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계명 – 마태복음 22:34-40

주님께서는 사두개인들로부터 부활에 관한 질문을 받으시고 그 질문에 성경적 교훈을 주시고 그들이 성경에 대해 무식했던 점을 책망하셨기 때문에 질문자들은 조용히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사두개인들까지도 당해 내지 못하고 예수님께 완패한 것을 알게 된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위치가 흔들림을 느꼈을 것입니다.

오늘 주신 본문에서는 이런 형편에 있는 바리새인들이 공회 회원들과 심각하게 대책을 논의한 결과 율법에 정통한 한 율법사를 보내어 주님께 ‘계명 중에 어떤 계명이 큰 계명인가?’를 질문하므로 제 4차의 도전을 시도하는 내용이 우리들에게 소개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번에도 이 기회를 놓치지 않으시고 이틀만 지나면 십자가를 지셔야 하는 주님으로서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자원인 ‘사랑’에 대해서 가르쳐 주시게 됩니다. 율법을 철저히 지킨다고 자부하면서도 율법의 본질적 사상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바리새인들에게 율법의 본질적 사상이 바로 사랑인 것을 가르쳐 주시는 호기회로 삼으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소개받는 우리 모두도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사랑에 대해 올바르게 배워 우리의 매일 매일의 생활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복된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을 3 부분으로 나누어 본문이 주는 뜻을 이해하고 본문이 주는 교훈을 찾으며 그 교훈을 우리 일상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는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바리새인들의 음모(34-36)

[2]첫째 되는 계명(37-38)

[3]둘째 되는 계명(39-40) 입니다.

 

