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야의 승리 – 마태복음 27:45-56

오늘 설교 제목은 메시야의 승리입니다. 이 제목이 주어진 것은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내려오시어 죽음을 면했기 때문이 아니라 십자가에 그대로 자신을 맡기셨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를 분명히 알고 그 뜻대로 절대 순종하셨고 자기가 해내야 할 임무를 충실히 이행하시고 숨을 거두실 때에 ‘다 이루었다’고 만족스런 선언을 하실 수 있는 삶을 사신 분이시기에 메시야의 승리라는 제목을 붙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말씀과 십자가를 지시는 동안에 일어났던 기적적인 특수한 자연 현상을 소개해 주고 있으며 또 이런 자연 현상을 보고 두려움을 가지고 예수는 참 메시야였다고 고백하는 지도자들의 고백과 끝까지 십자가 곁에서 주님의 운명 순간까지 죽음을 지켜보고 안타까워하는 여인들의 아름다운 모습을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소개받는 우리 모두도 승리의 삶을 살다가 임종시에 ‘다 이루었다’는 말을 할 수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본문을 네 부분으로 나누어 본문의 뜻을 이해하고 본문이 주는 교훈을 찾고 그 교훈을 우리의 일상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는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십자가상에서 하신 말씀(46-50)

[2]이적 적인 사건들(45,51-53)

[3]백부장과 군인들의 고백(54)

[4]십자가 곁에 있는 여인들(55) 입니다.

 

[1]맨 먼저 십자가상에서 하신 말씀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오늘 주신 본문에서 보면 46절에 “제 구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 하셨다고 하였으며 50절에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라는 기록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사복음을 종합하여 보면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돌아가시기까지 일곱 말씀을 하신 것을 보게 되는데 그래서 십자가상의 칠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주신 마태복음 본문에서는 일곱 말씀 중 네 번째의 말씀인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는 말씀만 소개해 주었고 영혼이 떠나시기 전에 다시 크게 소리 지르셨다고 만 되었으며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마태는 기록을 해 주고 있지 않으나 다른 복음서 기록자들은 이를 보충해 주고 있습니다.

십자가상에서 하신 첫번 말씀이 무엇인 것으로 기억하십니까? 누가복음 23:34에 나와 있는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입니다. 자기를 죽인 원수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두 번째의 말씀은 요 19:26,27에 있는 말씀으로 자기 어머니에게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라 하셨고 또 제자에게는 ‘보라 네 어머니니라’하심으로 어머니에 대한 부양책임을 제자 중 한 사람에게 부탁하는 말씀을 하셨으며 세 번째의 말씀은 십자가형을 받는 두 강도 중 회개한 한 강도에게 하신 말씀으로 눅 23:43에 있는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하신 것입니다.

 

