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과 믿음 소망 사랑

말씀과 믿음 소망 사랑

 

I.말씀과 믿음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롬 10:17)”

믿음은 들음에서 나게되므로 말씀을 듣고 읽어야 한다. 믿음의 뿌리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두어야 한다.

 

1) 구약 시대와 신약 시대의 구분:

성경전체가 하나님의 말씀이나 66권 전부에 우리 믿음의 뿌리를 둘 수 없다. 구약은 구약시대의 경전이요, 신약은 신약시대의 경전이다. 또 구약은 육적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경전이요, 신약은 영적 이스라엘 백성들의(모든 성도들의) 경전이다.

 

우리의 믿음은 구약이 아니요, 신약 즉 더 좋은 새시대의 언약(렘 31:31-34; 히 8:6)에 뿌리를 두어야 한다. 구약(율법)은 임시법이요(갈 3:19) 새 언약은 영원한(바뀌지 않을) 언약이다(히13:20) 신약은 구약의 완성으로, 율법시대에는 동물제사를 드렸으나 새 언약에서는 산제자를 드리며, 구약시대에는 예루살렘 성전(하나님이 임재하셨던 곳)에서 예배를 드렸으나 새 언약에서는 장소에 제한이 없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었다. 율법에서는 원수를 미워하고,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 갚도록 되어있으나 새 언약에서는 원수를 사랑하도록 되어 있으며 원수를 축복하도록 되어 있다. 율법에 의하면 오직 육적 이스라엘만 택한 백성이나 신약에서는 누구나 주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사람은 모두 택함받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구약은 초등학문이요 그림자에 불과한 것에 우리의 믿음의 기초를 삼아서는 아니되며 마땅히 신약(새언약)에 기초를 두어야 한다. 구약(모세 율법)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십계명을 지금 우리가 지켜야 한다고 믿고 있는 신앙은 초보 신앙에 불과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십계명은 모세 율법이므로 율법이 폐했으면 그것도 폐해져야 할 것이고 그것을 지킨다면 율법 전체를 지켜야 할 것이다. 십계명에 따른 다면 사람을 죽이지만 않으면 “살인하지 말라”는 6째 계명을 범한 것이 되지 않으나 주님은 “미워하는 것”도 살인이나 마찬가지로 취급하기 때문에 십계명은 초보 신앙(유대인들)을 위함이요 신앙이 한 차원 높아진 신약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미흡한 것이다. 십계명은 동물 제사를 드리고, 예루살렘 성전에만 하니님이 나타나시던 시대에 적합한 것이었다. 이런 예를 중심해서라도 구약과 신약, 구약시대와 신약시대의 바른 구분이 있어야 바른 신앙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2) 사복음 시대와 사도행전 시대의 구분

주님께서 살아계시어 공생애를 사실 때에는 아직 율법시대가 끝나지 않았던 시기 이다. 그 때까지도 율법이 지켜졌던 시기인 것이다. 주님의 십자가 이후 오순절에 교회가 시작되므로 은혜의 시대, 새 언약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예를 들자면 주님 당시에는 안식일을 지켰으나 교회가 세워진 이후에는 안식후 첫날, 즉 주일(부활일을 기념하여)을 지켰던 것이다. 예배도 아직 사복음 시대에는 예루살렘 성전중심의 예배를 드렸고 교회가 세워진 이후에는 각 가정에서도 예배가 가능했다. 또 예수님 살아계실 때에는 세례(침례)를 받지 않아도 구원(낙원)에 이를 수 있었으나(십자가상의 강도와 같이) 새 언약시대에는 누구나 믿고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야 죄사함을 받아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행 2:38, 막 16:16) 같은 신약속에 포함된 것이나 그 속에서도 시대를 구분하여 믿음의 뿌리를 내려야 한다.