[1]맨 먼저 바리새인들의 음모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34절에 보니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부활을 믿지 않은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과의 부활 논쟁에서 패배한 것을 한편 다행으로 생각했을 줄 압니다. 부활이 없다는 사두개인들이 부활 논쟁에서 예수님을 이겼다고 한다면 자연적으로 바리새인들의 부활 주장이 허구인 것으로 판정되기 때문입니다. 일단 바리새파가 주장하는 부활에 대한 정통성은 유지되었으므로 이제 예수님을 넘어뜨리기만 한다면 자기들의 정통성은 더욱 빛이 나게 될 것이므로 예수님을 넘어뜨릴 수 있는 재 도전을 시도하기 위해 ‘모였다’는 것입니다. 모였다는 것은 산헤드린 회원들이 공식적으로 모여 궁리를 했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함께 모여 궁리한 결과는 그들이 이미 예수님의 신적 통찰력에 기가 죽어 다른 대책이 없으므로 무엇을 배우려는 위장된 자세를 견지하면서 주님과의 논쟁에서 승부를 내보겠다는 중지를 모으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 동안에는 단체로 예수님을 대항했는데 이제는 율법사 한 사람을 예수님께 보내서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라는 질문을 하기로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질문을 통해서 어떤 수확을 거둘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을 까요? 유대인들은 율법을 철두철미하게 잘 준수하기 위해 율법들을 중요한 율법, 덜 중요한 율법으로 분류를 해 놓고 중요한 율법부터 우선적으로 철저히 지키려 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도 그 율법을 다 지킬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613 개로 만들어 놓고 그중 248개는 적극적인 계명으로 구분하고 또 나머지 365 개는 소극적인 계명으로 구분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613이란 십계명의 글자 수가 613 자라고 합니다. 히브리어이겠지요. 그리고 248은 사람 몸의 지체 수이며 365는 1년 날 수에 근거를 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구분을 해 둔 이후에 그 중 또 어떤 계명이 더 중요한가? 에 대한 논쟁이 연속되었었는데 어떤 자는 안식일이 제일 중요하다. 어떤 자는 할례에 대한 계명이 제일 중요하다. 또 어떤 자는 제사 관련 계명이 제일 중요하다 등 의견들이 분분하였는데 이 계명에 대해 예수님께 질문하므로 주님의 답변을 듣는 청중들과 주님의 의견이 엇갈리게 될 것이므로 이 질문은 주님과 무리들 간의 갈등 요인으로 적합하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기대는 어떻게 해서든지 군중들로부터의 예수님의 인기를 깍아 내리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 율법사를 예수님께 보내어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라고 묻게 한 것입니다. 5절에 보면 ‘예수를 시험하기 위하여 묻되’ 라고 되어 있는 것을 보아도 무엇을 알기 위한 질문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율법사란 교법사라고도 불리우는데, 서기관이라 불리우는 직업 내의 한 직분으로 그들은 법정과 회당에서 종사했지만 특별히 율법 연구와 해석에 치중했던 직책을 맡은 자들로 그들은 율법에 정통한 신학자들이요 법률 전문가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께 질문한 율법사는 주님께 많이 호의적이었고 주님께서도 그를 인정했던 율법사인 것을 마가 복음의 기록을 통해 보게 됩니다. 막 12:28-34에 보면 그 서기관은 예수님과 사두개인들의 변론하는 장소에 참석한 자로 예수님께서 대답 잘하신 것을 알았다고 되어 있으며, 질문에 주님께서 대답을 하시자 ‘옳소이다’라고 주님의 답을 긍정하였는데 주님께서는 그에게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 멀지 않도다”라고 하셨음을 보게 됩니다.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냐?”는 질문은 율법 중에 어떤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냐는 질문이며 절대로 지켜야 하는 법이 어떤 것이냐는 질문이 되겠습니다. 또 다른 말로 말한다면 꼭 지키지 않아도 되는 작은 율법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하여 나온 질문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즉 제일 큰 것만 잘 지키면 작은 것들을 잘 못 지켜도 용서가 될 것이라는 발상에서 나온 질문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 어느 곳에도 더 중요한 것, 또는 좀 등한해도 되는 것이라는 구분이 전연 없으며 작은 법들은 안 지켜도 용서받을 수 있다는 생각은 자기 중심적인 판단이지 하나님의 의도는 전연 아닌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의 교회 주변에서 우리가 지켜야 할 성경 교리 중 ‘본질과 비 본질’로 구분하여 본질은 당연히 지켜야 하고 비 본질은 자유라는 주장을 하는데 그것 역시 성서적 논리가 아니라 신학자의 공식에 불과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그 누가 덜 중요하다고 판정을 했거나 그것은 비 본질이라고 판정을 한다고 해도 그 결정이 하나님의 법을 약화시키지 못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마 23:23에 보면 주님께서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라”는 말씀을 하셨고 약 2:10에는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율법사의 질문에 주님께서 대답을 하시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다 중요하지 내가 좋아하는 말씀만 중요하고 내가 싫어하는 말씀은 덜 중요한 것이 아닌 사실을 분명히 깨닫고 우리 모두는 모든 말씀을 고루 중요한 말씀이요 나를 살리는 말씀으로 받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두 번째는 첫째 되는 계명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주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라고 답하십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는 마음, 목숨, 뜻에 또 힘을 다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첫째 되고 또 큰 계명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답하신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십계명 전반부 하나님께 대한 네 계명의 포괄적인 요약으로 그 당시 유대인들은 성전에서나 가정 예배에서 사용한 신앙 고백문인「쉐마」의 한 부분에 속한 말씀인 것입니다. 그들은 이「쉐마」를 문의 오른 기둥에 기록하고 또 이것을 기록한 양피지를 담은 상자를 끈으로 메어 왼팔에 잡아매거나 또는 이마에 묶거나 하여 매일 두 번씩 소리 높여 암송함으로 유대인에게는 가장 익숙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율법을 연구하고 율법을 암송하며 퍽 사랑하는 것 같으나 진실이 빠진 위선적인 사랑을 보이고 또 율법의 본래의 뜻도 분간 못하고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바리새인들을 향해 주님께서 그들의 심장을 찌르신 것입니다. ‘마음’을 다한다는 것은 가식적으로나 의식적으로 하는 척하거나,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는 것이 아니고 진정으로, 감정을 가지고 사랑해야 한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반갑고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을 손을 붙잡고, 얼싸안고, 환성을 지르고 좋아하듯 가슴으로 사랑해야 한다는 말인 것입니다. 또 ‘성품’을 다하란 말이나 ‘목숨’을 다하란 말은 그분을 위해 숨을 쉬라는 말로 목숨을 그 분을 위해 바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뜻’을 다한다는 말은 분명한 이해와 통찰력을 가지고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감정만이 아닌 이성, 즉 지적 능력을 가지고 사랑한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힘’을 다한다는 말은 본인이 가지고 있는 모든 능력을 다해서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결국 마음, 목숨, 뜻, 힘 을 다한다는 말은 중복적인 표현으로 인간이 가진 모든 것을 가지고, 전 인격을 기울여, 전 존재를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멀리 떨어져 있는 추상적이요 비인격적인 존재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곁에 계신 그 분을 아니 내 속에 계신 그분을 가까이 인격적으로 사랑하되 내 전부를 바쳐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선택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명령인 것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이 주신 사람의 최고의 권리이며 의무이기도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생명의 창조자이시고 보존자이시며 소유자이시며, 내 영혼의 구원자이시므로 신뢰와 존경을 가지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과 충성하도록 요구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주일에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으로 말아 버리는 것은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못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고, 함께 있으며, 그분과 모든 것을 나누고, 그분으로부터 모든 것을 공급받고 그분 아래서 자라며, 그분을 위해 먹고 마시며 그분을 위해 살거나 죽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세상의 아무 것에도 우리들의 마음이 빼앗기는 것을 원치 않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고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순결을 지킨 충성된 종들과 영원히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함께 사시기를 바라시기 때문에 모두가 훌륭한 새 예루살렘의 거민이 되도록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 고 강조하신 것입니다.

