지도자들의 잘못된 교육 때문에 함께 부패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회칠한 무덤이라고 할 정도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썩었고 또한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교회는 오래 다녔지만 열매가 없고 입과 모양만 살아 있는 자들은 심판 날에 무화과 나무를 멸하듯 모두 멸망의 심판을 받게 되리란 교훈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심판하시듯 열매 없고 잎만 무성한 세상의 모든 자들을 저주하시고 멸하신다는 생생한 교훈인 것입니다.
[2]두 번째로 제자들의 질문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무화과 나무가 즉시 말라 버리는 것을 본 제자들은 놀랍고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20절에 보니 ‘제자들이 보고 이상히 여겨 가로되 무화과 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 라고 주님께 질문을 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시장하셨던 아주 자연스럽고 본능적인 일로 시작되어 무화과 나무를 마르게 하신 사건을 통해 결국 제자들의 질문을 유도하셨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제자들이 3년간 선생님을 따라다니면서 떡 5덩어리와 물고기 2마리로 5천명을 먹이신 일을 비롯하여 심지어 죽은 나사로까지 살리셨고 풍랑이 이는 바다도 잔잔케 하신 사실을 목격하고는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하나님이 내려보내신 메시아로서 고백은 하고 있으면서도 주님을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의 존재로서는 깨닫지 못하고 있음을 아신 주님께서 앞으로 3일이면 선생님을 잃고 방황하게 될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자연을 지배하시는 하나님 적인 존재이심을 깨닫게 하고 살아 계신 동안 제자들에게 분부하시고 약속하신 모든 것을 믿고 행하며 주님의 재림을 소망하면서 살도록 하게 하기 위해 무화과 나무의 실물 설교를 꺼내신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제자들이 보고 이상히 여겼다는 것은 정말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인 것을 깨닫고 신기하게 생각했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말랐나이까?” 라는 질문은 질문이라기 보다는 감탄한 나머지 감격의 환성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 같습니다. 전지 전능하신 주님께서 그들의 감탄을 미리 짐작하셨고 그들의 호기심을 끌어내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하셨던 대로 그들은 감탄했고 그 사건의 의미를 주님께 질문한 것입니다.
[3]세 번째로 주님의 답변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과 헤어지셔야 하는 입장이셨으므로 하나님을 의존하신 주님께서 무엇이든 행하실 수 있듯이 제자들도 하나님을 철저하게 신뢰하므로 하나님을 통해 자기들도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 주어 앞으로 제자들이 감당해야 할 사역들을 두려움 없이 해내도록 하기 위함이었음을 주님의 답변을 통해 알게 됩니다. 주님의 답변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 것이요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답변의 초점은 ‘너희’에게 있습니다. 주님께서 하나님의 권위를 통해 무엇이든 하실 수 있듯이 제자들인 너희도 할 수 있다는데 초점이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너희란 예수님과 함께 생활했던 12제자로 국한하지 아니하고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인 우리도 ‘너희’의 무리 속에 포함시킨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 분명한 사실을 가르치시기 위해 무화과나무를 마르게 하셨고 그 사실을 성경에 기록하시어 오늘 우리들에게 그 말씀을 소개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하실 수 있으시듯 너희도 할 수 있다는 주님의 말씀대로 우리도 할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강조하신 단어는 또 ‘무엇이든’ 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에 제한을 하시지 않았습니다. 무화과나무를 시들게 한 일 뿐만 아니라 산더러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 것이라고 무엇의 폭을 넓혀 주신 것입니다. 무엇이든 이라고 약속하신 이는 주님이십니다. 12 제자들에게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보장을 해 주셨는데 바로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로 모시는 주님의 제자들인 우리 모두도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보장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물론 ‘무엇이든’이란 인간의 욕심을 중심한 ‘무엇이든’ 은 아니고 하나님의 뜻에 합한, 하나님 중심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어야 함은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의 기도나 주님의 기도가 응답되지 아니한 경우도 바로 그런 것이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더 좋은 계획이 있으시다면 ‘무엇이든’에서 제외시킬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너희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하신 말씀에 우리가 힘을 얻고 격려를 받게 되지만 우리는 그렇게 될 수 있도록 주님께서 내 놓으신 전제 조건에 우리의 마음을 집중해야 할 줄 압니다. 주님이 내 놓으신 조건은 믿고 의심치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내 능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며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권위로 하는 것이므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고는 조금도 의심치 말라는 것입니다. 할 수 없는 자신의 배에서 빠져 나와 할 수 있으신 하나님의 능력의 배에 올라타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가능케 하시고 할 수 있으시는 배에만 올라타면 신기하게도 모든 것이 가능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히 11:1에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 이라는 분명한 말씀을 주십니다. 내가 진심으로 바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이뤄 주실 것을 믿는다면 그 바라던 것이 실지로 나타나게 되므로 ‘믿음은 곧 실체’나 다름없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22절에서 ‘무엇이든지 믿고 구한 것은 다 받으리라’고 결론을 내려 주신 것입니다.
