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가이사 – 마태복음 22:15-22

예수님께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는 군중들의 환호 속에 예루살렘에 입성한 이후 그의 능력 있는 가르침과 병고치심, 또 성전에서 장사꾼들을 쫓아내신 일 등은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에게 큰 충격을 주어 그들은 예수님께 찾아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냐는 공격성 질문을 해 왔으나 주님께서 비유를 통해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불신과 죄를 노골적으로 공격하셨음을 지난 세 주간 동안에 소개받았습니다.

오늘 소개되는 본문은 그들이 도저히 대항할 수 없음을 알고 일단 물러가서 서로 의논하고 공모하여 다시 주님을 찾아와 흠을 잡고 결과적으로는 예수님을 잡고자 제 2의 공격을 해 온 장면을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사이도 세금 문제는 아주 민감한 문제인 것같이 그 당시에도 세금 문제는 역시 아주 민감한 문제였는데 예수님을 덫에 걸리게 하려는 자기들 나름대로의 기발한 발상으로 세금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찾아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언제나 그랬듯이 주님께서는 나타난 사건마다 그 사건을 이용하시어 오히려 죄를 지적하시고 바른 진리를 가르치시는 좋은 기회로 삼으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기회를 이용하시어 우리의 시민권과 또 천국 시민권에 대해 분명하게 가르쳐 주시며 양쪽 다 우리가 해야 할 의무를 감당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함을 가르쳐 주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소개받는 우리 모두가 세상 나라에 대한 우리의 의무도 충실하고 또한 천국 백성으로서 해야 할 영적 의무도 충실하게 이행하여 세상에서도 칭찬 받고 하나님께도 칭찬 받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말씀을 2 부분으로 나누어 본문의 뜻을 이해하고 본문이 주는 교훈을 받고 그 교훈을 우리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는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바리새인들의 질문(15-17)

[2]예수님의 답변(18-22) 입니다.

 

[1]먼저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5절에 보니 “이에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로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론하고”라 되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나 대제사장들이 자기들의 지혜로 자기들의 지식으로 아무리 주님께 대적했어도 허사인 것을 알고 이제는 정정당당하게 변론해서는 아니 되겠으니 말에 실수를 하게 만들어서 덫에 걸리게 할까 하고 지도자 회의를 가졌다는 이야기입니다. 머리를 맞대고 짜낸 묘수가 무엇인지 아세요? 그 동안에는 대제사장들이나 바리새인들이 직접 주님께 부딪혀서 말싸움을 걸었지만 패했으므로 망신스러워 이제는 자기들이 직접 나서지 아니하고 바리새인들이 자기들의 제자들, 즉 학문을 지금 연구하고 있는 학생들을 보내기로 한 것입니다. 또 바리새인들이 자기들의 제자들을 보내되 헤롯당원들을 함께 예수님께 보낸 것입니다.

헤롯당원들이란 로마 정부를 지지하는 정치적 집단으로 주로 사두개인들이 이 파에 속해 있으며 이들이 믿고 있는 것은 정부가 마땅히 종교 위에 있어서 종교를 지배해야 한다고 믿는 무리들을 말합니다. 이들은 부활도 믿지 않을 뿐 아니라 죽은 후의 사람의 상태를 인정하지 않고 어떤 초자연적인 사실들을 믿지 않는 자들이었으며 심지어 이교도 사원 같은 것이 이스라엘에 어느 정도 세워지는 것은 허용되어야 한다고 믿는 무리들이었던 것입니다. 즉 자기들의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타협할 수 있고 양보할 수 있는 무리들인 것입니다. 이들은 황제 숭배자들로 황제 이외의 누구에게든 세금을 낸다는 것은 황제를 모독하는 불경스런 일로 믿는 자들이었던 것입니다.