 

[3]세 번째는 둘째 되는 계명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레위기 19:18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를 인용하신 것으로 십계명 5째 계명부터 10째 계명까지의 포괄적인 요약이 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그와 같으니’란 말씀을 하시므로 둘째 계명의 비중을 첫째 되는 계명만큼 끌어 올리셨고 또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불가분의 관계임을 암시하시므로 바리새인들의 유전 중 하나님께만 드리면 ‘고르반’되었다고 하여 부모님께나 이웃에게 드려야 할 몫도 드리지 않아도 면제되는 그런 악법을 지적하신 것이기도 합니다. 하나님도 사랑하고 이웃도 동시에 사랑해야지 하나님을 사랑했으므로 이웃 사랑이 면제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 되겠습니다. 요일 4:20-21 에는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라는 주님의 결론을 심각하게 받아드리시기 바랍니다. 실지로 주님께서는 첫째 와 둘째를 하나로 묶으신 것이나 다름없는 것입니다. 이웃 사랑을 하나님 사랑의 증거로 보신 것입니다. 물론 바리새인들은 이를 철저히 구분했었기 때문에 주님께서 이를 강조하신 것으로 이해됩니다. 주님께서는 유전을 배제하고 두 계명을 사랑이라는 말로 연결하여 하나로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한다면서 이웃을 미워한다면 그 신앙은 말뿐인 신앙이요 알맹이 없는 신앙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유대인들의 전통으로는 이웃에 대한 개념도 전연 다릅니다. 그들은 같은 민족만이 이웃으로, 또 자기에게 선을 행한 자만 이웃이었22지만 주님의 이웃에 대한 견해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도움이 필요한 모두는 민족과 인종을 초월하여 이웃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심지어 원수까지라도 이웃으로 간주하시고 그들을 사랑하며 저주하지 말고 축복하라 하신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내게 잘해 주는 사람을 사랑하기는 쉬우나 내게 못한 사람 사랑하기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그들을 사랑하되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절대적으로 실천해야 할 주님의 명령인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미운 짓을 하는 미운 사람이 왜 없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사랑이 빠진 신앙은 울리는 꽹과리라 하였습니다. 아무리 예언하고 병고치고 말씀을 잘 전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웃을 사랑하되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우리들은 나 자신의 잘못에는 얼마나 관대하며 또 감싸며 반대로 남의 잘못에 대해서는 얼마나 인색하며 또 쉽게 들추어냅니까? 그런 우리더러 남이 나에게 잘해 주기를 바란 대로 남을 잘해 주고 우리가 남 때문에 속이 상할 때가 있는데 그런 짓을 남에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철저히 보호하듯 남도 그렇게 아껴 주고 보호해 주라는 것입니다. 퍽 어려운 일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한 것이며 천국은 좁은 문이라고 한 것입니다.

