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처녀의 비유 – 마태복음 25:1-13

마태복음 25장도 24장에 이어 세상 끝 즉 세상의 종말에 관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25장에 종말에 관한 세 비유가 주어지는데 오늘은 세 비유 중에서 열 처녀의 비유를 소개받게 됩니다. 제 생각에는 주님께서 주신 비유 중에서 교인들의 머리 속에 제일 남아 있는 비유가 이 열 처녀의 비유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비유인데 이 비유를 다시 살펴보면서 본문 마지막인 13절의 “그런즉 깨어 있어라”는 결론대로 종말을 맞는 우리 성도들 모두가 깨어 있어서 신랑 되신 주님을 영접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을 4 부분으로 나누어 본문의 뜻을 이해하고 본문이 주는 교훈을 찾으며 그 교훈을 우리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는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슬기 있는 처녀와 어리석은 처녀(1-4)

[2]신랑이 나타남(5-9)

[3]혼인 잔치의 시작(10-12)

[4]깨어 있으라(13) 입니다.

 

[1]맨 먼저 슬기 있는 처녀와 어리석은 처녀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 보면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라고 되어 있음같이 예수님의 재림을 혼인 잔치에 비유하여 교훈을 주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계시록에도 보면 예수님의 재림을 ‘어린양의 혼인 잔치’로 묘사되어 있는데 예수님께서 바로 신랑으로 비유되고 잘 믿는 성도들은 신부로 비유하면서 재림시에 신랑 되신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도록 하라고 교훈 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의 비유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하기 위해 이스라엘의 결혼 풍속을 소개해 드립니다. 이스라엘에서는 결혼 예식을 주로 저녁에 거행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신랑이 신부를 데리러 신부집으로 오면 10명의 신부 들러리들이 등불을 들고 나가 맞아 드렸다고 합니다. 초저녁부터 신랑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는데 먼 거리의 신랑집으로부터 신부집까지 도착하려면 때로는 밤 늦게야 도착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즉 도착 시간을 정확히 알 수 없으므로 도착할 때까지 등불을 밝힐 수 있도록 따로 충분한 기름을 준비해 가지고 있었다고 하며 신랑이 도착했다는 전달을 받으면 열 처녀들이 등불을 들고 나가 신랑이 집에 들어오는 길을 밝혔고 신랑이 집안에 들어오면 손님들의 안전을 위해 대문을 닫았다고 합니다.

주님께서는 재림에 대한 교훈을 주시려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아주 친숙한 결혼 풍습을 예로 드셨습니다. 이 혼인 잔치의 신랑은 바로 예수님을 비유한 것이고 등불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10 처녀들은 믿는 성도들을 비유한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신부를 맞으러 나간 10명의 처녀들 중 다섯 처녀는 슬기로운 처녀라 하였고 나머지 다섯 처녀는 미련한 처녀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에 의하면 어떤 기준을 가지고 슬기로운 처녀와 미련한 처녀로 구분하고 있습니까? 10명이 똑같이 등을 손에 들고 어두움을 밝히고 있으나 다섯 명은 등과 함께 여분의 기름통을 가지고 있으나 나머지 다섯 명은 등잔에 들어 있는 기름 외에 다른 여분의 기름통을 가지고 있지 아니했기 때문입니다.

즉, 신랑이 초저녁에 도착을 하면 등잔에 들어 있는 기름으로 충분하겠지만 언제 도착할지를 모르므로 아주 늦게 도착할 경우를 대비하여 기름통에 기름을 충분히 준비하여 기다려야 함에도 다섯 처녀는 그렇지 못했으므로 신랑이 아주 늦게 도착할 경우라면 기름이 없으므로 등불이 꺼져 신랑의 길을 밝힐 수 없고 꺼진 등만을 들고 있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기다림도, 등도 다 무의미하게 될 것이므로 여분의 기름통을 가진 자는 슬기로운 자요 갖지 못한 자를 어리석은 자로 구분한 것입니다.