네 번째 하신 말씀이 오늘 본문에서 소개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로 이 뜻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입니다. 이 말씀은 시편 22:1을 인용하신 것인데 십자가에서 하신 말씀 중 첫 번째 말씀에서는 ‘아버지여’라고 했는데 4번째의 말씀에서는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아들로서 아버지에게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심으로 아버지의 절대적인 권위를 높이신 겸손을 나타내 보이고 있습니다. 또한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자기를 박대하신 아버지께 부르짖고 있는 것입니다. 아들이 왜 아버지로부터 그런 처절한 버림을 받아야만 했을까요? 아니 왜 아버지께서 그 아들을 돌아보시지 않았을까요? 인간들의 죄 때문입니다.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죄를 대하시는 하나님은 냉혹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만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죄 없으신 예수로서가 아니라 더러운 죄인으로서 못 박히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간의 죄를 지신 죄인 예수를 버리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시에 있게 될 죄인에게 행해질 냉혹하고 엄한 심판을 암시해 주고 있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하시니 무리들은 이 말을 듣고 뭐라고 했습니까? 엘리야께 도와 달라고 구원을 청하는 구나 엘리야가 와서 도와주나 보자고 했던 것입니다. 엘리야가 큽니까? 예수님이 큽니까? 무리들은 엘리야가 큰 인물이요 예수님은 가짜 메시야로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 하신 말씀이 요 19:28에 있는 “내가 목마르다” 입니다. 오늘 본문 48절에 “그 중에 한 사람이 달려가서 해융을 가지고 신 포도주를 머금게 하여갈대에 꿰어 마시우거늘”이란 말이 있는데 주님께서 목마르다고 하시니 어떤 사람이 스폰지 같은 것에 신 포도주를 적시어 막대에 묶어 주님께 드려 마시우게 한 것입니다. 해융이란 스폰지를 말하는 것이며 머금게 했다는 말은 적시었다는 말이고 신 포도주란 포도주와 계란과 물을 섞어 만든 음료수를 말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고 죽음 직전에 계신 주님, 목마르다고 말씀하시는 주님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들 때문에 이렇게 목말라 하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본문 50 절에 보면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뭐라고 크게 소리 지르시고 운명하셨을까요? 요한 복음 19:30에 보면 “다 이루었다”고 하셨음을 보게 됩니다. 이 말씀이 십자가위에서 하신 여섯 번째의 말씀입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죽음을 앞에 놓고 뭐라고 고백하겠습니까? 허무하다. 헛되고 헛되며 모든 것이 헛되구나라고 했겠지요? 모든 희망도 모든 꿈도 다 막을 내렸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다 이루었다고 고백하신 것입니다. 사람이 소망을 이 세상에 두었을 경우라면 죽음으로 모든 것이 다 끝나는 것이겠지만 주님의 소망은 하나님의 나라이므로 십자가는 즉 죽음은 새 소망의 개선문이 되며 죽음 그 자체가 바로 승리이기 때문에 다 이루었다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다 이루지 못하도록 마귀들은 여러 모양으로 방해했지만 주님께서는 끝까지 승리의 길을 걸으시어 다 이루신 삶을 사신 것입니다. 다른 말로 말한다면 인류의 구원의 사역을 다 이루신 것입니다.

마지막 일곱 번째로 하신 말씀이 눅 23:46에 있는 말씀인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부탁하나이다”라 하셨습니다. 육은 아버지께서 철저히 버리셨지만 영혼은 철저히 보호해 달라고 부탁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아버지께 무엇을 부탁하고 있습니까? 육적인 것도 중요하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우리들의 영혼을 잘 부탁드려야 하는 것임을 주님께서 친히 모범을 보이신 것입니다.

[2]두 번째로 이적적인 사건들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만 인류의 구원자이시며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날에는 못 박히신 분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었음을 믿게 할 만한 몇 가지의 특이한 사건들이 일어났음을 보게 됩니다. 첫째의 사건은 어두움입니다. 45절에 보면 “제 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하더니”라고 되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시각은 제 3시 즉 아침 9시였는데 제 육시부터 제 구시까지 어두움이 계속하였다고 했으니 낮 12시부터 오후 3시까지 3시간 동안 어두움이 계속되었다는 기록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직전에 애굽 사람이 사는 지역에 어두움을 주시고 이스라엘 사람이 사는 지역에는 밝게 하셨던 일을 기억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번에도 예루살렘 근방에 어두움을 주시되 몇 시간 동안 주셨다고요? 세 시간 동안 어둡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어두움은 죄를 상징하는 것이며 빛 되시는 예수님이 계시지 않음을 상징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다.

