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마지막 주간의 화요일은 길고도 긴 화요일이었습니다. 네 차례의 질문을 받으시고 또 한 차례의 질문을 던지시면서 어떻게든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위선적 신앙에서 벗어나 참된 신앙을 갖도록 여러모로 진리를 가르치셨지만 결과적으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지 아니하므로 주님께서도 그들에게 더 이상 진리를 심어 주려는 노력을 완전히 포기해 버린 날이기도 합니다. 돼지나 개에게 진주를 던지지 말라 하신 주님의 판단에는 하나님을 철저히 잘 섬긴다고 자부하고 있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개나 돼지 그 이상으로 대접해야 할 가치가 없는 자들로 판정을 내리신 모양입니다.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에게 진리를 가르치시겠다는 노력을 포기하신 주님께서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위선적 신앙을 노출시켜서 백성들로 하여금 그들의 위선을 깨닫게 하고 또한 예수님을 헐뜯기 위한 그들의 비난에 백성들이 그 이상 현혹되지 않도록 주의를 요망하는 강력한 메시지를 제자들과 주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전하시게 됩니다. 23장 전체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위선적 신앙을 들추어내신 내용이 수록되어 있으며 그 중 오늘은 12 절까지에서 주의해야 할 거짓 종교에 대해 말씀해 주시고 계십니다.
거짓 종교는 그 당시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세계 각처에 있을 수 있으므로 오늘 우리에게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해 본문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우리를 유혹하는 비 성서적인 교회들을 바로 분간하는 지식을 얻고 주님이 바라시는 본질적인 신앙을 유지하므로 주님의 십자가의 가치를 더욱 빛내고 하나님께 크게 영광을 돌리는 우리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본문의 뜻을 이해하고 본문이 주는 교훈을 찾으며 그 교훈을 우리 일상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는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위선적 신앙(1-7)
[2]성도들의 바른 자세에 대한 권면(8-12) 입니다.
[1]먼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위선적 신앙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주님 당시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위선적 신앙에 대해 주님께서 지적하신 것을 요약한다면 3 가지라 볼 수 있는데 그 중 하나는 행함이 없는 믿음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그들을 ‘모세의 자리에 앉은 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모세의 자리란 유대 회당에 놓여 있는 돌 의자를 말하며 이 돌 의자는 모세의 권위를 상징하는 것으로 서기관이 백성을 가르칠 때에 사용된 의자인 것입니다. 모세의 자리에 앉았다는 말은 그들이 말씀을 가르칠 때는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고 있으나 행동으로는 전연 실천이 없었음을 지적하신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말하는 것은 지키고 행하되 그들의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주의를 주시고 계십니다. 이 말씀에는 위선자의 입에서도 진리가 설파될 수 있다는 말이 되겠으며 진리가 위선자의 입에서 나왔거나 참된 자의 입에서 나왔거나 진리라면 실천해야 한다는 말도 되겠습니다. 다만 위선자의 입에서 진리가 나왔다 하더라도 그들의 잘못된 행동만은 본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위선자가 비록 진리를 가르쳤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그를 하나님의 나라에 받아 주시지 않음을 역시 가르쳐 주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4절에 보면 “그들은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한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남에게 무거운 짐을 지도록 강요했으면 옆에서 그 무거운 짐을 거들어 주어 좀 나누어져야 하지 않겠어요? 그런데 손가락 하나도 그 짐에 데려 하지 않은 자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손가락 하나란 어깨에 멘 무거운 짐에 대조되는 말로서 율법의 작은 것 하나도 행동으로 지키지 않은 그들을 비꼬아 표현하신 말씀인 줄 압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백성들을 율법으로 꽁꽁 묶어 율법의 노예가 되도록 해 놓고는 자기들은 법과 무관한 것 같이 율법을 지키지 않는 언행 불일치의 위선적 생활상을 구체적으로 지적하신 말씀입니다. 무거운 짐이란 율법의 엄격성이나 율법의 의무를 말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바리새인의 율법에 대한 자의적인 해석이나 이를 실천케 하려고 만든 각종 규범과 전통적 계율 613 개 조항을 말하며 생활 전반에 걸쳐 강요된 법의 막중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들 자신은 성가신 규칙들을 고의적으로 회피하거나 복종을 거부한 그들의 처사를 지적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가르치고 짐을 부과하고 제한만을 일삼았고 그 짐을 대신 지거나 나눠지거나 가볍게 하지 않은 자들이었던 것입니다.