 

 

3) 사도행전 시대와 현 시대의 구분

사도행전 시대에는 아직 성경이 기록되지 아니했으므로 계시(요한 계시록), 환상(베드로가 지시에 의해 고넬료 가정에 보내짐) 또 지시(빌립이 내시에게 보내짐) 등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전달되어 지기도 했으나 지금은 성경이 완전히 기록되어 있으므로 하나님의 뜻을 환상이나 계시 또는 꿈같은 것을 통한 지시에 근거를 두어서는 아니되며 이미 기록된 말씀에 믿음의 뿌리를 두어야 한다. 내 개인에게 특수한 계시나 환상으로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게 되기를 기도하고 소망하는 신앙도 무리이며, 또 받은 환상을, 받은 어떤 꿈을 남에게 자랑하는 것도 사양할 줄 아는 덕을 쌓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런 신비적인 신앙이 10월 28일 휴거한다는 종파를 가져오게 한 것이다. 천국 보고 왔다는 간증도 천국에 대한 모든 것이 성경에 기록이 이미 되어 있으므로 성경말고 추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다만 성경을 그런 사람들의 신비적 체험보다 신임을 주지 못하고 있는 신앙 바탕이 문제인 것이다. 말씀 간증은 그리스도 자랑이요, 환상이나 신비체험 자랑은 자기 자랑인 것이다. 꿈, 환상, 계시보다 말씀을 그 위에 올려놓고 말씀아닌 것은 경시하는 마음 자세가 중요하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높이는 신앙인의 바른 자세인 것이다. 이단이 줄어드는 유일한 길, 교파가 줄어드는 유일한 길, 또 교회마다 신앙 일치가 되는, 연합과 일치를 가져다 주는 옳바른 길이란 말씀에 기초를 둔 신앙 뿐이다.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라고(엡 4:5) 교회 일치의 본질이 기록되어 있으나 이 말씀에 기초를 두지 아니하고 자기 주장과 체험에 기초를 둔 결과로 많은 믿음, 많은 교파, 많은 이단, 많은 분리와 싸움을 가져 온 것이다.

 

II.말씀과 소망(축복)

 

우리는 한 소망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다(4:4) 그 소망이란 이 세상에서 영광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영생의 소망(딛 1:2), 하나님께 두는 소망(딤전 5:5)이다. 말씀에 뿌리를 둔 소망은 하늘 나라에서 흰 옷을 입는 것이요(계 3:5; 7:9) 이 세상에서 왕노릇하는(영광 누리는) 것이 아니라새 하늘과 새 땅(새 예루살렘)에 들어가(계 21:1-2) 세세토록 왕노릇하는 것이다(계 22:5)

 

신약 성서적 소망(축복)은 영적인 축복을 말해 주고 있으며 주님께서 그 축복을 우리에게 모범적으로 보여 주셨다. 육적으로는 말 구유에 태어나시고 목수로 생활 하셨으며 ‘들에 나는 새도 깃들일 곳이 있고 여우도 굴이 있는데 인자는 머리 둘곳이 없다’고 자신의 형편을 소개해 주셨으며, 마지막으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것이다. 육적으로 재물도, 학벌도, 명예도 가지시지 못하고 이 세상을 끝마치신 것이다. 육적으로는 철저하게 실패자이셨다. 그러나 그의 육적 실패와 그가 세상에서 그렇게 낮아지셨기 때문에 결국 높은 하늘 보좌에, 하나님의 우편에 앉게 되는 영광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다. 또 만국을 천년 만년 영원히 통치하는 통치자의 자리에 앉게 한 것이다. 그가 결과적으로 승리의 삶을 사심 같이 그를 따르는 자들도 땅에서는 죽고 하늘에서는 살며, 주님과 함께 영원히 왕노릇하게 하심이 주님의 뜻이요, 주님의 소망인 것이다. 이 주님의 소망과 우리의 소망이 일치를 이루게 하는 것이 바로 말씀에 뿌리를 둔 신앙인 것이다.