두 번째의 사건은 성소 휘장이 찢어졌다는 것입니다. 51절에 보니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라 했습니다. 성소 휘장이란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곳 즉 대 제사장이 속죄일이 되면 일년에 한 번 들어가는 지성소와 성소 사이를 구분해 주고 막아 주는 휘장으로 두께는 손바닥 두께이며 높이가 60피트에 넓이가 30피트인데 이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져 둘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 사건 하나만 본다 하더라도 유대인들의 죄진 마음에 두려움을 주기에 충분했으리라고 봅니다. 60피트 높이의 두터운 천을 찢어 완전히 두개로 나누었기 때문입니다. 성소 휘장을 둘로 완전히 찢으신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지성소와 성소를 가르는 휘장을 찢으심은 대 제사장만이 만나 뵙거나 제사장을 통해 제사 드렸던 하나님을 이제는 누구나 어디서든지 예수님을 통해 만나 뵙고 제사를 드릴 수 있다는 특권의 선포이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신 역사적인 사건이기도 한 것입니다. 즉 이방인도 양자로 젖 붙임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들이 될 수 있는 문을 열어 주신 뜻인 것입니다.

세 번째의 사건이 땅에 지진이 일어나고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고 자던 성도들이 많이 일어났다고 했습니다. 유대 풍습에서의 무덤이란 천연 동굴에나 바위를 쪼개어 만든 인조 동굴에 시체를 안치하고 입구에 돌로 막아 두는 것이었는데 지진이 나서 바위들이 터질 정도여서 무덤 입구에 막아 둔 돌이 굴러져 무덤이 열렸고 죽었던 성도들이 많이 일어났는데 53절에 보면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였다고 했습니다. 죽은 자들이 예수님의 부활 후에 무덤에서 나와서 예루살렘 성 거리를 돌아다녔던 사실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런 신비스럽고 이적적인 사건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때에 일어났던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과 이들의 부활은 우리들도 부활할 것을 확신시켜 주는 사건이기도 한 것입니다.

 