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니라’하신 주님은 우리의 죄 짐을 대신 지시고 나누어 져 주신 분이신데 그들은 정 반대의 지도자들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주님께서 지적하신 위선적 신앙 두 번째는 사람에게 보이려는 신앙입니다. 5절에 보니 저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마땅히 하나님께 보이려고 해야 함에도 그들의 마음의 초점이 하나님으로부터 사람에게로 전락되고만 것입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경문을 넓히며 옷 술을 크게 했다고 지적하십니다. 경문이 뭔지 아세요? 경문이란 성경 말씀을 담은 상자가 되겠습니다. 처음에는 율법을 기억하고 경건하게 예배에 사용할 목적으로 율법 중에서 중요한 말씀 즉 그들이 쉐마라고 부르는 출 13:1-10 ; 출 13:11-16 ; 신 6:4-9 ; 신 11:13-21 의 4 구절을 양피지에 적은 것을 담은 상자로 이것을 끈으로 달아 왼 팔에 매거나 혹은 이마에 멘 것입니다. 처음에는 아침 기도 시간에만 이것을 메었는데 차츰 하루 종일, 심지어는 잠 잘 때도 메고 잤다고 합니다. 어디다 근거를 두고 이렇게 시작했을까요? 잠언 7:3에 보면 “이것을 네 손가락에 메며 이것을 네 마음 판에 새기라” 하였고 출 13:9에 “이것으로 네 손의 기호와 네 미간의 표를 삼고 여호와의 율법으로 네 입에 있게 하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 말씀은 말씀을 늘 읽고 묵상하고 실천하라는 의미로 주어진 말씀인데 성구를 상자에 넣어 이마에 달고 다니거나 왼 팔에 달고 다녔고 또 되도록 그것도 남의 시선을 끌게 하려고 상자를 점점 더 크게 만들어 달고 다녔다고 하니 주님이 보실 때에 얼마나 가중되게 보였겠습니까?
또 “옷 술을 크게 하였다” 고 지적하십니다. 옷 술이란 겉옷의 네 귀에 붙인 술을 가리키는 것으로 주로 단 청색 실로 짜서 붙였다고 합니다. 청색은 하늘의 하나님과 그분의 언약의 영원성을 상징하는 의미로 청색 술을 달았었는데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내기 위함보다 자기의 거룩성과 경건성을 자랑하기 위해 되도록 사람의 눈에 잘 띄도록 술의 길이도 길게 하고 더욱 눈에 잘 띄는 색으로 짜서 붙였다고 합니다. 성구 상자도 다른 사람보다 더 크게 하고 옷 술도 다른 사람보다 더 길게 달아 자기가 다른 사람보다 더 거룩하다는 것을 자랑하려는 폐단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산상 설교에서 사람에게 보이려는 금식, 구제와 기도를 이미 지적하셨지만 사람에게 경건하게 보이려고 금식하고 기도하고 성구를 달고 다니고 옷 술을 크게 하고 다녔다니 이렇게 하여 어떻게 경건해지겠으며 그렇게 해서 어떻게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성구 상자가 크고 아무리 옷 술이 길고 사람에게 보이려고 기도를 오래 한다고 해도 그런 것이 사람을 경건하게 만들거나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해 주는 것이 아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요사이 교계 지도자들이 단색 가운도 아니오 빨갛고 노란 줄이 몇 개씩 둘러진 화려한 가운을 입고 단에서는 것을 보면서 ‘옷 술을 크게 한다’는 주님의 지적이 바로 교계 지도자들에게 전달되었으면 하는 생각을 갖습니다. 교계 지도자들이 화려한 가운을 입어서 자기의 거룩성이나 권위적인 이미지를 유지하겠다는 사상을 버리지 않는 한 교인들을 위선적인 신앙에서 구제할 길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현대인들이 그런 교회일수록 오히려 선호하고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기 때문입니다. 아니 오히려 교인들이 그런 것을 요구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지적하신 세 번째의 위선적 신앙은 남보다 높아지려는 태도입니다. 그들은 잔치 자리에 가서도 자기가 제일 높다고 뽐내기 위해 서로 제일 상석에 앉기를 원했다고 합니다. 잔치 자리에서 제일 안쪽이 주인의 자리이고 그 오른쪽 귀퉁이 자리가 상석이었다고 합니다. 즉 그 자리에서는 누구든지 다 볼 수 있는 자리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또 회당의 상좌를 차지하기 원한 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 회당에도 회당 관리자 옆 우측 상단의 자리가 상좌였으며 이 자리에 존경받는 자들 및 회당의 지도급들이 앉아 지혜를 설파했다는데 그런 높은 자리에만 서로 앉으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시장에서 인사를 받음으로 자기의 존재를 과시하려 했고 그들은 선생님이란 뜻인 랍비란 칭호를 받기 좋아하였는데 그 당시에는 랍비여, 랍비여 라고 반복하여 부르도록 가르쳤다고 합니다. 사람들 많은데서 사람들마다 굽실거리며 인사하는 것을 본다면 그것을 보는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아 참 존경받는 자이시구나 하지 않겠어요? 또 랍비여, 랍비여 라고 불림을 받기를 좋아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재미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잘난 맛에 살고 남에게 존경받는 재미로 사는 자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섬김을 받으러 오신 예수님과는 정 반대의 길을 걷는 자들임에 틀림없습니다.