믿음과 연관해서 생각해 본다면 등불이란 믿음의 외적 모습이요, 기름이란 믿음의 내적 모습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다른 말로 표현해 본다면 등이란 모든 인간이 똑같이 가질 수 있는 믿음이 크든 작든 간에 성도라는 이름을 가진 존재를 말하는 것으로, 교회에 출석하고 또 찬송하고 헌금하며 봉사하고 기도하는 성도들의 비슷한 외적 모습이라 할 수 있으며, 기름이란 말씀에의 순종, 성령의 충만, 말씀에의 충만 된 내적 믿음의 상태를 말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또 다른 말로 표현해 본다면 등이란 인간의 노력으로 이룩한 인간의 의로움이요, 기름이란 하나님의 능력으로 얻어지는 하나님의 의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신자의 외적 모습만 가지고는 성도로서 합당치 않으며, 아무리 의로운 자라 할지라도 자기의 선행과 정직과 헌신만 가지고는 천국 백성으로서는 부족한 자들이라는 말이 될 것이며, 성도는 마땅히 성도의 외적 모습에 성도가 갖추어야 할 성도의 내적 모습을 함께 지녀야 한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성도로서 형식도 있고 내용도 있어야지 형식만 있고 내용이 없다든지 내용만 있고 형식이 없는 것은 마땅치 않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기름이 없는 등도 무의미하며 등이 없이 기름만 몇 통 가지고 있는 것도 무의미한 것과 똑같은 이치입니다. 여분의 기름통이란 지금 반짝한 믿음이 있다 하더라도 그 믿음은 차츰 소모되어 믿음의 등불이 희미해지고 결국 꺼질 수 있을 것이므로 지속적으로 영적인 충전이 절대 필요하다는 영적 영양을 공급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두 번째로 신랑이 나타남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스라엘의 혼인 잔치에서 신랑이 도착했다고 알려주면 대기하고 있던 신부 들러리들이 등불을 들고 나가 신랑을 맞아 드려야 하는데 본문 5절에 보니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세”라는 기록을 보게 됩니다. 왜? 졸며 자게 되었다고 했습니까? ‘신랑이 더디 오므로’ 졸며 잤다고 되어 있지요? 이 경우는 신랑이 초저녁을 훨씬 지나서 밤중에야 도착되어 피곤하고 지친 나머지 잠이 들었으리라 봅니다. 10 처녀 중 몇 명이 졸았다고 되어 있습니까? 슬기로운 처녀들이나 미련한 처녀들이 모두 다 졸며 잤다고 되어 있습니다.

신랑이 밤중에 왔다는 말은 주님의 재림의 시기가 인간들의 예측과 기대보다도 더 늦게 올 수도 있다는 의미로 주님의 재림은 인간들의 시간표에 따라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적인 시간표에 따라 오신다는 의미이며 또 전연 예측하지 못한 때에 오실 수 있다는 예고이기도 합니다. 또 10 처녀가 다 졸며 잤다는 말은 잘 믿는 자나 잘 못 믿는 자나 세상이 험하고 마귀의 도전이 강하므로 신앙 생활에도 피곤과 지침이 있을 수 있다는 의미도 되겠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늦게 오심은 성도들을 지치게 하려는 의도에서가 아니라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시기 때문으로 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이 증거 되어야 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6절에 보니 밤중에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는 소리가 났다고 했습니다. 그 소리를듣고 졸며 자고 있던 10 처녀들이 다 일어나 신랑의 길을 밝힐 등을 준비하는데 여분의 기름통을 준비하지 않은 다섯 처녀들이 자기 등을 보니 기름이 거의 없어지고 불이 꺼져 가므로, 여분의 기름통을 가진 슬기로운 다섯 처녀들에게 기름을 나눠 달라고 부탁을 하게 됩니다. 이 요청을 받은 슬기로운 처녀들은 뭐라고 대답을 하였습니까? 9절에 보니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와 너희의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것을 사라 하니’라 되어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나누어 줄 수 없다는 거절입니다.

기름을 나눠 쓸 수 없다는 말은 천국에 들어가는 믿음이란 철저하게 자기 믿음에 의한 것이지 부모나 자녀 또는 친구의 믿음을 나누어주고 나누어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세상에 살면서 우리가 가진 유여한 것으로 부족한 형제들을 위해서 나누어 쓸 수는 있으되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에는 믿음이 없어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자들에게 그들이 구원받도록 우리가 가진 넉넉한 믿음을 나누어주거나 도울 수는 없는 일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3]셋째로 혼인 잔치의 시작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10절부터 12절에 보니 미련한 다섯 처녀들이 기름을 사러 간 동안에 신랑이 잔치 자리에 도착하므로 대문은 닫혔고 대문이 닫힌 후에야 기름을 사러 간 처녀들이 와서 대문을 열어 달라고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라고 애원하였으나 주님께서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고 대답하셨다는 비유입니다.