반면에 바리새파라면 종교가 마땅히 정부 위에 있어서 정부 조직이 종교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고 믿는 자들로 이들 역시 하나님 외에는 다른 신은 없으며 하나님 외에 로마 황제에게 세금 내는 것을 늘 마땅치 않게 생각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그 당시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엄격하게 실행한다는 보수주의자들이었으며 이들이 믿기는 헤롯당파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이방인들과 똑같은 죄인들로 여겼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바리새파와 헤롯당파는 사사건건 서로 의견이 대립된 상태에 있었던 원수지간의 두 파였는데 예수님을 잡아죽이는 목적으로는 하나가 되어 바리새파 제자들과 함께 헤롯당원들이 예수님께 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두 파가 모두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타협할 수 있는 위선자들임을 증명하는 것이 되겠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온 목적이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로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론하고’ 온 자들인데도 그들의 온 목적을 위장하고 배우는 학생들을 보내 진리를 탐구하는 척하고 예수님께 찾아가 질문하도록 시킨 사실입니다. 즉 바리새파 제자들이 헤롯당원들께 물었어도 그들도 대답하지 못해 헤롯당원들과 함께 온 것같이 위장한 것입니다. 이들이 얼마나 기만하고 아첨을 떨면서 자기들의 목적을 이루려 하였는지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선생님’ 즉 랍비라고 칭했습니다. 많이 배우고 잘 가르치는 자로 대우한 것입니다. 또 ‘참되시다’고 했습니다. 거짓이 없는 진리의 본체로 인정을 했습니다. 또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는 자’라 하였습니다. 거짓 선지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참 선지자란 말이 되겠지요. 또 그들은 예수님을 ‘아무도 거리끼는 일이 없으신 분, 사람을 외모로 보시지 않는 분’ 이라고 했으니 이것은 사람의 인기에도 관심이 없고 또한 사람이 두려워 자기가 할말을 못하는 자도 아님을 믿고 있다고 고백을 한 것입니다.

이들은 이 정도 아첨을 떨고 주님께 질문을 던졌습니다. “당신의 생각에는 어떠한지 우리에게 이르소서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나이까 불가하나이까” 였습니다. 요사이 말로 제법 머리를 굴려서 만들어진 기발한 질문인 듯 보이기도 합니다. 즉 이 정도의 질문이라면 결과적으로 예수님을 잡아죽이기에 충분한 덫이 되겠다고 자신 만만하게 던진 질문이라고 믿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앞에서 언급했던 대로 바리새파는 하나님 외에 이방 황제에게 세를 바치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불경스런 죄를 짓는 것으로 믿고 있고 반면에 헤롯당파는 역시 가이사 황제 외에 그 누구에게든 세금을 바치는 것은 황제를 거역하는 일로 서로 반목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만일 유대 율법주의적 입장에서 이방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일이라고 하면 헤롯당원들이 예수님을 당장 황제에게 고발하여 예수님을 체포할 것이요, 반면에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다라고 대답한다면 보수적인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을 모독한 자로 잡아 재판하여 정죄 할 수 있는 교묘한 질문이었던 것입니다. 뭐라고 답을 해도 걸려들게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위선적이요 살인적인 질문을 가지고 와서 질문하고 있는 그들의 마음을 짐작해 보시기 바랍니다.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나이까 불가하나이까 가 그들의 질문이었습니다.

 