요사이 교계에는 목사라는 칭호보다는 박사란 칭호를 더욱 선호합니다. 공부를 하지 않고라도 돈을 주고 박사 학위를 받고 교회 주보에나 전도지에나 자기 명함에 철저히 활용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일반 사람들이 그런 것을 보고 전도가 된다는 말이 되겠지요. 지난 연말에 어떤 목사님으로부터 성탄 축하 인사장을 받았는데 연하장과 함께 그 교회 전도지를 보내 왔더군요. 전도지에 목사의 약력을 자상하게 적어 주었던데 심지어 고등학교 때에 총학생회장과 연대장을 했다는 것까지 자세히 적은 것을 보았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아마 그런 것들이 통할지 모르나 저는 그것을 보면서 현대 기독교의 현주소를 보는 듯 했습니다. 명함은 어떻습니까? 명함을 보면 그 사람의 인격을 대략 짐작하게 됩니다. 사회 사람들은 모르지만 소위 교회 지도자들이 그렇게도 자기를 높이려 안간힘을 쓰는지 정말 이해가 안됩니다. 이런 행위들이 그리스도를 높이기 위함이라고 인정되어지지 아니하고 교회 내에서 자기를 높여 보겠다는 시도로 보여지기 때문에 교인들이 무엇을 배우고 기독교가 언제 주님이 바라시는 수준까지 오르게 되겠습니까?
[2]크게 두 번째로 성도들의 바른 자세에 대한 주님의 권면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과 모인 무리들에게 권면하시기를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칭하지 말라”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고 권면하시며, 또한 “높은 자란 섬기는 자가 높은 자요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가 높아진다”고 권면하십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랍비여 랍비여’ 즉 ‘나의 선생님, 나의 선생님’이란 칭호를 받기를 원했지만 너희들은 그런 칭함을 받기를 바라지 말라 하십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선생님은 오직 한분 뿐이시라는 것입니다. 누구일까요? 진리를 바로 아시고 바로 가르치시는 분은 오직 주 예수님 뿐이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랍비라고 칭함을 받기를 바라는 자들은 진리를 바로 알지 못하거나 또는 바로 실천하지 못하는 사이비 선생님이란 말이 되겠습니다. 선생님이라고 높임을 받으실 분은 주님 한 분이시요 우리 모두는 다 같은 형제이므로 세상에 있는 사람을 놓고 온전한 선생님으로 경외해서는 아니 된다는 것입니다.
또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칭하지 말라 하십니다. 아버지는 오직 한 분이시요 그는 하늘에 계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땅에 있는 사람을 영적인 아버지라 숭상해서는 아니 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그가 신령하다 할지라도 그가 영적인 아버지가 될 수는 없기 때문에 그를 신격화해서는 아니 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디모데의 믿음 안에서의 아버지는 될 수 있을지언정 영적인 아버지 즉 숭배를 받을 자는 아닌 것입니다. 인간을 신격화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 지도자란 칭함을 받지 말라고 하십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실 지도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시라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자기가 온전한 정의를 실천하고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다고 자기를 따라오기를 유혹하는 자들이 가끔 있으나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에까지 인도하실 지도자는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 한분 뿐이시라는 것입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인간인지라 남보다 높아지고자 하는 욕망은 누구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진정한 높은 자란 남을 섬기는 자이라고 깨우쳐 주십니다. 정말 높아지기를 원하는 자는 스스로 낮아져서 남을 섬기는 자가 되라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본문을 통해 어떤 교훈을 얻게 되며 그 교훈을 우리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에는 거짓 종교 즉 위선적 종교가 있을 수 있고 또한 교회 안에는 위선적 신앙을 가진 자가 있을 수 있다는 전제이며 그러므로 위선적 종교를 조심하고 또한 위선적 신앙을 갖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말한다면 하나님을 섬기는 교회라 하면서도 하나님 나라의 확장보다는 자기 교파나 자기 교회의 세력의 확장을 목적하는 교파나 교회들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가르치고 지키기보다는 자기들이 만든 신학이나 헌법이나 제도를 성경 위에 놓고 성경은 지침서라기보다는 참고서 정도로 참조하는 교회들이 있을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성경에 인간들의 의견을 가감한다면 성경은 땜질을 당한 결과가 되어 진리는 덮어지고 인간 사상은 첨가되어 인간의 능력으로 새로운 성경을 만들어 내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절대자로 안다면 그 누구도 성경에 가감을 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일 4:1에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고 하였는데, 교회면 다 교회가 아니오 그 교회가 하나님께 속해 있나 시험해 보라는 말입니다.