[3]세 번째로 백부장과 군인들의 고백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54절에 보니 백부장과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되어진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가로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 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돌아가시게 한 이후로 3시간 동안이나 어둠이 찾아 왔고 성소 휘장이 찢어졌으며 지진이 나고 무덤이 열리고 죽은 자들이 일어 난 것을 본 모든 무리들은 심히 놀래고 두려워 떨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직접 못박고 조롱했던 자들은 더욱 두려움이 컸을 것입니다. 조금 전까지 예수님께 홍포를 입히고 가시 면류관을 씌우고 침 뱉고 “유대인의 왕 만세,” 또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 든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고 예수님을 조롱했던 그들의 입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분이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4]네 번째로 십자가 곁에 있는 여인들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55절과 56절에 보니 예수님의 갈릴리 전도를 위해 물심 양면으로 봉사하였던 많은 여자들이 주님의 십자가 현장까지 좇아왔다고 했으며 그들 중에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대 풍습으로 여자는 존대 받는 신분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천대받는 신분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존대 받는 남자들 또 힘있는 자들은 다 도망을 치고 약하고 힘없고 천한 자들만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예수님 곁에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지극히 사랑하는 사랑이 평상시에도 주님의 사역을 위해 봉사를 아끼지 않았을 뿐 아니라 생명의 위협과 두려움을 이기게 하여 담대히 십자가 곁에서 주님의 임종을 지켰던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가난한 자를 들어 부자를 부끄럽게 하시며 약한 자를 들어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신다는 진리를 웅변으로 말해 주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인기 있으실 때에는 많은 군중들이 몰려 다녔지만 이제는 오직 연약한 여인들만 주님 곁에 있는 것입니다. 3일 후에는 부활하실 것이며 말세에 세상을 심판하실 주님을 위해 위협을 두려워하지 않고 갈릴리에서 골고다 언덕까지 달려온 여인들의 선택은 자기네 평생에 했었던 많은 선택 중 가장 잘한 결정적인 선택을 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 여인들을 보시면서 주님께서 얼마나 위로가 되시며 애정을 느끼셨겠습니까? 가장 외로우실 때에 주님 곁에, 그것도 위협도 불사하고 주님 곁에 있었던 여인들에게 마음으로 박수를 보내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본문을 통해 어떤 교훈을 얻게 되며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들도 주님의 가신 길을 본받아 우리의 임종시에 다 이루었다는 마지막 말을 남길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죽음을 얼마 남겨 놓지 않은 때에 말하기를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키었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라 하였는데 바울이 자기의 인생의 경주를 다 마치고 그에게 예비된 의의 면류관을 기다림 같이 우리도 사도 바울과 같은 자세로 예비된 상을 받기 위해 기다리는 자들의 대열에 서 있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어떤 삶을 살아야 그런 자리에 서겠습니까? 그런 자리에 서기 위해서는 우리들의 소망을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그 무엇에 두지 아니하고 보이지 않은 사늘 나라에 두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 소망을 두고 사는 모든 인간은 임종의 자리에서 모든 것이 허무하다고 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살아 온 모두는 임종시에 소망해 오던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와 있으므로 지금까지 지내 온 긴 나그네 길을 뒤돌아보며 다 이루었다고 말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그런 자리에 서기 위해서는 선한 싸움에서 늘 승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선한 싸움이란 일상 생활에서 하나님의 뜻과 내 뜻 중에서 늘 하나님의 뜻이 나를 굴복케 하는 삶을 말하는 것이며, 내 육의 욕심보다는 성령의 욕심이 나를 지배하도록 하는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들은 육을 입은 인간인지라 내 육의 욕심대로 살기 쉬운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가라는 길보다는 내가 바라는 길을 가기 쉬운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지 말라는 길을 가고 싶어하는 속성이 있는 자들이기 때문에 내 욕심대로 살고 내 뜻대로 살았던 경우는 임종시에 내 과거의 삶을 뒤돌아보며 다시 내게 새로운 삶이 주어진다면 새롭게 잘 살고 싶다고 후회하는 말을 남기게 될 것이며 선한 싸움에 늘 승리하며 살아왔던 자들은 임종시에 선한 싸움에서 용케 잘 이겨 왔던 자기의 삶을 하나님께 감사하며 다 이루었다고 말을 남길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그런 자리에 서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서 주님의 고통을 함께 나누며 위로하는 자리에 서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 곁에 서는 삶이란 자기의 욕심만을 위해 살지 말고 남을 위해서 사는 희생적인 삶을 사는 것을 말하기도 합니다. 나를 위해 남을 괴롭히고 속이고 남에게 고통을 주는 삶과 정 반대의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내 것을 나누는 삶, 나를 희생하는 삶, 내가 져 주는 삶을 말합니다. 이 세상에서 이웃과 나눈 것, 이 세상에서 이웃을 위해 희생한 것, 이 세상에서 내가 져 주었던 것을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께서 크게 보상해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곁에 있는 삶이란 가난하고 고통 중에 있는 자를 돌아보는 삶을 말하기도 합니다. 주님께서는 늘 가난한 자와 병든 자와 억눌린 자를 위해 사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자들을 돌보는 자는 주님의 십자가 곁에서 주님의 임종을 지켜보는 여인들과 같은 자들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곁에 있는 자란 복음 사업에 동참하는 길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진리를 직접 간접으로 전하는 길입니다. 직접 전도를 하거나 전도하는 일에 적극 가담하여 자기의 정력과 재물을 투자하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에 오직 연약한 여인들만 임종을 지켜보듯 오직 진리의 길에 있는 자들은 늘 외롭고 힘이 없기 때문에 그런 지도자들과 함께 하고 그들에게 힘을 주는 것이 절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형태로 주님의 십자가 곁에 서 있는 삶을 산 사람들은 임종시에 다 이루었다는 만족스런 고백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모든 성도님들이 하루하루의 삶에서 내 삶의 소망을 하나님의 나라에 두며 날마다의 생활 속에서 육과 영의 선한 싸움에서 영이 승리하는 삶을 살며 이기적인 삶에서 한 차원 높여 이타적인 삶을 살며 주님의 십자가 곁에서 주님과 함께 고통을 나누는 삶을 사시어 우리 각자의 임종시에 다 이루었다는 말을 할 수 있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