문이 닫힌다는 것은 의인과 악인의 구분을 말하는 것으로 지금은 교회 문이 열려 있고 은혜의 때요 구원을 얻을 만한 때이므로 회개하고 돌아오면 들어올 수 있지만 주님께서 오시는 때를 당하면 구원의 기회는 막을 내린다는 뜻인 것입니다. 교회 생활을 하자고 권할 때에 순종하고, 예수를 믿으라고 권할 때에 이끌려야지 그 기회를 놓치고 죽어 버리거나 또는 주님이 오시게 된다면 그 때는 이미 때가 늦게 되는 것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가라지의 비유에서 가라지도 추수 때까지는 알곡과 구분하지 않게 되는데 열 처녀의 비유에서도 주님 오실 때까지는 열 처녀가 똑같이 신랑을 기다리는 처녀요, 똑 같이 등불을 들고 있어서 사람의 눈으로서는 전연 슬기로운 처녀나 어리석은 처녀가 구분되지 않으나 주님 재림시에야 겉과 속이 다른, 진리와 비 진리가, 악인과 선인이 뚜렷하게 구분된다는 교훈입니다.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라는 애원을 해도 주님께서 거절하신 것은 때늦은 고백은 무의미함을 말해주는 것이며 또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는 것’은 주님에 합당치 않다는 말씀이 되겠습니다.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라고 애원하는 자들을 향해 주님께서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고 딱 잘라 거절한 것은 심판의 엄격성과 공정성을 말해 주고 있기도 합니다.

마태 7:21에서는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말씀하시므로 문에 들어갈 수 있는 자의 자격이란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고 미리 선포하신 바가 있습니다. 또한 마 7:22,23에 보면 주의 재림시에 문밖에서 문에 들어가고자 자기를 소개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했다”고 애원을 할 때에 주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하실 것이라는 예고도 하신 바가 있습니다. 심지어 선지자 노릇도 하고 귀신도 쫓아내고, 많은 권능을 행한 자들을 두고도 ‘불법을 행한 자들’이라고 단정을 내리신 것을 보게 됩니다. 즉 그들은 그런 일을 하되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의 영광을 위해 자기의 목적과 자기의 욕심을 위해 했다는 말씀이 되겠습니다.

눅 13:25-27에 보면 같은 의미로서 주님께서 교훈을 주시되 집주인이 한번 문을 닫은 후에는 문을 두드리고 또 자기들이 주님과 함께 먹고 마셨으며 주님 곁에서 주님의 가르침을 받았다고 자기를 소개할지라도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온 자들인지 도무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고 하실 것이라고 미리 경고하셨음을 보게 됩니다. 그러면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교훈 하셨던 것입니다. 이 좁은 문이란 사람이 가고자 하는 편한 길이 아니요, 힘들고 가파른 길일지라도 주님께서 가라고 명령한 길을 가는 길을 말하는 것입니다.

계시록 3:7에서는 주님을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로 표현했고 그 분이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그 분이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분으로 소개되었습니다. 천국의 문은 오직 주님께서만 열고 닫고 할 수 있으며 세상의 어떤 권세도, 재물로도 열고 닫을 수 없으며, 아니 진정한 회개나 피눈물나는 애원도 전연 효력이 없을 때가 오고야 만다는 예고인 것입니다.

 

[4]네 번째로 깨어 있어라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13절에서는 열 처녀의 비유의 결론 부분으로 “그러므로 깨어 있어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하셨습니다. 그 날과 그 시란 주님께서 언제 오실 것인지를 알지 못한다는 말이며 아니 언제 천국의 문이 닫힐지 모른다는 말입니다. 본문의 비유로서는 혼인 잔치 자리의 문이 언제 닫힐지 모른다는 말이 되겠으며 문이 닫힐 것이 정해져 있으므로 천국에 들어가 있어야 한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에 들어가는 일을 절대 미루지 말고 신랑을 맞을 준비를 오늘도 하고 금년 말에도 하며, 젊은 학생들도 하고 또 나이 많으신 어른들도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본문의 비유의 뜻을 중심으로 한다면 기름을 늘 통에 채워 두었다가 필요시에 등잔에 쏟아서 불을 계속 밝히고 있다가 신랑이 오실 때에 신랑을 맞으라는 말이 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주는 본문의 교훈은 무엇이며 우리 일상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본문이 주는 교훈은 한 마디로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참예하기를 바라고 기름을 준비하라는 말씀입니다.