그 교회가 하나님께 속했나 시험해 보는 기준은 그 교회가 성도들을 지도하는 지침이 무엇인가를 보아야 합니다. 오직 성경이면 하나님께 속한 교회이나 그 교회가 성경과 사람이 만든 신앙 고백서나 교리, 신조 등을 곁들여 사용한다면 주님이 바라시는 온전하고 순수한 교회라 볼 수 없을 것입니다. 또 성경만이 유일한 지침서라 하면서도 예배 형태나 교회 조직이 초대 교회의 형태를 벗어난 교회가 있다면 순수한 교회가 아니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성경의 지침을 절대적으로 받지 아니하고 성경의 지침에 사람의 의견을 첨가하여 없는 것을 만들고 있는 것을 뺀다면 이것은 새로운 교회를 창조하는 것이요 주님이 세우신 교회를 보존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데서 초점이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방향으로 기울어져 있는 교회는 순수한 교회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교인 수가 많고 오래된 교회이고 선교를 많은 나라에 하고 있다 할 지라도 말씀에서 더하거나 덜하거나 하는 교회는 순수한 교회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교회의 머리는 주님이시요 인간들은 오직 머리에 순종해야 할 존재들이므로 오직 말씀대로 실천하고 하나님께만 초점을 맞춘 교회라야 순수한 교회라 할 것입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는 위선적 신앙인이 있을 수 있다는 전제입니다.
위선적 신앙이란 실지는 그렇지 않는데 잘 믿는 척하는 자들을 말합니다. 사람이 많이 살기 때문에 교회 안에는 여러 형태의 위선적 신앙을 하는 자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행동과 말이 일치되지 아니하는 신앙이 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과 행동이 일치를 이루는 신앙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말만 많이 하고 실천이 없어도 아니 되겠으며, 경건한 모양을 사람에게 보이려는 어떤 습관도 가져서는 아니 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시선은 하나님이요 행여라도 인간의 눈을 의식하는 기도, 헌금, 선행을 하는 믿음을 가져서는 아니 되겠다는 교훈인 것입니다.
또 위선적 신앙이란 주님의 제자라 하면서 교회에서 대접만 받기 좋아하고 명예에나 마음을 두고 높임만 받기를 원하는 자들입니다. 하늘나라에서 자기를 낮추시고 땅에까지 내려오신 주님을 기억치 못하고 교회 안에서 남보다 높아지려고 수고하는 자들도 있을 수 있는데 그는 위선적 신앙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바라는 무대는 이 세상이 아니오 하늘 나라입니다. 이 세상에서 물질이고 명예고 다 차지했어도 그런 것들은 하늘 나라에 올라가는 데에 우리를 잡아 내리는 방해물이 될 수 있을지언정 그것이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것들인 것입니다. 교회에서 교회 직분을 교인들을 끄는 미끼로 사용해서도 아니 될 것이며 교인들 또한 명예나 직분에 관심을 표명하고 그것을 차지하고 교회에서 자기 목소리를 높이는 재미로 신앙 생활을 해서는 아니 된다는 것입니다. 명예는 주님께 드리고 나는 낮은 자리에서 이름도 빛도 없이 남을 섬기는 자리에 서라는 것입니다. 나는 낮아지고 남을 높여 주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기가 힘들겠지만 그렇게 못한다면 주님께서 우리를 높이시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나를 몰라줘도 하나님 높이는 재미로 교회 생활을 열심히 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께서 바라신 것입니다. 우리가 속해 있는 교회가 성경을 떠나서 위선적인 신앙을 갖는다면 우리가 빨리 말씀에 기초된 교회로 회복시켜야 할 것입니다. 또 우리 각자가 자기를 살펴 내 신앙이 위선적인 면이 무엇인지 점검하고 위선적인 신앙이 발견된다면 빨리 시정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이 세상 교회들의 흐름에 물들지 아니하고 자기를 지켜 하늘나라를 소망하며 사는 자답게 언행이 일치하고, 속 사람을 단장하여 경건하고 겸손하며 남을 늘 섬기는 참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