 

구약 성서적 축복관은 하나님을 잘 섬기는 자는 물질로 풍성하고 병이 없고(출 23:25-26) 전쟁에 이기고, 만일 하나님 섬김을 거역하면 전쟁에 지고, 재산과 건강과 하는 일에 화가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 면에서 집안에 우환이 있으면 범죄의 결과로 보았기 때문에 나면서부터 소경된 자의 죄가 누구의 죄냐고 주님께 질문을 던졌던 것이다. 또 욥이 하나님을 잘 섬긴것은 그에게 크게 복을 주었기 때문일 거라고 사탄이 하나님께 참소했으며 재산과 생명과 건강을 빼았으면 하나님을 멀리 할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물론 결과는 그의 재산을 전부 잃고, 그의 자녀를 다 잃고 몸에 심한 악창이 났으며, 심지어 자기 부인까지도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저주했으나 그의 순수한 믿음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이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 1:21)”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욥 2:10)” 라고 대답하므로 사탄의 시험에서 승리를 했고 결과적으로 다시 하나님께서 크게 복을 내리셨던 것이다. 그러나 욥의 친구들은 재앙을 받은 것은 범죄의 결과이므로 죄를 회개해야 한다고 계속 권고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재앙은 죄의 결과가 아니었고 의인도 고통을 받는 다는 진리를 깨우쳐 준 것이다.

 

구약적 축복관을 그대로 받아드려 예수 믿으면 사업도 잘되고 세상적으로 잘 된다고 기독교를 전파한다면 이것은 주님의 기본 사상과 불 일치를 이루는 가르침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주님의 교훈은 세상에서 번성한다는 그런 축복관이 아니요 오히려 세상에서는 가난하고 낮아지고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승리를 강조하고 계신 것이다. 주님의 가르치심의 일부를 찾아보므로 보다 분명해 지리라 믿는다. 1)섬김을 받으려 하지 말고 섬기는 자가 되라(마 20:28) 2)생명을 잃은 자가 되라(마 10:39) 3)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눠 주라(마 19:21) 4)재물을 투자하여 천국(보물)을 사라(마 13:45) 5)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는다(딤후 3:12; 막 10:30) 6)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1:8) 7)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롬 8:17) 8) 하나님의 심판은 순교자의 수가 다 차야 심판이 시작된다(계 6:11)(성도들중 더 많은 순교자가 나오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다)

 

이런 진리를 바로 깨닫고 소망을 오직 하늘 나라에 둔 스테반은 순교 당했고(행 7:55-56) 사도 바울은 옥에 갇혀서도 찬송했으며(행 16:25) 자기에게 유익하던 세상 자랑거리를 배설물과 같이 버릴 수 있었으며(빌 3:8) 옥에 갇히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번 죽을 뻔하였고 돌로 맞고 많은 위험을 만났으며, 자지 못하고 주리고 목마르고 여러번 굶고, 춥고 헐벗었던 것이다(고후 11:23-27) 그는 이 세상에서 오래 오래 장수하는 것을 바랐던 것이 아니라 차라리 몸을 떠나 주 앞에 가는 것이었다(고후 5:8) 그는 세상의 영광과 면류관을 바랐던 것이 아니라 주님이 주실 영광, 주님이 주실 면류관을 소망하며 살았던 것이다(딤후 4:8) 그가 그런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세상과 하늘나라’를 비교할 때 비교가 되지 않았음를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가 믿고 있는 하늘 나라의 가치는 세상의 무엇보다도 심지어 목숨보다도 귀하게 믿었던 것이다. 우리가 하늘나라에서 받을 영광은 현재 받는 어떤 고난에 비교할 때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가치가 있음을 체험하고(롬 8:18) 장차 받을 영광을 위해 현재의 어떤 고난도 달게 받아 드렸으며 우리도 그의 삶과 같이 살도록 권장하고 있는 것이다.