한 방에서 맷돌질을 하는 두 여인 중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림을 받게 될 것이며, 밭에서 일하는 두 남자 중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림을 받게 될 것이라는 예고를 이미 받았지만 등불을 들고 신랑을 맞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열 처녀 중 다섯은 혼인 잔치에 참예하게 되고 다섯은 문밖에서 버림을 받아야 한다는 비유는 우리들에게 큰 충격으로 여겨집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재림시에 신랑으로 등장하실 예수님을 맞기 위해 기다리는 ‘기다림의 공동체’라 할 수 있는데 기다리는 공동체내에서 어떤 이는 혼인 잔치에 참예하게 되고 어떤 교인은 문밖에서 천대받는 현실을 눈으로 목격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불신자란 교회밖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교회 안에도 불신자가 있을 수 있음을 지적해 주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의 재산에서 자기가 받을 상속분을 받아 가지고 집을 나가 그 돈을 허랑 방탕하게 다 써 버린 둘째 아들을 탕자로 알고 있으며 아버지를 떠나지 아니한 첫째 아들은 훌륭한 아들로 보기 쉽지만, 오히려 둘째 아들은 비록 재산을 탕진한 탕자였지만 회개하고 아버지의 집에 돌아온 회개한 탕자가 되었고 첫째 아들은 재산을 축내지도 아니했고 집을 떠나지 아니했지만 회개하고 돌아온 동생을 아버지께서 대환영하는 것을 못마땅해하는, 아버지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집에 있는 탕자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이런 면에서 주님께서는 세리와 창기들이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보다 천국에 더 먼저 들어가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교회 안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소망하며 어린양의 잔치를 기다리는 무리들 중에서도 잔치에 참예하지 못할 무리들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혼인 잔치에 참예한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같이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참예하게 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충분한 기름을 준비해야 합니다. 기름이란 신랑을 맞을 자격을 갖추는 것입니다. 신부의 자격이란 순결과 사랑입니다. 순결이란 철저한 회개입니다. 내 마음속에 있는 크고 잘못된 것들을 하나님 앞에 다 내 놓고 용서를 받아 순결한 신부들이 다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신랑을 사모하는 마음을 계속 지녀야 합니다. 신랑을 사모하는 마음이란 신랑 되신 예수님의 말씀과 교훈을 즐겨 읽고 그 말씀대로 따르는 일이며, 다른 데에 정신을 팔지 아니하고 그 분께 지속적으로 기도하며 그 분의 지도와 보호를 받는 일입니다. 일시적으로 뜨겁게 사랑하다가 식어 버리면 주님 오실 때에는 기름이 없어 신랑을 맞지 못하는 어리석은 처녀들이 되고 맙니다. 일시적인 은혜의 체험만 가지고는 언제 오실지 모르는 신랑을 맞기에는 부족하단 말입니다. 계속적으로 등을 밝힐 기름을 공급해야 합니다. 뜨거운 기도 집회에나 부흥회에 참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렇게 일시적으로 공급받은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매일 내게 필요한 양식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날마다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대로 적용을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잔치에서 몽땅 잡수셨기 때문에 1달, 2달 밥을 먹지 않아도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큐티라는 차원에서 말씀을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신랑이 오셨을 때에 기름을 나눌 수 없듯이 주님께서 재림하셨을 때에 아무리 부부간이라도, 아니 부모와 자식간이나 전도자와 교인간이나 성도간이라도 기름을 나눌 수 없는 것임을 또한 충격적으로 받으실 수 있으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의 것으로는 자기 주머니를 만들지 아니하고 다 나누어준다 하더라도 천국에 가는 기름 주머니, 즉 믿음 주머니는 모두 각자가 자기 주머니를 꼭 만드시기 바랍니다. 온 식구들이, 온 교인들이 철저히 풍성한 믿음 주머니들을 확보하고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 믿음 주머니만이 신랑이 오실 때에 잔치에 들어갈 수 있는 나의 아이디 카드가 될 수 있습니다. 나를 신원 하는 신분증이요 나를 보장해 주는 생명 보험이 될 것입니다. 이 세상의 친구도 부모도, 형제도 아니 세상에서 쌓았던 화려한 경력이나 이력도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들어가는 데에는 아무런 쓸모가 없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한인 교회 성도들 모두가 주님의 재림을 소망하는 신부답게 등의 기름을 늘 준비하고 깨어 있어 한 분도 빠짐없이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다 참예하시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