[2]두 번째는 예수님의 답변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난처한 질문을 받았다면 어떻게 대답을 했겠습니까? 18절에 보니 “예수께서 저희의 악함을 아시고 가라사대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라고 대답의 문을 여십니다. 우리 인간이라면 그들의 아첨에 속아넘어갔을는지 모르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흉계를 꿰뚫어 보시고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라고 책망을 쏟으신 것입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척, 예수님을 존경하고 높이는 척하는 위선자들이었기에 그들을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책망을 하신 것입니다. 눅 20:20 에 보면 이들을 정탐꾼, 또 의로운 척하는 위선자들이라 표현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들이 외식하는 자들, 위선자들임을 다 아셨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마음도 빤히 다 아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셋돈을 내게 보이라” 하시니 그들이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왔다고 했습니다. 그 당시 세금이란 재산세, 소득세, 그리고 인두세가 있었는데 여기 본문에서 말하는 세금이란 인두세를 말하는 것으로 남자는 14세부터 65세까지, 여자는 12세부터 65세까지 모두가 내는 세금이 있었는데 1 년에 1데나리온씩 냈으며 1 데나리온은 남자 하루의 품삯에 해당되었다고 합니다.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오니 주님께서 그들에게 질문을 하십니다. 이 데나리온에 그려진 형상과 글이 뉘 것이냐는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데나리온은 은전이었는데 한 쪽 면에는 월계관을 쓰고 있는 그 당시의 황제 티베리우스의 머리 상과 ‘존엄한 신의 아들 티베리우스 가이사’라는 글이 쓰여 있고 다른 면에는 황제의 어머니 상과 글이 쓰여 있었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오시면 아브라함과 사라의 상이 새겨진 화폐가 세계적으로 통용되리라 믿었다고 합니다.

질문을 받은 바리새인들의 제자들이 “가이사의 것이니이다”라고 대답을 한 것입니다. 가이사란 본래 로마 최대의 정치가 쥴리어스 씨이자의 성 씨이자를 가이사로 발음한 것입니다. 그후 로마의 모든 황제에게 가이사란 칭호가 사용되었으며 가이사란 황제라는 말이 되겠습니다. 황제의 얼굴 사진과 황제의 글이 동전에 있으므로 예수님의 질문에 가이사의 것이라고 대답을 한 것입니다.

이 대답을 들은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신 것입니다. 무슨 말일까요? 가이사와 하나님을 혼동하지 말고 잘 구분하여 각각 잘 섬기라는 말입니다. 가이사는 세상 왕이요, 하나님은 하늘 나라의 영적 왕이시므로 세상 왕께 드려야 할 충성은 가이사에게 바치고 하나님께 드려야 할 충성은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시대 사람들이 깨닫지 못한 이중적 시민권에 대해 새로운 깨우침을 주신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세상 나라와 하늘 나라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음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에게는 세상 정부에도 충정 해야 함을 가르쳐 주었고, 헤롯당원들께는 이 세상 말고 영적인 세계가 있음을 분명히 선언하신 것입니다. 교회가 정부를 다스려서도 아니 되며 정부가 교회를 다스려서도 아니 되고 정부는 정부, 교회는 교회라는 것입니다. 교인이 국민으로서 나라를 위해 해야 할 의무는 마땅히 이행해야 하고 또한 그가 교인으로서 하나님께 드려야 할 헌신과 헌물은 또 마땅히 드려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헌금을 했다고 나라에 바치는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는 이론이 성립될 수 없으며 나라에 세금을 바쳤으니 하나님께 바치는 헌금을 면제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라가 주는 혜택, 교통, 상하수도, 전기 깨스, 군인과 경찰의 안전등 많은 혜택을 주고 있으므로 받은 혜택에 대해 국민이 해야 할 의무를 충실히 불평 없이해야 한다는 말이며,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깨닫고 하나님이 바라시는 예배와 헌신과 봉사를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행하라는 말씀이 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분명하게 국가에 내는 세금을 내라고 공개적으로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눅 23:2에 보면 주님께서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지 말라고 선동했다고 고소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 시에 위증죄를 피할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마지막 절인 22절을 보니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기이히 여겨 예수를 떠나 가니라”라고 기록되었음을 보게 됩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의 덫에 예수님께서 꼼짝 못하고 결려들 줄 알았는데 주님의 지혜에 경탄하여 기이히 여기고 떠나갔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본문 말씀을 통해 어떤 교훈을 받게 되며 그 교훈을 우리 생활에 어떻게 적용해야 하겠습니까?