 

말씀에 기초를 둔 신앙은 세상의 번영도 축복이요, 세상의 실패도 축복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세상의 번영과 실패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전연 기억됨이 없기 때문이요 일시적인 현상기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것에 가치를 두고 예수 잘 믿어 그런 번영의 복을 받겠다는 비 말씀적인 신앙의 차원에서 점점 성장하여 배설물과 같이 버릴 수 있고 오직 하늘나라의 면류관을 바라고 예수를 믿어나가는 신앙이 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세상 번영에 가치를 두고 그것만을 얻기 위해 노력했지만 어느 시기가 지나면 그런 것들이 모두 헛되고 헛된 것임을 깨닫고 후회하는 때가 오고야 말기 때문이다(전도서 12:8) 눅 16장의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에서 볼때 거지는 나사로라는 이름이 주어지나 부자는 그의 이름이 기록되지 않았음은 무한한 진리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요 보지 못한 것들의 증거라고(히11:1) 했는데 “흰옷을 입고 하늘나라에 가서 하나님의 보좌 주변에서 밤낮 찬양하며 주를 섬기며 그와 함께 왕노릇 하기를 바라는 자에게 그 참 소망이 실체로 이뤄질 것이다.”

 

III.말씀과 생활(사랑)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였다(시 1:2), 또 말씀을 듣고 읽고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하였다(계 1:3) 주님의 뜻은 우리가 복이 있는 자가 되게 하기 위해 말씀을 날마다 가까이 하고 그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대로 실천하는 것을 권고하고 계신다. 달리 말해서 QT 생활을 실천하므로 날마다 말씀을 묵상하고 실천하므로 누리게 될 복을 받으라는 추천이요 권고인 것이다 . 믿음 생활의 가치와 효과는 말씀의 실천에 있다. 성경에 기록된 그 좋은 말씀을 내가 일상생활에서 내가 몸소 실천해 나가므로 나 자신이 무한히 행복한 자임을 발견하게 되고 그 행복이 오직 주님이 주신 것으로 깨달음이 와서 주님과의 바른 관계가 이뤄지게 되는 것이다. 말씀을 본 뜻대로 실천하려면 첫째 그 말씀의 뜻을 바로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QT생활을 통해 그날 주어진 짧은 말씀을 이해하고 그 본문의 욧점을 적고 그 본문이 내게 주는 교훈과 이 말씀에 따라 살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하루의 계획을 적고 그대로 하루를 살게해 달라고 기도하고 하루를 그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삶을 지속해 나간다면 나 중심의 삶, 내 주장이 강한 삶에서 주님 중심의 삶, 주님의 주장대로 사는 행복한 삶으로 점점 변화되어 갈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의 교훈대로 살 수만 있다면 너무 행복할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정신에 의해 산다면, 내가 돈이 없어도, 내가 억울한 일을 당해도, 남이 나를 못살게 한다해도 그런 외적 환경에 의해서 크게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면서도 기쁘지 못하고 행복하지 못한 것은 말씀대로 살려고 함 보다는 내 욕심대로 살려고 힘써왔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를 믿고 따른다 하면서도 주님을 따르기 보다는 주님을 내 방향으로 끌고 가고 그 뜻이 이뤄지도록 금식 철야 기도하며 내 욕심을 이루려는 몸부림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고 따른다는 참 뜻은 예수님이 운전하시는 배에 올라탄 것처럼 주님이 운전하시고 요구하는 대로 따라 가는 생활인 것이다. 나의 고집, 나의 경험, 나의 욕심을 버리고 나는 없고 주님께서 나를 온전히 지배하시도록 내 맡기는 삶인 것이다. 성경은 많이 읽어도 그 정신으로 살지 못한 것은 QT 생활과 같은 말씀 실천의 생활 경험이 전연 없었기 때문에 우리의 성품이 그대로 살아 있고 주님의 성품으로 바뀌이지 못했기 때문인 것이다.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살아야 하는데 아직 내 정신으로 살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주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은 상당히 차이가 있음을 시인하지 않으면 않된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은 어떤 시기에도 어떤 상항에서도 꼭 적용해야할 진리인 것이다. 어디서나 언제라도 주님의 정신을 뽑아내고 어떤 환경을 핑개삼아 내 정신으로 행동했다면 결과는 행복할 수 없는 결과가 오고 말 것임을 우리는 시인해야 할 것이다.