성경은 사랑의 질을 제시해 주십니다. 사랑은 마땅히 오래 참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래 참지 못한 결과로 형제와 불화가 되었다면 사랑이 부족한 증거이며 그 사랑은 이기적인 사랑이었다고 판단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란 마땅히 온유하여야 한다고 합니다. 태도나 또 말씨가 늘 밤송이 같아서야 어찌 사랑이 있는 자라 하겠습니까? 어떤 형편에도 부부간에 친구간에, 또 부모나 자녀에게 부드러운 단어만 골라 써보라는 것입니다. 자랑하거나 교만하지 말라 하십니다. 시기하거나 다투지 말라 하십니다. 남에게 무례하지 말라 하십니다. 이기적이지 말고 성내지 말라 하십니다. 적은 일에도 성을 내는 것은 사랑이 없는 증거요 하나님을 생각지 않은 교만한 까닭인 것입니다. 모든 것을 참고 견디며,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희망적으로,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자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새 계명을 주노니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주님께서는 40절에 이 두 계명은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 결론을 지으십니다. 율법과 선지자란 구약 성경 전체를 말하는 것으로 율법 전체의 근본 정신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근본 정신이 무시되는 모든 의식이 무의미하다는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롬 13:10 에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 하나님의 강령이므로 이것이 우리 각자의 생활 철학이요 삶의 목표가 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 안에서 사랑이란 낱말을 얼마나 많이 듣고 말하게 됩니까? 이 설교를 들은 우리 성도들 각자는 분명히 변화를 시도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명령이므로 우리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이란 추상적인 말만이 아니고 하나님께 예배 드리되 온 몸과 마음과 정성을 다해 충성스럽게 예배하란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상고하고 그 말씀을 묵상하며 그 말씀대로 실천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란 하나님께 모든 것을 아뢰고 또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기도를 열심히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내게 베푸신 은혜가 감사하여 감사의 찬송이 마음에서 폭발하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내게 주신 물질, 재능, 또 시간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신약 교회의 모습에 따라 교회를 조직하고 그 모습대로 예배드리며 교회를 운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입맛에 맞게 변경시켜서는 아니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란 자기의 주장과 자기의 이익은 죽고 오직 하나님께서 높임을 받아야 한다는 마음을 갖고 실천하는 자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우리 모두는 어떤 경우에도 교만하지 말고 나보다 성질이 못된 사람, 나보다 참을성이 없는 사람, 나보다 무식하고 덜 세련된 사람, 아니 나에게 가끔 피해를 끼치는 사람을 두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그를 대할 때에 온유로 대하고 잘 참아 내고 그 사람이 감동을 받도록 하나님의 아들답게 대하라는 것입니다. 아니 남에게 폐를 끼치거나 무례한 짓을 하거나, 내게 이익이 되는 방법으로 이웃과 거래를 하거나 이웃을 대할 때에 늘 부정적으로 대하거나 또 참지 못하거나 해서는 아니 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반성해 봐야 하겠습니다.

 

내가 오래 참는 사람입니까? 온유합니까? 질투하는 자입니까? 자랑이나 좋아하고 교만한 자입니까? 남에게 무례한 짓을 하는 자입니까? 내 이익만 챙기는 자입니까? 성질을 잘 냅니까? 모든 것을 참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는 자인지 반성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남이 내게 잘못할 때에 사랑으로 손을 잦고 용서를 해 주고 있는지 반성해 봐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조건 없이 사랑을 실천할 때 가정은 화목할 것입니다. 사회와 직장은 화평할 것입니다. 우리가 속한 곳은 어디든지 윤기가 흐를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우리가 주님의 제자란 증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 모두 사랑을 실천하시어 주님의 참된 제자들이 다 되시기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