 

첫째,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라는 것입니다.

정부에서 하나님을 못 믿게 하고 대신 대통령을 숭배하라고 하지 않는 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정부가 부여하는 의무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일본 사람들이 천황을 숭배하도록 했던 기독교 핍박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이 하나님 대신 사람을 숭배하라는 그런 것을 요구하지 않고 종교는 종교, 정부는 정부로 구분하여 국가로부터 우리의 권리가 주어지고 또한 의무가 주어진다면 그 의무를 충실히 감당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요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것이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금 내는 것, 군에 가는 것이 성경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롬 13:1에 보면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고 했습니다. 위에 있는 권세란 정부를 말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도 정부가 요구하는 기본 적인 의무를 순응해야 한다는 뜻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로서 정부를 거역하는 것이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딛 3:1 에서도 “너는 저희로 하여금 정사와 권세 잡은 자들에게 복종하며 순종하게 하며”라 했습니다. 교회 지도자들은 성도들이 정부에 해야 할 기본적인 의무에 순응하도록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벧전 2:17 에 보면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왕을 공경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크리스천으로서는 사회에서도 질서와 규범을 잘 지키는 모범적인 시민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리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목숨, 우리의 영혼, 우리의 재산, 우리의 가족 모두 하나님의 것입니다. 빛, 공기, 물 등 자연 모두 하나님의 것입니다. 국가가 도로, 교통, 안전, 전기 수도 등 혜택을 주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의 혜택을 받고 있는 자들을 그 나라의 국민이라고 합니다. 즉 그 사람은 그 나라에 속한 사람입니다. 다른 말로 말한다면 그 국민은 그 나라의 자산인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에 의해 얻어지고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혜택을 입고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속한 자들이요 하나님의 자산인 것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들은 하나님께 드려야 할 마땅한 의무를 역시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국가가 국방과 납세의 의무를 부과하듯 하나님께서도 그의 백성들께 의무를 부과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무슨 의무를 부과하신다고 생각하십니까? 십일조입니까? 하나님께서 돈을 좋아하는 어떤 교회 지도자들과 같은 분이시라면 십일조로 만족하시겠지만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것은 그보다 훨씬 크고 귀한 것입니다. 롬 12:1에 보면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영적 예배니라” 하셨습니다. 십일조를 드리고 자기가 할 일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분들은 그것으로 하나님의 양에는 차지 않음을 분명히 아시기 바랍니다. 10의 1도 하나님의 것이지만 10의 9도 하나님의 것이요, 또한 우리의 몸이 하나님의 것이므로 우리의 몸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도록 힘써라 는 것입니다. 주일 예배에 한번 참석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양에 차지 않음을 아시기 바랍니다. 마 22:37에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였습니다. 우리의 마음, 우리의 목숨, 우리의 뜻은 모두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이기에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일부를 드리는 것을 만족하시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몸, 우리의 마음, 또 우리의 뜻 모두를 묶어서 바치기를 바라시는 분이십니다. 내 세이빙 통장을 내 이름으로 만들었을지라도 그것은 가명이요 진짜 통장 주인은 하나님으로 알아야 하며, 내 집이 내 이름으로 등기가 되어 있지만 진짜 집주인은 하나님으로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쓰시겠다고 하면 언제든 주인에게 돌려 드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인이 목숨을 요구할 때에는 스테반과 같이 주인에게 내어 줄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가진 돈을 드리는 것도 기뻐 받으실 것입니다. 또 우리 몸으로 봉사하는 것도 기뻐 받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더욱 기뻐 받으시는 것은 우리의 죄를 하나님께 내 놓으시기를 바라십니다. 또 감사의 계절이 아니더라도 우리의 입에서 마음에서 항상 감사와 찬양이 나오기를 바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듣는 것을 바라시며 또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기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모든 것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피 값으로 산것이 되었으니 우리의 모든 것을 드려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것이 마땅한 도리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온전히 바치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