 

내 정신                                                                                     주님의 정신

  1. 원수를 미워하고 원수 망하기 바란다                    1. 원수를 사랑하고 축복하라
  2. 받는 자가 복있는 사람                                                  2. 주는 자가 복이 있는 사람
  3. 의인에게만 해가 비췬다                                               3. 의인과 악인에게 해가 골고루 비췬다
  4. 나를 높여야 높아진다(높아지고 싶다)                   4. 자신을 낮추고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라
  5. 남을 비판해야 시원할 것 같다                                   5. 남을 비판하지 말라
  6. 재물과 주님을 함께 섬기고 싶다                              6. 재물과 주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7. 나를 해한자에게 해 주는 것은 당연하다               7. 오른편 뺨을 친자에게 왼편 뺨을 돌려대라
  8. 무엇을 먹을까 무었을 입을까 염려한다                8. 그런 염려는 이방인들이 하는 것이다
  9. 좋으면 감사하고 나쁘면 실망(원망)한다               9. 범사에 감사하라
  10. 남편과 아내가 조건부로 사랑하고 순종한다       10. 조건 없이 복종하고 사랑한다

 

 

우리는 우리 사람의 옷을 벗고 주님의 옷으로 갈아 입어야 한다. 내 본성을 버리고 주님의 성품으로 갈아 끼워야 한다. 떡으로 채워 온 우리의 체질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의 체질을 바꺼나가야 한다. 이런 체질개선이 없이는 주님이 주실 흰옷이 맞지 않을 것이다. 말씀 체질, 영적 체질로 바꿔나가므로 우리의 체중을 줄여 공중으로 휴거 될 수 있도록 말씀 충만을 가져다 줄 QT생활을 해야 할것이다.

 

이런 말씀의 체험을 이웃과 나누는 삶이 옳바른 간증이요 바람직한 간증이라 할 것이다. 말씀속에서 내게 나타나시고 역사하시는 주님을 증거하는 삶, 또 이런 삶을 살도록 이웃에게 QT를 지도하는 삶이 바람직한 제자 양육이라 할 것이다.

 

말씀 사랑이 하나님 사랑이요, 말씀 실천이 하나님 사랑이며, 말씀의 바른 실천이 참다운 이웃 사랑을 낳을 수 있을 것이므로(고전 13:1-3) 말씀은 더 많이 강조되어야 하고 그 말씀의 적용은 신앙인들의 활동 어디에나 똑 같이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예배(설교, 기도, 찬송, 헌금, 만찬 등)에도 철저히 성서의 가르침에 의해 지배되어야 하고, 교회 조직도 마땅히 성경에서 말하는 것에 근거하여 적용해야 할 것이며, 더군다나 구원 문제도 그 근거가 오로지 성경에 근거한 정답에 따라 이를 확신하고 순종해야 할 것이다.

 

성경에 분명히 주님의 뜻이 나타나 있는데 내 생각으로 내 욕심으로 하기 위해 “그렇지만” 이라는 변명을 앞세워 내 생각대로 하는 모든 행동은 주님과 이웃을 기쁘게 할 수 없고 더욱 우리 자신을 행복하지 못하게 할 요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말씀은 우리를 성도로서 하늘 나라의 백성으로 온전케 할 수 있음을 확신하고 말씀에 우리의 눈과 귀와 마음을 모으고 또 그 말씀에 따라 내 입과 손과 발이 움직여나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 3:16-17)