말을 바꾸어 말한다면 마음에 의심이 생기고 확신이 없으면 아예 처음부터 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틀림없이 주실 것을 믿고 의심치 않으면 주실 것이지만 의심하고 구하는 그런 기도는 들어주시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실 수 있는 분인지 아닌지 시험하기 위해 구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내리신 결론에서 나오는 두 단어 ‘무엇이든지’와 ‘다’에 힘을 얻으시고 하나님께서 이뤄 주실 것을 믿고 ‘무엇이든지’ 구하시면 ‘다’ 주실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본문에서 어떤 교훈을 받았으며 우리 일상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첫째, 열매 맺는 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
과일 나무도 제철이 되면 과일을 맺게 됨같이 모든 성도들은 각자가 맺어야 할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주받은 무화과나무가 잎만 무성하고 맺어야 할 열매를 맺지 못했을 때에 저주를 받음같이 성도들도 각자가 맺어야 할 열매를 맺지 못할 경우에 주님의 기대에 어긋나면 심판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눅 13장에서 보면 농장 주인이 3년을 계속 지켜봤으나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지 아니하므로 찍어 불에 넣겠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모든 성도들이 각자의 신앙 연조에 따라 사랑의 열매도, 열심과 봉사의 열매도 맺혀 있기를 바라고 주님께서 연거푸 3년을 쳐다보고 계셔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을 보시면 과일 나무되는 우리들을 잘라 아궁이에 넣으시겠다는 비유인 것입니다. 예언대로 열매 없는 이스라엘이 멸망했고 예루살렘이 무너진 것입니다.
주님께서 무화과나무에게 기대하셨던 열매가 무엇이었던가요? 무화과 열매였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맺게 되기를 바라시는 열매는 과연 무엇일까요? 주님이 기대하시는 대로 어려운 시험은 믿음으로 잘 이겨내고 내가 좋을 때는 기회 있는 대로 남에게 도움을 주며, 범사에 감사와 평강의 생활을 하고 그리스도의 증인의 삶을 살므로 알차고 맛좋은 열매를 맺어야 하겠습니다. 아무에게도 도움이 안되는 덜 익고 떨떨한 열매를 맺어서는 아니 되겠다는 말입니다. 아니 열매가 있을 것같이 잎만 무성하고 열매 없는 나무가 되어서는 아니 되겠다는 것입니다. 위선적인 신앙,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는 신앙은 주님께서 토해 낼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켙에 가면 좋은 과일을 골라 사게 됩니다. 좋은 과일과 나쁜 과일을 쉽게 분별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내가 맺은 과일을 살펴볼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과일 시장에 내 놓은 우리들 과일을 골라 가시겠는지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기대에 어긋날 하등품 열매로 판단이 되어 진다면 더 거름을 주고 물을 주어 상등품 과일이 맺게 해야 하겠습니다. 빛 좋은 개살구란 말이 있는데 우리 한인 교회 성도들은 누가 보던지 빛도 좋고 맛도 좋은 무화과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로, 믿고 구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는 전능 자이심을 믿으라는 것이며 하나님이 전능 자이시라면 그의 자녀 되는 우리가 구하는 것을 틀림없이 응답하실 것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믿고 구한 것은 이미 받은 줄로 생각할 수 있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소경 바디메오가 눈뜨기를 바라고 불쌍히 여겨 달라고 소리쳤고 주변 사람들이 조용히 하라고 했지만 더 소리질러 불쌍히 여겨 달라고 간구했을 때에 주님께서 고쳐 주심같이 우리도 진심으로 믿고 간절히, 또 꾸준히 간구한다면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을 제외하고는 응답하실 것이라는 보장인 것입니다. 걱정도 팔자라는 우리 나라 속담이 있는데 신자라고 하면서도 걱정 도매상을 경영하는 자도 가끔 있음을 보게 됩니다. 걱정 도매상이란 걱정을 파는 도매가 아니고 걱정거리를 사들이는 도매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 그런 사람이 있으시면 그 도매상을 파산 신청하시고 아침에 주무시면서, 아니 일하러 나가시면서, 일하시면서, 저녁에 주무시면서, 하나님은 무엇이든 하실 수 있는 전능 자이시다고 ‘전능자 하나님’을 고백해 보십시오, 그리고 나는 그의 자녀이므로 아버지가 도우시면 나도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다짐해 보시기 바랍니다. 걱정도 사라지고, 염려도 사라지고 내가 바라고 있는 것들이 이뤄질 수 있음을 확신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 이뤄진 것을 손으로 만지게 될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나는 혼자다, 나는 가진 것이 없다, 나는 할 수 없다 등 고아 의식에나, 거지 의식에 빠져들어가 정말 고아나 거지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남들이 우리를 뭐로 보던지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피를 받은 하나님의 자녀요, 세상 주인의 자녀이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가지신 것에 상속자이기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권세도 함께 가진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는 전능 자이심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우리 모두도 하나님의 능력과 권위를 의지하므로 모든 것을 할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보장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좋은 열매를 맺고 또한 하나님을 믿고 구하므로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모든 것을 얻게 되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특권을 온전히 누리시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